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으로부터 '징~' '징~'하는 진동과 소음이 끊임없이 나를 흔들어댔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 흠칫 낯선 곳이라는 생각에 몸을 벌떡 세우고 보니 내 집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진동과 소음의 진원지를 찾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옆집의 마당에서 눈 치우는 기계 (스노 블로어, Snowblower)가 원인이었다. 굵직한 오토바이 엔진 소리를 내는 스노 블로어는 새벽 시간이라는 예의와는 무관하게 이쪽저쪽을 움직여가며 넓은 뒷마당에 쌓인 눈을 치워가는 것이었다. 비스듬히 보이는 옆집의 눈 치우는 광경은 이곳이 정녕 미국의 한 곳이라는 것을 실감 나게 하였다.
침대 옆에 가지런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학업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마치고 돌아가는 그날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도록 앞길을 인도해 주옵소서, 아멘'
첫 등교 일이자 입학식이 있는 날이라 꼼꼼하게 등교 준비를 마쳤다. 학생용 배낭에는 입학관련 서류와 비자, 여권 그리고 공책 한 권과 볼펜 두어 자루만을 넣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침 일곱 시, 주방에서 데이비드 아저씨가 그윽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학교 갈 준비는 잘했겠지?" 데이비드 아저씨의 표정은 어제의 긴박했던 부부간의 말다툼을 거의 잊을 정도로 평온했다. '싸움은 물배기로 끝을 내셨나 보지?'
"자, 아침 식사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여기에 식빵이 항상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을 열면 토스터, 커피는 이곳에 항상 있다. 혹시 커피가 식어 있으면 저쪽 전자레인지에 50초를 데우면 되고, 냉장고 이곳에는 우유가 있다. 시리얼은 다섯 가지가 이쪽 찬장에 있고, 버터는 항상 이곳에 버터나이프와 함께 있다. 그리고 과일은 식탁 위 나무 광주리에 사과, 오렌지 그리고 바나나가 있다. 알겠지? "입꼬리를 위로 올리면서 나에게 친절한 설명을 아끼지 않는 데이빗 아저씨의 말을 어찌 모른다고 하겠는가? "그럼, 내가 매일 아침을 준비해줄까? 아니면 자네가 직접 만들어 먹을 텐가? 저녁은 코니 아줌마가 맡고, 아침은 내가 맡기로 했거든?"
엉겁결에 나는 "제가 알아서 챙겨 먹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호기롭게 대답을 했다. 데이빗 아저씨의 표정에서 '생각보다 현지적응이 빠른데? '하는 느낌을 읽을 수 있었다. 다음날이면 후회할 일을 이렇게 자신 있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더구나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던가, 돌아오는 날까지 번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결국 못하고 말았다.
첫날이라서 그런지 데이빗 아저씨는 식빵을 노릇노릇 바삭바삭하게 구워서 버터까지 발라서 아몬드가 듬뿍 담긴 시리얼까지 준비해주셨다. '아, 미처 얘기를 못 했구나. 시리얼과 함께 우유를 먹으면 소화를 못 시키는데….' 입은 방정을 떨며 "감사합니다. "하면서 날름 감사의 말을 드리고, 이내 오른손은 수저를 잡아 거침없이 시리얼을 퍼먹었다. 데이빗 아저씨는 목마른 나에게 연신 우유와 시리얼을 채워주었다. 목젖을 압박하도록 가득 배를 채우고서야 아침식사를 마쳤다.
[사진설명: 눈이 와서 발목까지 눈이 쌓였다. 데이빗 아저씨의 트럭도 집에 올라오지 못한채 비스듬히 서 있다.]자동차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오마하 현지 라디오 방송은 "오늘 저녁 늦게 또는 내일 아침까지 눈이 더 내일 것이라."라고 랩을 하듯이 경고성 방송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야.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렇게 축복처럼 눈이 내리는 날부터 멋진 유학 생활을 보내다니.'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트럭 역시 눈길 미끄러지기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나마 주차장 중에서 가파르지 않은 언덕에 주차장을 만들어 놓은 에플리 빌딩 앞에 데이빗 아저씨는 주차했다. 서둘러 집을 나섰어도 차에서 내린 시간은 강의 시작 10분 전. 차에 내려 건물까지 걷는 10m 정도의 거리를 가는 동안 신발 사이로 눈들이 기회다 싶게 끼어들고 있었다. 겨우 기어 학교에 도착하니 문이 잠긴 것이 아닌가?
[사진설명: 에플리 빌딩의 정문, 왼쪽에 데이빗 아저씨의 오른팔이 보인다.]
미국 대학의 건물의 문은 생각 밖으로 소박한 편이다. 엄청나게 큰 건물일지라도 출입문은 우리네 방문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것이 일반적인데 눈이 오는 아침에 등교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문을 열어 놓는 것이 예의인데 어찌 된 일인가?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기다리던 데이빗 아저씨가 차에서 내려와 나를 도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학생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눈이 푹푹 빠지도록 쌓인 학교 정면을 오른쪽으로 돌아보아도 왼쪽으로 다시 돌아보아도 정성과는 무관하게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양말이 젖어들어 더는 눈 속에서 헤맬 수 없을 때, 영화 제목처럼 '나 홀로 대학에' 어쭙잖은 모습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그나저나 남들은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난 왜 몰랐을까?
데이빗 아저씨도 출입문 손잡이를 거칠게 흔들어 힘으로라도 문을 열려는 기세를 보이는 사이, 학교 경찰이 후드 티셔츠 위에 경찰 모자를 쓴 아주 건방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왜 학교 문을 잠갔어요?" 나도 목청을 높이듯이 학교 경찰에게 항의했다.
"휴교입니다. 휴교! 방송도 안 들었어요?"
나와 데이빗 아저씨는 망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출입문을 바라보다가 아무런 대책도 대안도 없이 집으로 돌아섰다. 출입문에도 어디에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휴교 안내문'은 없었다. 학교에 올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일기예보에 아마도 휴교 내용이 포함되어 방송되었나 보다. 그나저나 내 귀에는 오늘 밤늦게나 내일 아침까지 눈이 많이 내린다는 얘기만 들려왔었다. 이번에는 데이빗 아저씨도 같이 들었으니 일방적인 내 실수가 아니라,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오는 길에는 휴교방송이 없었을 것이라고 내심 위안을 삼았다.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굳이 데이빗 아저씨에게 학교 오는 길에 라디오 방송에서 휴교한다는 말을 들었느냐는 물음을 생략했다.
계속해서 눈은 수평으로 날아와 얼굴을 사정없이 교란을 시키고 있다. 바로 오늘 입학하러 미국까지 서둘러 달려왔는데 아무런 통지도 예고도 없이 학교를 들어가지도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가자니 서운한 마음이 가득 밀려왔다.
돌아오는 길 역시 데이빗 아저씨는 친절을 베풀어 학교 뒤편의 골프장이 있는 엘모어 공원을 보여주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공원을 향한 데이빗 아저씨의 트럭은 예외 없이 거북이 대열에 끼어 있었다. 그런데 신경을 바짝 썼는지 아랫배가 부글부글 끓어 오기 시작했다. 금세 뱃속에서 가스가 폭발할 것 같은 기세로 10초, 5초 단위로 이쪽저쪽으로 이동하면서 '빵빵' 하게 압박을 해오기 시작했다. 아침에 시리얼에 부어 먹었던 찬 우유가 성깔을 내는 모양이다.
[사진설명: 엘모어 공원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길. 뱃속처럼 길도 눈폭풍으로 혼미하다.]
홈스테이에 도착했을 때, 데이빗 아저씨는 약속이 있다며 출입문을 열어주고는 열쇠도 주질 않고 휑하니 사라져 버렸다. 현관에 들어서서 2층에 있는 화장실까지 거리가 왜 그리 멀던지. 다리를 꼬아가면서 실수없이 겨우 도착한 해우소에서 걱정을 풀어놓았다. 그리곤 기진맥진 외투를 입은 채로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사진설명: 내가 묵은 방 창문을 통해서 내려다보이는 홈스테이 뒷마당. 쌓인 눈높이만 해도 적지 않다.]
창 밖에서 징징거리는 스노블로어 소리와 진동에 잠을 깼다. 벌써 어둠이 내리는 시간. 저녁 다섯 시. 점심도 잊고 기나긴 낮잠을 잔 것이다. 이번엔 옆집이 아닌, 데이빗 아저씨 차례가 되었다. 눈이 잦아들고 있었다. 기회는 찬스다. 서둘러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데이빗 아저씨, 저도 같이 함께 눈을 치울게요. 그리고 이런 일은 혼자 하지 마세요. 젊은 제가 있잖아요."
[사진설명: 데이빗 아저씨가 운전하는 스노블로어 눈이 바람에 날리도록 만들어져 있다, 무게도 제법 나간다.]눈 치우는 일로 데이빗 아저씨와 코니 아줌마와 가까워 질 수 있었다.
시계처럼 정확하게 시작되는 저녁 6시 저녁식사. 식사 기도를 위해 내가 두 손을 모으고 기다리는 모습에 코니 아줌마의 기도는 소리높여 기도를 드렸다. "헨리 (제 미국이름)가 오마하에 무사히 도착하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주신 음식 또한 감사합니다. 아멘" 코니 아줌마는 가톨릭, 데이빗 아저씨는 기독교. 부부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음에도 조화롭게 살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사진설명: 코니 아줌마는 순수 미국 음식만을 만들어 주셨다. 주식 중 하나인 감자 튀김, 아래는 디저트. 매일 외식하는 기분이었다.]
저녁을 마치고 노트북을 열어 보았더니 두 줄의 이메일이 이미 아침 일찍 도착해 있었다. 나를 경악하게 한다. 그러니까 옆집 눈치우는 소리에 깨었을 시간, 나는 노트북을 열어 보았어야 했던 것이다.
"김형래 씨, 눈폭풍으로 오늘 휴교합니다. 내일 화요일부터 수업은 시작됩니다."
Henry, School has been canceled this morning due to the snowstorm. We will begin on Tuesday.
순서도 없이 그저 몸으로 하루를 때운 것 같은 불편한 심경으로 미국에서의 둘째 날을 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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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에 미국 유학 다녀오기 차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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