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하 에플리 공항에 또 다른 기억이 있다. 지난 2008년 3월이었다. 사업제안을 위해서 처음으로 오마하에 출장을 갔던 날. 토론토에서 출발한 박 이사와 만나기 위해서 먼저 도착한 나는 오마하 공항에서 두 시간여를 기다렸던 적이 있다. 흑인도 드물게 백인만이 있던 그 공항 대합실에 보안관이 화장실까지 내 뒤를 밟고 있는 것을 확인했던 기분 좋지 않은 기억이 바로 그것이다. 이해는 간다. 얼굴을 보면 어른인데, 몸집은 어린애만 하고, 양복을 입고 몸체만 한 짐가방을 끌고 공항 매점에서 화장실로 대기용 소파로 서성거리는데 공항 보안관의 눈에 왜 안 거슬렸겠는가? 그런데 상상을 해보면 그 두 시간이 즐거울 수 있겠는가? 그래, 오늘부터 좋은 기억으로 바꾸자!
미국 시골에 있는 오마하 공항은 짐을 찾는 곳이 맨 나중에 있다. 그래서 탑승객들이 먼저 환영객들을 만나게 된다. 발걸음을 다시금 여유롭게 보폭을 크게 검색대 모퉁이를 돌아서자. 딱! 눈이 들어오는 미국인 부부가 눈에 띄었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입이 가정 먼저 반응하기 시작했다.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입꼬리를 위로 향하게 하면서 등장하고, 떨리는 입으로 자연스럽게 영어 목소리가 작동한다.
"안녕하세요? 혹시 럼버씨 아니세요?"
그들의 대답을 듣기 전에 시선은 그들이 들고 있는 8절 도화지 반만 한 크기의 '환영 메시지'가 들려 있었다. '오마하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김형래'. 백발에 키는 180cm 정도의 늘씬한 독일계 할아버지와 키 165cm 정도의 묵직한 아일랜드계 할머니. 두 분이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나의 긴장이 봄 빛에 눈 녹듯이 녹지 않을 수 있겠는가? 꿈속에서 본 그분들, 아니 예전에 본 적이 있는 분들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온 김형래라고 합니다." 다급하게 꾸벅 절을 하면서 내 소개를 했다.
"그래, 첫눈에 알아봤다. 키 작은 동양인이 너밖에 없더구나. 반갑다." 코니 아줌마가 지체없는 대답과 함께 와락 나를 껴안는 것이다. '어이쿠!' 너무 과장된 환영 방법 아닌가? 미국 아줌마가 이렇게 왈칵 나를 안아 버리니 숨이 컥 막혀왔다.
"먼 길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데이빗 아저씨가 내 등을 두드리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이런 환영행사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런 분위기로 보아서 오마하 에플리 공항의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분명히 바뀐 것 같다.
코니 아줌마와 데이빗 아저씨가 앞장을 서고 짐 찾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코니 아줌마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짐을 짐짝 다루듯 하니 가방이 저렇게 더러워지는 게 아니냐'는 둥. 그런데 서서히 긴장감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이해하는 말은 10%도 안 되는 것 같은! 그래서 점점 더 긴장되어 간다는 그 느낌.
먼저 옷 가방이 도착했다. 그리고 책이며 세면도구며 노트북이며 하는 학생 신분을 위한 큰 가방이 나타나질 않는다. 모든 승객이 다 떠나고 내 가방 한 개가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방을 운반하는 컨베이어 벨트의 작동이 멈추었다.
'내 가방 하나가 사라졌구나.' 직감이 아니라 현실이다.
코니 아줌마의 큰 눈이 두 배로 확대되었다. 데이빗 아저씨는 침착하게 공항 화물사무실로 나를 안내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무실에는 달랑 나 혼자, 문밖에는 데이빗 아저씨와 코니 아줌마와 둘이서 아주 다정한 환담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 실전이다.
"저... 내 가방 찾아주세요. 두 개를 비행기에 실었는데, 한 개가 없어졌어요." 화물표를 보여주면서 한마디 영어를 건넸다. 친절한 직원은 표를 집어들고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하면서 뭐라뭐라뭐라 끊임없이 설명하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데이빗 아저씨, 좀 도와주세요.' 눈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가와 입가의 미소를 연방 쏘아댈 뿐, 내 맘을 읽지는 못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다시 얘기해 주세요."를 연방 날린 끝에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아마 밖에서는 내가 마치 대화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내가 들은 내용은 분명히 그랬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짐은 다음 비행기로 오니까, 그때 다시 공항으로 나와봐. 다음 비행기는 네 시간 뒤에 도착 예정이야."
밖에 기다리는 코니 아줌마와 데이빗 아저씨에게 의기양양하면서, "다음 비행기로 온대요. 다음 비행기가 오는 네 시간 뒤에 다시 공항까지 태워주세요. 그러실 수 있죠?" 마치 예약이라도 하듯이 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항을 빠져나온 데이빗의 차는 한국에서 온 홈스테이 손님을 태우고 관광 안내하듯 오마하의 구시가지인 올드 마켓을 빙빙 돌아 집으로 향했다. 그중에 오마하를 대표하는 네브래스카대학의 매브릭스 아이스하키팀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면서 점점 나는 평안을 찾고 있었다.
[동영상 설명: 데이빗 아저씨와 코니 아줌마의 첫 만남, 화제는 역시 스포츠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네 시간 후, 눈이 푹푹 빠지도록 그치지 않고 내리는 가운데, 짐가방 하나를 찾기 위해 눈이 수북이 쌓인 위험한 길을 데이빗이 운전하는 차에 실려 공항으로 다시 나갔다. 코니 아줌마의 표정이 영 달갑지 않았다. 공항 화물사무소에 들어서자마자, 데이빗과 직원간의 작은 승강이가 벌어졌다. 뒤늦게 쫓아 들어간 나로서는 아주 난감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네 시간 뒤에 짐이 온다고 해서 왔는데, 왜 짐이 없느냐?"는 데이빗 아저씨의 말에 직원은
"네 시간 뒤에 짐이 도착할 예정이고 집으로 보내 준다고 했었다. 집에서 기다리지 왜 나왔느냐?" 반문하는 것이다.
그 직원은 결국 나에게 시선을 보내면서 "당신 내가 분명히 네 시간 뒤에 짐이 도착하면 집으로 보내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럴 때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히 네 시간 뒤에 짐이 도착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냐? 그래서 온 것이다."
싸우면 뭐하랴? 내 짐은 이미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내가 잘못 들은 것이야. 네 시간 뒤에 도착한다는 소리만 듣고 홈스테이로 배달해 준다는 것은 못들은 것이야. 그렇다고 내가 잘못 들었다고 자백을 하더라도 홈스테이로 떠난 짐을 어떻게 할 아무런 대책이 없는 것 아나?' 나는 자책과 동시에 수습에 나섰다.
[사진설명 : 짐 찾으러 공항에 다시 왔으나 집으로 배달된 사실을 설명하는 데이빗 아저씨]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나는 나서서 논쟁을 진압하고 "데이빗 아저씨, 집으로 돌아가시죠? 집에 보냈다니까!" 짐이 도착하지 않은 것도 하루에 공항을 두 번이나 나간 적도 처음이다. 그것보다도 '내가 잘못 들어서 벌어진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데이빗 아저씨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한참을 코니 아줌마에게 이 사태를 설명하고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곧 공항을 빠져나왔다. '데이빗 아저씨의 저 웃음은 무슨 의미일까?'
[동영상: 짐이 이미 집으로 떠난 것을 알고는 미주리 강가까지 안내하여 주는 친절 남 데이빗 아저씨]
홈스테이로 돌아오는 길에 눈보라는 점점 더 거칠어졌지만, 데이빗 아저씨는 관광안내 하듯 칼날 같은 강바람이 불고 얼음이 둥둥 떠내려가는 미주리 강가를 기어코 나에게 보여 주고서야 집으로 향했다.
눈이 쌓인 길에 차는 연방 이쪽저쪽으로 미끄러졌고, 데이빗 아저씨는 "나는 운전하면서 미끄러지는 것 좋아하지만, 코니 아줌마는 싫어한단다."하면서 자랑을 늘어놓으며 즐겁게 집으로 돌아왔다.
[사진설명: 내가 두 달간 묵었던 홈스테이, 이 층 반대편 창가에 방이 있다.]
두 부부를 1층에 남겨두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2층으로 배정된 방으로 뒤꿈치 바짝 들고 소리를 죽여가며 기어들어 가듯 사라져 주었다. 짐을 푸는 듯 마는 듯. 자정이 넘었다. 내일 아침 8시에 입학식이다. 잠부터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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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에 미국 유학 다녀오기 차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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