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등교에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아침 여섯 시에 기상 시간 알람을 맞추어 놓고 잠이 들었으나, 긴장 탓인지 알람 소리가 공기를 가르기 전에 벌떡 일어나 먼저 아침을 맞았다.
'아, 이런 배포 적은 친구 보게나. 좀 늦을 수도 있지, 뭘 그리 안달이 난 것처럼 부산을 떠나?' 나 자신에게 격려를 보낸다. 그래도 어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트북 컴퓨터부터 깨웠다. 느릿느릿한 인터넷 속도에 무선 안테나 눈금을 보니 겨우 작은 하나가 생겼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사라지고 하더니 이메일을 열어 주었다. 이래서 대한민국이 IT 강국이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늦은 인터넷을 아무런 불만 없이 사용하고 있다니, 어쩌면 미국인의 인내심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밤새 도착한 이메일은 없었다. 그리고 TV를 틀었다. TV 뉴스 점검. 지역 TV 방송인 KE-TV 채널을 찾아서 뉴스를 틀었다. 여전히 눈이 많이 내려서 길이 어쩌고저쩌고 할 뿐이지. 자막처럼 아래 한 줄을 경고문으로 학교가 휴교를 한다든지 하는 별다른 징후는 없었다.
[사진설명: 지역 TV방송은 지역별로 엉망인 길거리를 고발하듯 알려주고 있다. ]
찬 우유의 후유증을 피하고자 데운 커피 만을 마치고 등굣길에 나섰다. 물론 데이빗 아저씨의 흥겨운 콧노래가 거친 눈길을 부드럽게 이어주었다.
CPACS (The College of Public Affairs and Community Service). 이 건물의 이름을 그냥 씨팩스라고 부른다. 124A. 아침 8시가 되니 입학식도 없이 강의부터 시작되었다. 단지, 공짜 점심을 줄 예정이니 다른 약속하지 말라는 간단한 공지만 있었을 뿐이다.
입학식은 예상 밖으로 '오찬을 통한 상호 인사'가 입학을 의미하는 의식 전부였다.
여섯 명의 학생과 네 분의 교수님, 그리고 현지생활을 도와주는 로리 여사와 사무업무를 하는 시간제 사무직원 케시까지 모두 열두 명을 위한 식탁이 준비되었다. 학생회관(Milo Bail Student Center) 2층 갤러리 룸(Gallery Room). 같은 연수를 두 번째 수강하는 베트남 출신의 차우(Mr.Chau)가 안내를 한다. 그저 말없이 연수생 모두를 인도하는 그의 가방이 유독 크다. 출입구 옆에 붙어 있는 안내판에는 '마일로 베일 학생회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갤러리 룸에는 정오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 국제 전문가 개발 (International Professional Development) 과정을 위한 오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고, 안내판 밑자락에는 점자로 방의 이름을 안내하는 친절까지도 새겨져 있었다.
[사진설명: IPD 입학을 기념한 오찬, 학생회관 갤러리 룸]
강의장 한가운데 자리 잡은 식탁에는 근사한 식탁에 왼쪽 포크 개수가 세 개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보면 거의 제대로 된 '코스 점심'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모두 아시아 출신인 학생 여섯은 아침에 있었던 서로의 통성명에도 서로의 이름을 잊은 지 오래전 얘기로 몸짓 눈짓으로 자리에 앉으려니 케시가 달려 들어오더니 자리를 정해준다. 손에는 명단이 들려져 있다. 학생들의 좌석은 성을 중심으로 알파벳 순으로 정렬. 성이 같으면 이름의 알파벳 순으로 정렬을 시켰나 보다.
나이도 같고 키고 비슷한 에드 퀸 주임교수가 프로그램 운영자로 상석에 앉아서 식사를 지휘하고, 세 분의 여교수는 학생들의 식사 세세히 지켜보는 눈길만 보이고 있으니 서양음식의 맛도 모르는 우리 학생들에게는 버거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동양인의 미덕인 침묵이 흐르고 겨우 자기 소개하라고 하니 그저 시계방향으로 더듬거리며 탐색하듯 눈치를 보이는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릴 뿐. 대화도 없고 아주 조용하고 예의 바른 점심시간을 가졌다. 주메뉴는 미국 쌀을 재료로 한 볶은 밥과 생선이었다. 그 점심이 왜 그리 지루하고 맛은 없던지?
점심을 마칠 때까지 묻는 말에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학생들 그리고 정말 조용히 마무리되었던 점심.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일어설 때 '켓 교수'는 얼굴빛이 변하도록 화난 표정을 지으며 '쌩~'하며 떠나 버렸다. '뭔가 조짐이 심상치 않아!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잖아? 아무 말도 안했는데.' 이 조용한 점심이 두고두고 문제의 소지가 될 줄 우리 여섯 명은 아무도 몰랐다.
예쁘장한 케시가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내 뒤를 쫄래쫄래 밟더니 "수업이 끝나면 하이퍼에 가서 TB 테스트를 받으세요. 꼭 말입니다"하는 말을 건넸다. 일본에서 온 다치로씨와 이바타씨 등 총 세 명이 해당자란다. '하이퍼가 뭐고 어디에 있어?' 걱정이 앞선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하이퍼는 HYPER(Health, Physical Education and Recreation), CPACS 뒤 건물이고, 대부분 일주일 정도 전에 도착해서 오마하 시내의 대략과 캠퍼스에 대한 일습을 마친지라 한글을 깨우치고 입학한 초등학생과 그렇지 않은 아이와의 차이라 할까. 준비 안 된 학생은 이래저래 불리할 뿐이다. 에드 퀸 주임교수가 케시에 뒤를 이어서 "학생 건강증진센터에서 TB 테스트가 끝나면 본인 사무실로 오라."고 하고는 멋진 몸짓을 보이며 자리를 떠났다. '에드 퀸 주임교수 사무실은 또 어디야?'가뜩이나 도통 들리지 않는 강의 시간을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오후 시간을 보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영락없는 학생의 모습으로 이바타 씨와 다치로 씨와 함께 거북이 등 같은 배낭을 지고 '학생 건강 증진센터'로 갔다. 어디 손을 올려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콘돔 박스로 채워진 안내대에서 'TB 테스트를 받으러 왔노라고 설명하는데 60대 여직원이 "맵카드 내놓으세요" 내놓으라고 친절한 미소를 담아 설명한다. 이바타와 다치로는 그 말을 들은 즉시 자신의 사진이 들어 있는 빨간색 카드를 내어 놓는데, 나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여권을 찾아서 디밀었다. 그 여직원은 다시 나에게 "맵 - 카 - 드 - 내 - 어 - 놓 - 으 - 세 - 요."한다. 맵카드가 뭐야? 흘낏 다치로와 이바타가 제출한 맵카드를 보았다. 'MAV CARD'라고 쓰여있고, 사진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학생증'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 왜 나 만 없지?' 아무튼 그 여직원은 반복해서 "맵 - 카 - 드 - 주 - 세 - 요."한다. 정말로 긴 시간을 들여 진이 다 빠지도록 내가 왜 맵카드가 없는지를 설명하고서야 완벽하지도 않고 동양인들에게 치명적으로 오류가 많은 '결핵반응검사'를 위해서, 아주 깡마르고 나이 지긋한 금발의 단발머리 간호사로부터 왼쪽 팔뚝에 약물 주입하는 것으로 검사가 끝이 났다. "결과가 나오는 목요일 오후에 다시 들르라."라는 말을 들으며 하이퍼를 떠났다.
하이퍼를 나오자 이바타와 다치로는 "바이" 한 마디씩 던지고는 각자의 방향으로 부지런히 발길을 옮겼다. 바람이 수평으로 뺨을 두드리는 건물 가운데에 혼자 서 있었다. '에드 퀸 주임교수의 방이 어디란 말인가? 왜 물어보지도 않고 덜컥 대답했을까? 뭔 얘기를 하자는 것인가? 혹시 별도 시험?'
다시 강의장이 있는 씨팩스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이 텅~ 비었다. 누구에게 묻고자 하더라도 알려줄 사람이 없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벽에 걸려 있는 구내 비상전화에 눈길이 갔다. '지금이 나에겐 비상 상황이야.' 수화기를 들고 안내를 찾았다. 학교 경찰이 전화를 받는다. "나 IPD 학생인데, 우리 에드퀸 주임교수 방이 어디죠?" 아마도 한국에서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교수님 방을 못 찾아서 학교 경찰에게 비상 전화를 건다? 정말 어불성설이다. 아니 이곳에서 살자면 난 그야말로 유치원생 마음가짐으로 가자! 뜻밖에 친절하게 답변을 준다. 전화기의 위치가 그쪽에서 확인되나 보다.
어렵게 찾아간 에드퀸 주임교수는 출입문을 열어놓은 채로 책상에 앉아서 졸고 있다가 나의 노크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맞이한다. 그리고 어딘가에 심각한 전화를 걸더니 잠시 기다리면 자동차 리스 회사 사장님이 오신단다. '일본 유학경험이 있다.'며 자랑하는 에드퀸 교수의 방에는 일본풍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잠시 뒤, 빨간색 후드 티셔츠에 빨간색 야구모자를 쓰고 색바랜 청바지를 입고 흰색 농구화를 신은 70대 노인이 찾아왔다. 톰 번스타인. 자동차 리스회사 사장님이란다. 본인 사무실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하고 차를 인도받으란다. 에드퀸 주임교수는 짐 하나를 덜었다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톰 사장과 나를 내쫓듯이 몰아낸다. 익숙지 않은 상황이 계속 발생한다.
76번가의 단층 건물에 큰 간판에는 무슨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적혀 있는 사무실로 나를 안내했는데, 그곳에서는 파머스 (Farmers Co.)라는 이름의 보험회사 외판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월 보험료는 225불이고, 월 자동차 리스비용은 500불이고. 자동차 리스비용은 현찰로 내야하고, 보험료는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파머스 보험회사 외판원은 여러 장의 보험 약관을 들추면서 평상시 말 속도에 30배의 가속 페달을 밟은 듯 설명을 해간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동의를 해야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연방 아는척 '알았습니다. 알았다니까요. 네, 네'를 연발하고 있다. 무식을 이런 식으로 극복해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설명을 들었다. 십여군데 사인을 마치고서야 손가락이 아파서 펼 수 없을 정도의 강도 높은 악수를 통해서 최종 계약 성사를 확인했다.
자동차 리스 역시 긴 약관이 있었지만, 톰 사장님은 피곤함에 지친 듯 사인할 곳에 집게손가락으로 지긋하게 알려줄 뿐이다. 그리고 건네준 두 달간의 리스비 달러 뭉치를 받고서는 손바닥 위에 열쇠를 떨어뜨려 준다. "아, 이 차로 말할 것 같으면, 2008년 시보레 코발트로 계기판에 이유 모를 경고문구가 나오는데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오른쪽 조수석 앞쪽에 잡음이 있는데 신경 쓰지 말고, 잘 쓰도록, 이상." 더는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운전을 해보라고 문을 열어주고는 시동 걸리는 소리를 들으니 톰 사장님은 옆에 세워놓은 차를 타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사진 설명: 두 달간 나와 함께 외출을 함께한 코발트 801호 리스 자동차]
'여기가 어디지? 홈스테이를 어떻게 찾아가지?' 창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는데 시동 걸린 차 안에서 망연히 방향 감각을 잃고 그냥 한참 동안 학교로부터 지금까지 왔던 궤적을 상상했다. '일단 중앙로인 닷지 스트리트를 찾고 49번가에서 좌회전하면서 캐피탈 애비뉴와 대븐포트 스트리트와 시카고 스트리트를 지나면 카스 스트리트가 나오지 그럼 우회전해서 왼쪽으로 네 번째 집이 데이빗 아저씨집." 수첩에 적어놓은 주소와 엮어서 갈 길을 정하고 핸들을 틀었다.
76가에서 72가를 지나서 60번가인 네브래스카 대학을 지나서…. 미국인들은 어정어정한 운전자에게 참으로 배려가 있다 싶도록 서행과 두리번거림으로 좌우로 심하게 흔들리는 내가 탄 차를 뒤에서 아무런 재촉 없이 그저 조용히 따라와 주는 배려를 잊지 않고 있어 주었다.
'자... 닷지 스트리트 50번가다. 좌회전하면 바로 홈스테이!' 좌회~전. '어이쿠, 좌회전 신호가 없네... ' 그럼 다음 48가에서? 아니 없네.. 시선을 거리 왼쪽에 고정해 놓고 좌회전 만을 찾으며 계속 직진을 하고 있다. 40가도 없네... 38가도 없고... 이상하다? 길은 이미 깜깜하게 색을 바꾸었고, 차들 불빛에 눈은 부시는 좌회전은 나타나질 않는다. '아... 좌회전이 없구나. 그럼 우회전으로 돌아서 또 우회전 이런 식으로 길을 찾아야 겠구나.'
고작 10여 킬로미터 되는 거리를 그저 길거리에 표시된 표지판과 감각에 의지해서 한 시간 반 만에 홈스테이에 겨우겨우 도착했다. 차에서 내릴 때를 맞추어 손가락 굵기의 바람 한 줄기가 내 안경테를 중심으로 안팎을 휘감고 나간다. 그 바람이 내 눈시울에 물기를 잔뜩 묻혀 놓았나 보다. 안도감과 함께 손등으로 그 물기를 훔쳐냈다. '야... 쉬운 게 정말 하나도 없어.'
집에 도착한 시각은 정각 여섯 시, 코니 아줌마가 정한 저녁 시간. 연어 스테이크와 아이스크림 후식으로 허기진 배를 가득 채웠다. 타다 남은 재처럼 나는 피로감에 좀처럼 입을 떼기 어려웠지만, 한 시간 동안의 저녁 시간에 코니 아줌마와 데이빗 아저씨의 다정한 대화는 청량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사진 설명: 코니 아줌마의 음식은 정말 최고다. 근사하게 보인 오찬보다 훨씬 맛있다.]
식사를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와 노트북 컴퓨터에 전기를 먹였지만, 인터넷이 살지 않는다. 이 저녁이 답답하고 지루하다. 거의 네 시간을 속절없이 접속 시도... 접속 시도... 접속 시도...만 하다가 열 두 시가 되어서야 내일을 기약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하나님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나, 능히 극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 기도는 어느 때 보다도 간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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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에 미국 유학 다녀오기 차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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