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심사를 마치고 면세점을 지나치면서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홈스테이를 비롯한 오마하에서 만나게 될 분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면세점에 들러 주섬주섬 선물을 샀다. 가장 적합한 기준으로 '한국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을 소개해야 할 미국인에게 줄 앏은 금속소재의 책갈피 (Book Mark) 두 묶음을 샀다. 그리고 럼버 부부(Connie and David Rumbaugh)에게 드리기 위해 깡통에 든 인삼캔디를 샀다.
출발 한 시간여를 남겨두고 탑승이 곧 시작된다는 안내방송이 있었다. 물론 퍼스트 클래스가 우선이고 노약자가 우선 탑승한다는 것이다. 방송 끝머리에 '김형래' 고객을 찾는다는 방송이 이어졌다.
속으로 뇌까렸다. '세상에 흔한 이름도 아닌데 하필이면 시카고까지 가는 12시간 35분을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과 가게 되다니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하면서. 그리고는 나와 같은 이름의 김형래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김형래' 고객은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그 김형래가 나? 설마? 난 아니겠지.' 하면서 슬슬 눈치 보기에 들어갔다.
"김형래 고객님께서는 G34 게이트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시카고로 떠나시는 김형래 고객님께서 G34 게이트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번 반복해서 '김형래'를 애타게 찾고 있다.
'참 희한한 녀석도 다 있구나. 김형래! 빨리 나서지 뭐 하고 있어?' 부아가 치밀기까지 했다. 방송하는 직원도 지쳤는지 아니면 '김형래'가 나타났는지 방송도 멈추고 탑승이 시작되었다.
'난 불릴 이유가 없어. 비서실에서 돌아오는 티켓까지 구매했고, 회사에서 다 지출한 것이니 나를 찾을 이유가 없어!'하면서 이코노미 승객들의 끝자락에 어기적거리면서 탑승행렬에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어 나의 보딩패스를 내밀자 갑자기 항공사 직원이 날카로운 금속성에 가까운 비명 같은 소리로 내 이름을 반복하면서
"김형래 고객님, 김형래 고객님 많이 찾았었어요. 왜 이제 오셨어요? 수십 차례 방송했는데!"하면서 짜증을 섞으려는 듯한 감정에 안도감을 섞으며 나를 쳐다보고는, 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보딩패스를 "쫘~ 악 !" 찢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게 무슨 해괴한 행동인가? 그런데 이내 방긋 웃는 얼굴로
"김형래 고객님, 비즈니스 클래스에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저쪽에 있는 직원의 안내를 받으세요"하면서 42번대에 있던 내 좌석을 20B로 바꾸어 주는 것이다. 2층 비즈니스 클래스의 새로운 지정좌석에 앉자마자 승무원은 나에게 아주 친근감 있는 목소리로 나를 맞이하는 것이다. 거기에다 나의 직책을 섞어서.
"김형래 상무님, 시카고까지 편안하게 모실 승무원 김아무개입니다." 나를 어찌 알고 있는가?
[동영상: 프레스티지 클래스의 모습. 침대에 눕듯 편한 자리.]
이코노미 좌석도 몸집 작은 나에겐 결코 불편한 자리가 아니거늘, 무슨 조화가 있어서 나의 좌석이 승격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침대처럼 편안하게 시카고까지 날아갔지만, 귀국 이후에도 난 이 미스터리를 해결하지 못했다.
12시간 35분 만에 시카고에 도착했다. 일등석 고객들부터 비행기에 내려서니 입국심사 순서도 빨리 진행이 될 듯. 거의 두 세 번째 줄에 서서 입국심사를 받게 되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입국심사관이 알아듣지 못하는 빠른 말로 "뭐라뭐라"하면서 여권을 주고는 되돌아가라는 손짓을 해댔다.
'아~ 또 뭐야?' 온통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주여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갑자기 밀려드는 입국자들로 말미암아 통제하기 바쁜 시점에 나는 멍하니 줄도 아닌 중간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잠시 뒤에 주변을 둘러보니 키가 2m에 가까운 공항직원에 마약견인 듯한 개를 끌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악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여권을 보여달라고 손짓으로 하더니
"당신 학생이잖아? 학생비자 F1 입국자는 저쪽 줄로 가야 해!"
마약견은 연신 나에게 코를 들이대고 있었다. 맨 처음 입국장을 빠져나가리라고 했던 예상과는 달리 나는 맨 꽁무니에 서서 쩔쩔매며 유학생 신분으로 입국심사를 마쳤다. 그곳에서 입국심사 직원이 히죽거리면서 나에게 이런 얘기를 건넸다.
"와... 천재 났다. 두 달만에 박사가 되는 방법이 있나 봐?" 겨우 알아듣기는 했지만, 그 조롱에 가까운 질문을 답변할 내 영어실력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참자. 방법이 없지 않느냐? 그리고 아마 이것이 시작일 것이다. 그러니 철저히 겸손하게 학생이 되자. 성실하게 배우자.' 내 결심과는 달리 내 와이셔츠는 땀 범벅이 된 지 오래였다.
시카고 공항은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오마하로 가기 위해 갈아타는 두 시간 또는 세 시간의 여유가 결코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을 때마다 절감하게 된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던 승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오마하로 가는 대합실에는 덩그러니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동양인이라도 눈에 밟히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겠지만. 미국 땅 맨 가운데 위치한 시골도시 오마하로 향하는 동양인은 없었다. 잠깐이지만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그나마 이 녀석이 나와 대화하는 창구가 되어주니까. 고속버스만 한 오마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네 우등버스와 다를 바 없다. 왼쪽 한 줄 오른 쪽 두줄 그리고 가운데 좁은 복도. 물론 이 비행기는 비즈니스니 일등석이니하는 고급석은 없다. 승객들이 하는 얘기를 내가 알아듣는지 점검하기 위해 동영상을 작동시켰다. 물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동영상: 오마하로 가는 비행기에서 잠깐 찍어 보았다.]
시카고에서 오마하로 향하는 비행기는 한 번도 변함없이 서쪽으로 향하는 방향을 바꾸지 않더니만, 이내 오마하 에플리 공항에 착륙하기에 이르렀다. 시선을 떼지 않고 밖을 내다보고 있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활주로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는데 그대로 착륙을 하는 것이다.
"어!"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사이에 비행기는 눈 내리는 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눈 내린 오마하 에플리 공항, 이렇게 눈이 내렸는데, 아무런 안내방송 없이 비행기는 착륙을 강행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은 이 정도의 눈으로 비행기의 이착륙이 지연되는 경우는 없단다.
오마하까지 오는 하루가 이렇게 녹록지 않은 줄 알지 못했기에... 정신줄을 놓아버릴 지경이 되었다.-----------------------------------------------
[쉰 살에 미국 유학 다녀오기 차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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