난, 언제라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날 수 있다. 새벽 3시 기상
박 팀장의 비행기 이륙시간 6시를 맞추기 위해 3시에 기상 시간을 맞추어 놓고 잠이 들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 아침마다 잠을 깨워야 하는 지독한 늦잠꾸러기 나를 두고 모든 가족이 출근과 등교를 하고, 혼자서 기나긴 아침잠 끝에 석양을 여명으로 착각하며 오후 다섯 시쯤 등교했다가 학생과로 끌려가서 허벅지에 검은 줄 수십 개를 만들고서야 기상 습관이 바뀌었던 기억. 잠든 시간과 관계없이 일어날 시간을 정해놓으면 벌떡 일어나는 기막힌 통제력. 어쨌거나 새벽 3시에 박 팀장을 호텔에서 에플리 공항까지 전송하는 임무로 기상 시간이 바뀌었다.
[새벽 4시에 홈스테이 주변, 설경이 시루떡같이 곱고 달콤해 보인다.]
고요함과 정적의 오마하 도심이지만, 유독 박팀장이 귀국하는 날, 오늘은 바람도 잦고 기온은 좀처럼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올드 밀(Old Mill, 오래된 방앗간 지역)에 있는 크라운 프라자 호텔.
박 팀장을 차에 태워 공항으로 가는 동안, 그의 지난 한 주간의 출장 와서 홈인스테드 본사에서의 교육과 방문, 탐방, 토론 등의 얘기를 간략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일주일은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경험으로 쌓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일주일 동안의 출장이 그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평일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떠나는 날에서야 택시 기사처럼 그를 송영하면서야 얘기를 들을 수 있었기에 아쉬움이 많은 것 같았다.
[이 호텔 로비에서는 커피가 공짜이지만, 박 팀장이 떠나고 나서 공짜 커피를 마시러 이곳에 오기엔 마음이 너무 멀다.]
박팀장 마저 오마하를 떠나면 또 나는 혼자 남는다.
공항에 도착해서는 박 팀장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지 말라고 승강장에서 짐을 내리고는 홀연히 공항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홈스테이로 돌아가는 동안, 오마하가 춥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는 느낌이 내내 들었다. 그저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하면서 지냈던 한 주간이었지만, 나에겐 무엇인가 기댈 곳이 있었던 것 같은 위로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오늘 아침 수업은 '셉'에 '레이' 교수를 훑어 보았다는 주장으로 막장 드라마로 치달았다.
'레이' 교수의 몸매를 바른 시선으로 본 적이 없다. 얼굴을 마주할 때면 바다 같은 새파란 색의 불빛으로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리고, 뒷모습을 볼 때면 추운 겨울이라 칭칭 동여맨 옷으로 덕분에 도저히 가늠할 수도 없는 그런 모습으로만 보았지만, 실제로 여성이라는 생각의 시선을 가진 적은 없다. 정서적으로도 그렇고, 딱히 눈길을 끌만큼 멀리서 보아도 매력적이지도 않고, 난 결백했다.
'레이' 교수는 '셉'이 자신을 훌터 보았다는 것이다. 수업이 시작되면서 준비발표를 하는 가운데 다른 동료는 발표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는데, 유일하게 '셉'만이 강의 준비를 하는 '레이' 교수의 뒷모습을 샅샅이 훑었다는 것이다. 오늘 '글로벌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Global Business Communication)' 수업이 시작된 지 10여 분만에 '셉'이 또 제대로 걸려들었다. 일이 보통 일이 아니다. '셉'은 숫검뎅이처럼 큰 눈을 뱅글뱅글 돌려가며 결백을 주장했으나, '레이' 교수는 좀처럼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학교 보안관에게 연락해야 겠다며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잠깐만의 소동이 긴 여운을 남길 모양이다.
우리는 일순간 낭패라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성희롱? 야 이거 골치아픈 문제인데...'
잠시 뒤, 짠~! 하면서 '레이' 교수가 나타났다. 히죽 히면서 강의실에 들어오면서 '레이' 교수는 '셉'의 등을 '턱' 치면서 "놀랐지? 장난도 못 치나?" 하고는 강의실 앞으로 나가셨다. 깜짝 연기에 우리는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에 한숨을 쉬었다. '셉'의 상기된 얼굴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그래도 다행 아닌가? 불미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모두 안심했다.
"여성을 볼 때는 시선을 무릎 아래와 얼굴 위쪽으로 고정하세요."라고 웃음이 가시지 않는 얼굴모습으로 대화를 이어가셨다. 오늘의 주제는 '가련한 예절(poor manner, 맞는 해석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어디를 가나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을 둘 데 없어 방황하는 우리에게는 더더욱 좋은 수업이 될 듯했다. 나이 오십에 세상에 단 하나의 사랑으로 버텨왔다고 자부하지만, 본능적으로 숨이 막힐 듯이 아름다운 여자를 본적은 이곳 UNO에서도 여러 번 있었다. 지난 2010년에는 오마하 출신의 미스 미국이 탄생했다고 자부하는 이곳에는 아리따운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게 할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때때로 발견하곤 한다.
본능적으로야 발길을 멈추고 눈으로나마 감복하는 시간을 갖고 싶지만, 이성으로는 태연한 척 지나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회의나 일로 인해서 대화할 때, 남자와 달리 울퉁불퉁한 외모를 바라볼 때 어디에 시선을 고정해야 할지를 고민스러운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레이' 교수가 가르치시는 말 "얼굴을 보면서 말을 해야 할 때는 눈동자를 보지 마시고, 눈과 눈 사이에 시선을 고정하세요.", '레이' 교수가 바다처럼 파란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우리 시선이 어찌 그 파란 눈동자로 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배워야 하고 훈련해야 한다.
"세상의 수많은 남자들이 잠깐의 외도로 탓에 수십 년의 명성이 한순간 무너져 버리는 것을 보아왔지 않는가? 이것도 일종의 훈련으로 생각하고 수련하라! 한 여성으로서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강조하면서, UNO 대학교 내에서도 거의 의도적으로 시선을 유도하고는 고발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경고를 이어갔다.
결론적으로 '아내 이외의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마라.'라고 하면서 몇몇 미국 드라마가 미국 여성들을 세계적인 바람둥이로 몰고 갔다며, 이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고, 이 때문에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면서, 한심스러운 방송국의 상업성에 대해서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레이' 교수는 "미국 여성들은 바람둥이가 아니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려달라."는 주문도 있었다.
종교, 돈, 정치성향, 인종, 건강상태, 나이, 몸무게 등에 대한 주제는 절대로 절대 꺼내지 말라.
이어진 강의는 대화 중에 빠져야 할 주제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씩 칠판에 열거하는 단어가 우리가 주로 얘기해왔던 것이라서 당혹스러웠다. 종교, 돈, 정치성향, 인종, 건강, 나이, 결혼 여부... 등은 절대로 비즈니스 관계에서 꺼내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제의 얘기가 진행되면 발끈하면서 "난 이런 주제의 대화에 대해서 불편합니다. 우리 주제를 바꿀까요? (I'm not really comfortable talking about that, could we change the subject?)" 라면서 자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글로벌 비즈니스를 주도하는 사람들이라나? 무슨 주제로 얘기를 꺼내야 할까?
숙제입니다. 매일 아침 준비해야 할 대화 주제 10가지를 확인해 오세요.
오늘은 '하나님, 드디어 금요일입니다. (TGIF, Thanks God Its Friday)'인데, 뭔 말만 꺼내면 숙제를 내주는지 알 수가 없다.
오후 일정은 올드마켓(Old Market)에 가서 멕시칸 요리를 각자 돈을 내고 먹고, 듀람 박물관(Duram Museum)에 가는 일정이 있었다.
오후 일정을 안내하는 '레이' 교수가 우리를 데리고 간 식당은 '올드마켓(오래된 가게)' 지역에 트리니(Trini's)라는 식당. 멕시코 원주민과 결혼한 (비즈니스에서는 삼가해야 할 인종, 결혼 여부를 언급하지 말아야 하지만, 설명상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우리네 익숙한 문화를 금기 주제로 두고 피하자니 쉽지 않다) '레이' 교수는 멕시코 요리를 무척 좋아한다.
[올드마켓(Old Market)에 있는 트리니(Trini's) 멕시칸 식당]
역시 '레이' 교수와의 식사는 불편하다. 식탁에 팔꿈치를 괴는 것은 낮은 교육 수준의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라는 둥, 양념그릇은 가까운 사람이 전달해야 한다는 둥, 두 사람 사이 놓인 물의 주인은 왼쪽 사람이라는 둥, 냅킨은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으로 잡고 써야 한다는 둥, 잔소리에 식욕을 다 잃을 지경이 되어서야 점심 식사가 끝이 났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멕시코 요리를 먹은 기분이다.
점심 후 잠깐, '올드 마켓(Old Market)' 상점에 들어가서 오래전에 만들어진 물건들을 구경했다. 오래된 물건이 값이 더 비싸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격표를 보고는 기절할 정도였다. 아마도 우리네의 골동품이 그 값이 더 높은 이유도 거기에 있으리라. 추억이 묻어 있기에 추억 값이 보태진 것일까?
[올드마켓에서 팔리는 상품들과 모습, 속도는 시속 1마일이다.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곳]
듀람 박물관(Durham Museum)에서 리한센(Lee Hansen) 시니어 역장님을 뵈었다.
['레이' 교수가 유치원 보모처럼 박물관에 따라붙었다.]
리한센 역장님은 담당하는 역이 없는 역장님이시다. 듀람 박물관에서 철도 역사관 안에 있는 한 오래된 증기기관차에서 관광객들에게 철도의 역사를 알려주시는 일을 하고 있다. 거만하게 보일 수는 있지만, 관람객이 들어와도 서서 인사를 하거나 돌아다니면서 설명을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주위에 뺑 둘러앉게 하시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가면서 철도역사를 설명해주시는 여유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의 나이를 묻는 것이 실례라 묻지는 못했지만, 리한센 역장님의 연세는 100세에 가까운 것은 분명하다. 그분이 타고 다니던 열차 얘기는 1900년대 초반 이야기이시니까 말이다.
그 리한센 역장님 본인이야말로 살아있는 박물관이신 셈이다.
귀퉁이에 전시된 버펄로(Buffalo) 의 박제를 보고서야 한국의 소(牛)와는 확연하게 다른 동물임을 알 수 있었다.
[박제된 버팔로(Buffalo)가 전시되어 있다. 박제라서 그런지 온순한 동물처럼 보인다.]
곳곳에 놓인 미국인들의 생활용품, 우리네의 과거는 이들과 얼마나 다를까? 근현대사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박물관을 돌아보고 귀가하는 길에 '내일 캔자스 시티로 가자.'는 의기투합이 이루어졌다.
숙제도 많고 공부할 것도 많지만, 우리가 외부로 나갈 시간이 주말밖에 없고, 차량을 운행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지라, 나에게 시선에 집중되었다. "우리 내일 다른 도시로 자동차 여행을 떠납시다."라는 '타치로'의 제안에 '오스틴'이 동조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래, 이곳에서 이런 여행을 경험하는 것도 다 사장님이 보내신 뜻에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모험심을 보여줄 수 있고. 주모자가 되어 캔자스행이 결정되었다. 일체 비용은 1/n, 단, 자동차 기름 값은 나를 제외하고 1/n. 나는 운전을 하니까!
홈스테이로 귀가하는 자동차 안에서 남은 셋이 즉흥적인 얘기로 시작되었지만, 내일 아침 여덟 시에 '다치로'의 집 앞에서 만나서, '오스틴'과 함께 '캔자스 시'로 떠나기로 결심된 것이다.
주중에 '내비게이션'을 사긴 했지만,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고생문을 열어놓고 주말을 달릴 생각을 하니 긴장감이 손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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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에 미국 유학 다녀오기 차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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