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
켄 하퍼 저/박종인 역 | 청어람미디어2002년 08월, 정가 : \12,000, 376 면
■ 1897년 북극을 정복한 것으로 알려진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 현지 에스키모인들의 도움으로 북극점까지 갔다고는 하지만 증거도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그는 최초의 북극 정복자가 되었다. 탐사 때마다 진귀한 '과학적 표본'을 가지고 돌아와 세상을 놀래키던 그는,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살아있는 에스키모인 6명을 뉴욕에 상륙시킴으로 또한번 이벤트 메이커로서의 그의 면모를 세상에 알린다.
이 에스키모인들은 이미 로버트의 북극점 탐사 전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와 협의된 '물건'으로, 인류학이 태동하던 19세기 후반, 골상 비교연구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 6명의 에스키모인은 전시 첫 이틀 동안 무려 3만명의 미국인들을 불러모으며 '하등 인류'에 대한 미국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켰고, 1년 사이 그 중 4명은 미국 풍토병인 '감기'에 걸려 사망하고 나머지 한명은 본토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소년 '미닉'만은 미국의 한 가정에 입양되어 '문명'을 배우며 성장한다.
하지만 짐짓 평탄할 것 같았던 그의 삶은, 자신의 아버지의 유골이 자연사박물관에 '인류의 표본'으로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비극을 향해 틀어지기 시작한다.
■ 저자 및 역자 소개
저자 : 켄 하퍼Kenn Harper
1945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출생. 결혼 후 캐나다 노스웨스트 테리토리 에스키모 거주 지역 누나부트에서 교사생활 시작. 이주 직후 백인 아내와 이혼. 캐나다 정부의 영어전용정책에 의문을 갖고 에스키모 언어인 이눅티투트를 배움. 에스키모들로부터 ‘일리사이지쿠타크', 즉 ‘키다리 선생'이라는 별명을 얻음.
1974년 교직 은퇴 후 북극 만에 서점 개업. 에스키모 문화에 대한 집필활동 시작. 1977년 북극의 땅끝마을Thule인 그린란드 카나크에서 에스키모 여인과 결혼. 현재 에스키모 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중.
역자 : 박종인
1966년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현재 조선일보 여행담당 기자. 저서로는 인도 기행문 『나마스떼Namaste』와 국내 여행 안내서 『다섯 가지 지독한 여행 이야기』가 있다.
■ 목차
1. 피어리의 사람들
2. 철의 산
3. 미국에 도착하다
4. 뉴욕의 에스키모 고아 소년
5. 미국인 미닉
6. 월래스 사건
7. 사기 사건
8. 눈물 가득한 삶이 찾아오다
9. 우리 아빠를 돌려주세요
10 과학의 이름으로
11 불쌍하기 짝이 없는 미닉 이야기
12 희망 없는 유배
13 북극 계획
14 탈출
15 철갑혐정
16 그린란드로 돌아오다
17 다시 에스키모가 되다
18 땅끝마을 기지
19 새빨간 거짓말쟁이 우이사카사크
20 지명수배, 죽든 살든 상관없음
21 크로커랜드 탐사대
22 다시 브로드웨이에 서다
책 속으로
“우리를 해안에 내려다놓은 뒤에 사람들은 커다란 통 다섯 개를 가지고 왔어. 거기에는 죽은 사람 뼈들이 들어 있었다구. 나는 선원들이 무덤을 파고선 그들을 꺼내는 걸 봤어. 왜 그러냐고 우리가 물었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훌륭한 상자에 넣으려고 이곳으로 데려간다고 했어. 영원히 안전하게 있을 수 있대나. 그런데 나는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몰라. 우리들이 사는 땅은 춥고 돌처럼 딱딱하지만 내 생각에는 죽은 사람들은 우리가 만들어준 돌무덤 속에 있으면 더 나을 것 같아.”
--- pp 73
“우리 아빠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나에게 소중했다. 특히 뉴욕, 이 낯선 땅에 떨어진 이방인이 됐을 때는 더욱더. 뉴욕 생활이 우리의 관계를 얼마나 가깝게 만들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병과 고통과 우리를 에워싼 낯선 존재들에 대한 무지… 이 모든 것 때문에 우리는 공포 속에 죽음이 찾아올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 있어야 했다. 외로움과 고독은 날이 갈수록 깊어갔다. 집을 멀리 떠나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아빠와 나는 더욱더 서로에게 의지하게 됐다. 평상시 그 어느 아빠와 아들보다 우리들은 서로를 사랑했다. 아침이면 아빠는 내 곁에 앉아 내가 깰 때까지 기다렸다. 미친 듯이 밤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싶어했고 너무나도 부드럽게 나를 잠자리에서 일으켜줬다. 내가 조금만 병이 좋아지면 아빠가 얼마나 미소를 지었는지, 내가 아프기라고 하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어찌나 흐느꼈는지.”
--- pp 79
“불쌍한 우리 아빠의 뼈가 박물관 2층 유리상자 속에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울음이 나와. 모든 사람들이 아빠를 구경할 수 있잖아. 내가 가난한 에스키모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나는 우리 아빠를 아빠가 원했던 방식대로 무덤에 묻을 수 없는 거지?”
--- pp 155
그 사람들은 문명인들이에요. 훔치고, 살인하고 고문하고 기도하며 ‘과학’을 논하는. 가난한 우리 에스키모들은 우리가 사용하다가 피어리가 가져간 운석이 별에서 떨어진 것을 모르고 있어요. 하지만 에스키모들은 압니다. 배고픈 사람은 배를 채워줘야 하고 추운 사람은 따뜻하게 해줘야 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은 돌봐줘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에스키모들은 실제로 그렇게 행동합니다.
만일 에스키모들이 그런 일들을 잊어버리고 문명화되어 친절함 대신 과학을 택한다면 슬프지 않겠어요?
왜 나는 거기에서나 여기에서나 실험 대상이지요? 위대한 백인 피어리가 자연을 침범해 실패를 저지르고선 저를 고향에서 1만 마일 떨어진 곳에서 어리고 힘없는 고아로 만들어 버린 이래, 왜 나는 고통을 받고 살아야 하죠?
■ 이 책의 원서
Give Me My Father's Body: The Life of Minik, the New York Eskimo| by Kenn Harper, Kevin Spacey | Washington Square Press
■ 기타
한 위대한 이야기의 끝을 접하면 침묵의 순간이 찾아온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에 조명이 켜질 때, 혹은 이처럼 훌륭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당신은 그저 충격 속에 멍하니 앉아 있게 된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리곤 심장이 요동치면서 당신 머릿속에는 백만 가지 하고 싶은 말들이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끝내고 싶다.
- 케빈 스페이시(영화배우) 추천의 글 중에서
지루할 정도로 느릿느릿 전개되는 미닉의 일생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격정과 슬픔과 분노로 나를 몰아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장을 열었을 때, 문장과 문장 사이에 예견된 급작스런 종언에 나는 울었다.
저자 켄 하퍼는 그린랜드의 아득한 설원에서 우연하게 엿들은 미닉 이야기를 완벽하게 재구성했다. 명색이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나로서, 저자의 징그럽도록 치밀한 취재력에 그저 놀랄 뿐이다. 그 어떤 관형어나 부사어도 없이, 사실의 나열만으로도 100년 전 어린 소년이 겪었던 공포와 좌절, 분노와 슬픔, 인류사적인 공분과 제국주의시대 미국 지식인들의 후안무치한 부도덕성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자, 이 책을 읽어보시라. 그리고 슬픈 미닉의 무덤가에 마음 속으로나마 한 송이 꽃을.
- 역자의 글 중에서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과정
1977년 켄 하퍼, 그린란드 카나크에서 미닉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음.
1977~85년 미닉 이야기의 답을 찾아 저자가 덴마크 코펜하겐의 왕립도서관,
미국 워싱턴의 국립기록보존소, 미국자연사박물관과 뉴욕역사학회,
뉴욕공립도서관과 탐험가클럽,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철학협회 도서관,
뉴욕 주의 시골마을 코블스킬과 로이어스빌,
북부 뉴햄프셔의 피츠버그를 돌아다님.
1986년 초판 자비 출판.
1990년 미국 박물관들은 원주민 집단이 반환을 요구하면 유골을 반환해야 한다는 미국 원주민 분묘 및 매장보호법 통과.
그러나 키수크와 다른 북극 에스키모들은 이 법으로 보호를 받지 못함.
1992년 토론토의 글로브&메일지의 미로 세르네티크 기자와 워싱턴포스트지의 윌리엄 클레이본 기자의 저자 인터뷰.
이후 에스키모들의 적절한 장례를 치르라는 요구가 빗발침.
1992년 미국자연사박물관 키수크 및 에스키모 유골 반환 결정.
1993년 에스키모 네 명의 유해가 북부 그린란드의 툴레 기지로 운반.
에스키모 유해, 카나크의 묘지에 묻힘.
1997년 에스키모들이 뉴욕으로 향한 지 100년 만에 이들을 기리는 명판이 묘지 위에 세워짐.
2000년 뉴욕판 출간.
해외서평
미닉의 긴 방황에 대한 하퍼의 최신작은 정직하고 간결하며 사실들이 스스로를 증명하게 만들고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힘을 창조하도록 한다.
- 뉴스데이
이 책의 출간은 자연사박물관을 포함한 미국의 많은 박물관들로 하여금 과학자들이 가져간 유골과 유해의 반환을 요구하는 원주민들의 분노를 느끼게 하였다. 수백 개의 원주민 유골들이 많은 박물관의 먼지 낀 지하창고에 있거나 진열장에 라벨이 붙여진 채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 보스톤 블로브
지난 몇 세기 동안 지구상의 권력이 정돈되면서 백인들은 다른 인종들을 냉정하게 짓밟을 기회들을 가져왔다. 이런 일들에 대해 쓴다는 것은 모험이 될 수 있다. 너무 한쪽 방향으로만 쓰다보면 백인들을 혹독하게 비난하고 희생자들을 낭만적으로만 묘사했다는 비판이 일어나고 또 다른 방향으로 쓰다보면 부정을 찬양한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에서 켄 하퍼는 자진해서 그 줄타기를 한다. 에스키모의 친척이자 오랫동안 북극에서 거주해온 그는 매우 슬프고 분노를 일으키는 미닉 월래스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 대부분 시간 동안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슬픔과 분노를 스스로 조절하게 한다.
- 뉴욕 타임스
이 강렬한 책은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미국에서 성장한 에스키모 고아, 미닉의 짧고 슬픈 일생을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다. 두 문화의 틈새에 끼여버린 소년에 대한 비극적인 이야기일 뿐 아니라 경쟁적으로 북극탐험에 나섰던 당시 지식인 사회의 오만방자함에 대한 폭로이기도 하다.
- 라이브러리 저널
30년 넘도록 북극 지역에 살며 에스키모 언어에 능통한 저자 하퍼는 직설적이고도 연민 어린 문체로 미닉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과학의 오만방자함을 이야기하며 독자의 등골을 싸늘하게 만든다. 또 철저하게 착취당했지만 매력적이고 지적인 인간이요, 곤궁하고 문화적으로 이중적인 인격의 소유자, 때로는 복수심에 불타는 한 인간의 초상을 그려냈다. 영영 잊혀지지 않을 책이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 현시점에서의 과학과 문명
19세기 유럽은 문명을 내세우면서 남의 땅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즉, 유럽은 문명 세계이므로 야만과 무지의 땅인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의 비서구 지역을 유럽이 점령하는 것은 일종의 구원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제국주의에 완벽한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유전자를 조작하는 다양한 기술이 탄생하고 그것이 급속도로 연구자들 사이에 넓게 퍼져 나가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문제는 과학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이다. 인간의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과학은 너무 무섭게 발전해왔다. 따라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인간복제가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지금, 도덕과 윤리의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하다.
그렇다면 과학은 유익한 것인가? 문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과학과 문명의 진보는 모두 정당한 것인가? 과학은 추구되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은 소란스러운 뉴욕의 모습과 초보 수준이었던 인류학, 그리고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과학의 거만함과 문명의 몰이해로 빚어진 한 에스키모 소년의 비극적 삶을 보여주면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주고 있다.
과학의 거만함과 무자비성 폭로
자신을 '과학적인 인간'이라고 말하며 '북극을 탐사하는 것은 과학을 위한 탐색'이라고 말한 로버트 피어리. 북극탐험에서 돌아올 때마다 '과학적 표본'을 가져왔던 피어리를 따라온 에스키모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과학을 위해' 뉴욕으로 왔다. 미국자연사박물관의 인류학자였던 프란츠 보아스는 북극으로 떠나는 로버트 피어리에게 에스키모 한 명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인류학 학문 초기였던 그때, 학자들은 두개골을 연구하고 싶어했고 실제로 많은 두개골을 연구 목적으로 보존했다. 그들은 피어리가 에스키모를 데려온다면 에스키모는 살아 있는 인종표본으로 아주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키수크를 시작으로 눅타크, 아탕아나, 아비아크가 차례로 죽자, 그들의 유골은 박물관의 석학들에게 넘겨졌다. 그리고 에스키모들의 유골은 박물관 2층에 차례로 전시되었다. 과학의 이름으로 행해진 무자비한 실험, 에스키모인들은 실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기적인 서구 문명 비판
에스키모들이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몰려들던 시기였다. 그 당시 신문에는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의 비전이 반영되어 있었고, 기사들은 대부분 온건하지만 인종차별주의적이었다.
어떤 기사는 제목이 <어린 야민인 길들이기>였는데, 신문은 미닉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음울한 극지대 서식지?를 떠나왔으니 얼마나 운이 좋은 소년이며, 미국에서 성장할 기회를 얻었으니 얼마나 행운아인가를 강조했다. 어떤 기사는 미닉이 ?인생의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미국의 가정으로 왔다?고 하며, 미닉은 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모든 이민자들처럼, 사람들은 미닉이 ?문명의 배려와 안락함?을 즐길 수 있는 기회에 대해 감사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말대로 미닉은 운이 좋은 소년이며, 문명의 혜택을 받은 행복한 소년이었을까.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의 야욕과 북극 논쟁에 관한 진실 폭로
1909년 미국 해군 장교인 로버트 피어리는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한다. 동상으로 발가락 일곱 개를 자르고서도 '인간은 어떠한 고통에도 익숙해질 수 있다'고 말한 그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위대한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과연 그는 탐험정신으로 충만한 탐험가였을까. 아니면 북극점 정복이라는 목적을 앞세워 돈벌이를 한 장사꾼이었을까. 그는 에스키모 여섯 명을 데리고 와 전시하고 관람객들로부터 입장료를 챙겼다. 그뿐만 아니라 운석을 비롯한 모피, 해마, 일각고래 등을 팔아넘겨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에스키모인들의 무덤을 파내 그들의 유골을 미국으로 가져와 박물관에 팔아넘기기도 한 그는 과연 위대한 영웅이자 탐험가라고만 말할 수 있는가.
거의 20년 동안 에스키모인들과 함께 생활했으면서도 그는 에스키모어를 할 줄 몰랐다. 또한 에스키모인들과 그를 '피어리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일꾼들에 대해 '하등 인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찌됐건 그들은 백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그들에게 의지했으면서도,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북극점을 정복할 수 없었음에도 피어리는 이 세상에 에스키모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들은 상업적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에스키모인들은 단지 '극지 과업수행에 효과적인 도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기의 마지막에 '그들의 도움으로 북극을 정복하고 말 것'이라고 적었다. 에스키모인들은 피어리를 '협박과 강제, 그리고 권위의 힘으로 자신의 목표를 성취한 사람' 혹은 '괴롭힘 대왕'이라고 말한다. 몇몇 에스키모인들은 그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피어리가 자신들을 죽일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미닉을 비롯한 다섯 명의 에스키모인들을 데려와 전시하고 그들이 죽어갈 때도, 혹은 그후에도 그는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북극 논쟁이 시작된 것은 1909년 피어리가 국기를 지구의 정상에 꽂은 직후, 미국인 의사 프레데릭 쿡이 피어리가 도달하기 전인 1908년 4월 21일에 자신이 먼저 북극점을 정복했다고 주장하면서부터였다. 두 주장은 모두 1909년 9월, 불과 며칠 사이에 세상에 공표되었다. 몇 달 동안 신문지상에서 논쟁이 벌어졌고, 이후 이를 소재로 한 책들도 많이 나왔다.
프레데릭 쿡은 항해기록을 제시하지 못했고, 그의 주장들은 대부분 신빙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북극점은 피어리가 정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피어리가 북위 88도보다 북쪽으로 가긴 했지만, 북극점에 닿았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사실상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 만약 당신 아버지 유해가 박물관에 전시돼있다면
만약 당신의 아버지 유해가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살이 발린 채로, 뼈와 뼈를 마디마디 잇댄 해골 모형인 채로,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면 이 책은 미국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아버지의 유골을 땅에 묻게 해달라고 애원했던 한 북극 에스키모 소년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미닉 월래스. 이 사건의 주요 가해자는 유명한 북극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와 미국자연사박물관의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다.
미닉과 그의 아버지 키수크 등 그린란드의 에스키모 6명은 탐험가 피어리의 손에 이끌려 낯선 땅 미국 뉴욕으로 온다. 낯선 환경 속에서 이들 6명 가운데 미닉의 아버지를 포함해 4명이 풍토병으로 죽었다. 백인들은 미닉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묻어주었으나 이는 가짜 장례식이었다. 미국의 학자들은 아버지 키수크의 오장육부를 해부한 뒤 ‘키수크의 대뇌’ 따위의 꼬리표를 붙여 미국자연사박물관에 전시했다. 책을 읽노라면 어느덧 분노와 슬픔이 가슴을 저며온다.
--- 한겨레신문 책과사람 02/08/17 허미경 기자
미국문명에 맞서 싸운 북극소년
"Give me my father`s body."
한 에스키모 소년이 있었다. 백인들에 의해 북극을 떠나 뉴욕에서 이 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미닉이라는 이름의 이 소년은 미국의 문명인들 을 향해 "우리아빠를 돌려주세요"라고 외쳤다.
사연은 이렇다. 1909년 미국의 해군 장교인 로버트 피어리가 인류 최 초로 북극점에 도달한 이후 인간들은 극지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극지방에 사는 사람들인 에스키모에 대한 호기심도 높 아졌다. 피어리는 인류학자들의 호기심어린 요청에 따라 몇명의 에스 키모들을 뉴욕으로 데리고 왔다. 이들 중에는 에스키모 소년 미닉의 아버지 키수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뉴욕에 온 에스키모들은 미국인들 의 구경거리로 슬픈 하루하루를 보내다 병에 걸려 차례차례 죽어갔다. 미국 당국자들은 에스키모가 죽자 가족들을 속이고 유골을 빼돌려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한다. 에스키모들의 유골이 원숭이나 공룡 처럼 유리관안에 전시됐던 것이다. 과학의 이름으로 행해진 인종폭력 이었다.
이 사실을 안 소년 미닉은 아빠의 유골을 돌려받기위해 싸운다. 1907 년 소년의 소식이 신문에 소개되면서 이 사건은 미국전체를 떠들썩하 게 만든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에스키모 유골을 전시하는 것이 합법 적이라고 주장하며 돌려주지 않았다. 결국 소년은 28살의 젊은 나이 로 죽을때까지 아빠의 유골을 찾지 못했다.
소년의 아빠가 땅속에 편안하게 눕는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1993년 한많은 에스키모 키수크의 유골은 미군수송기에 실려 고향인 그린란 드로 옮겨졌다. 1897년 그들이 약탈자 피어리에 이끌려 미국땅을 밟 은지 96년만의 일이었다.
에스키모 저술가인 캔 하퍼가 쓴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청어 람미디어 펴냄)은 소년 미닉의 삶을 통해 탐험가 피어리를 비롯한 당 시 미국인들의 양면성을 파헤친 책이다.
피어리는 자신의 북극점 정 복을 사심없이 도와준 순수한 에스키모들을 철저하게 이용했고 능욕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피어리 같은 생각을 가진 백인들이 있을 지 모를 일이다.
--- 매일경제 02/08/17 허연 기자
"박물관 유골이 아버지라니…"
책 표지의 절반쯤을 차지하는 천진한 에스키모 소년의 커다란 흑백 사진, '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오(Give my father's body)'라는 원제목은 신간의 대강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다. 눈과 얼음의 고향 북극을 떠나와 사고무친의 땅 '아메리카'에서 아버지의 시신마저 잃어버린 에스키모 소년의 절규, 그리고 그의 비극적인 생애. 자칫 신파적일 수 있는 주제를 붙든 신간이 만만치 않은 흡인력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실화이기 때문. 1891년 그린랜드 북서해안에서 태어나 1918년 미국 북동부 피츠버그의 벌목장에서 스물 여덟 해의 짧은 생을 마감한 에스키모 미닉 월래스가 주인공이다.
미닉 당대에서 1백년이 지난 오늘도 내전, 테러, 홍수.기근 등 자연 재해로 세계 곳곳에서 수천 수만명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에스키모 몇명의 불우한 일생쯤이야 너무 작은 얘기 아닐까? 혹 미국 땅에서 한명의 목숨은 아프리카나 아시아 저개발국 주민 1천명쯤의 목숨에 값한다는 다분히 오만한 속내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단 캐나다 출신의 저자가 백인 아내와 이혼한 후 재혼한 에스키모 아내와 30년 가까이 살며 꾸준히 에스키모의 권리 확대에 관심을 가져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삐딱한 혐의의 상당 부분을 접게 된다. 에스키모 사회에 내재화된 시각에서 비롯된 외침이나 주장은 정당하다.
무엇보다 극적인 것은 여덟살에 아버지를 잃은 주인공 미닉이 열일곱살이 되던 1907년, 죽은 아버지와 맞닥뜨리게 된 장소가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이라는 점이다. 무덤에 묻힌 줄로만 알고 있던 아버지 키수크는 유골이 짜맞춰져 박물관에 버젓이 전시되고 있는 소장 품목이었고, 미닉은 우연히 그 앞을 지나치다가 유골의 주인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더 기막힌 사실은 인류학 연구를 위해 전세계 소수 인종들의 유골을 수집했던 박물관측이 키수크의 사망 당시 유골을 가로채기 위해 가짜 장례식을 치르면서까지 코흘리개 미닉을 따돌렸다는 점이다. 부자(父子)의 충격적인 사연이 언론을 통해 알려져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미닉은 유해 반환을 박물관에 요구하지만 되돌아온 대답은 '적법한 절차를 밟았다'는 강변뿐이었다.
일곱살에 아버지를 포함해 다섯명의 에스키모와 함께 미국 땅을 밟아 성장과정에서 에스키모 고유언어인 이눅티투트어마저 까맣게 잊어버린 미닉은 원시의 북극이나 네온사인 휘황한 뉴욕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뿌리 잃은 존재였다. 상처와 배신감에 양아버지(윌리엄 월래스) 품을 떠나 무작정 가출하기도 하고, 결국 고향 그린랜드로 돌아가지만 다시 미국행을 택하는 유전(流轉)을 거듭한다.
눈보라 속에서 바닷곰.해마 등을 사냥하는 삶을 살았어야 했을 미닉 부자가 미국 땅에 실려오게 된 것은 영토 확장을 염두에 둔 신생국 미국의 욕심에서 비롯됐다. 과정에서 해마.일각고래.여우 등 북극 동물들은 씨가 마르고 에스키모들은 비스킷 서너통에 목숨을 담보로 한 모험에 동원되는 착취를 당한다. 미닉 부자를 포함한 여섯명의 에스키모는 인류학 연구의 '견본'으로 미국 땅에 끌려온 케이스다.
북극 수탈 역사의 장본인은 뜻밖에도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한 불굴의 탐험가로 알려진 영웅 로버트 피어리다. 공명심과 금전적 이득을 위해 북극의 자원과 에스키모 유골 등을 박물관.지인들에 공급했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에스키모들의 비운에 공감한다면 그들을 부르는 명칭을 이눅티투트어로 '사람'을 뜻하는 '이누이트'로 바꾸면 어떨까. '에스키모'는 '생고기를 먹는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뜻이기 때문이다.
--- 중앙일보 행복한책읽기 02/08/17 신준봉 기자
한 에스키모 삶과 ‘美의 오만’
“우리 아빠의 유해를 돌려주세요”
책을 펼치자 표지에 실린 에스키모 소년의 사진이 시선을 잡는다. 두꺼운 모피를 걸친 채 털모자에 가려 얼굴만 빼꼼하게 내밀고 있는 모습. 그의 시선에는 야릇한 애수가 담겨 있다.
그가 딛고 있는 땅은 미국 뉴욕. 슬픈 눈의 소년은 어떤 연유로 고향 그린란드를 떠나 엉뚱한 곳에 ‘분재(盆栽)’됐을까. 단서는 역사상 위대한 북극탐험가 로버트 피어리와 후세의 과학연구에 관심을 가진 한 미국 지식인의 의도에서 발견된다.
첫번째 위선. 우리에게 사상 처음 북극을 밟은 위인으로 알려진 탐험가 피어리는 타 인종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1896년 8월 북극탐험을 마치고 뉴욕으로 귀국한 그는 6점의 ‘과학 표본’을 운반해왔다. 이번엔 ‘물건’이 달랐다. 과거 수집했던 인골이 견본품이었다면 이번엔 뜨거운 피가 혈관을 흐르는 살아있는 표본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사박물관의 프란츠 보아스는 피어리에게 ‘연구용’ 에스키모인을 한 명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피어리의 유혹은 달콤했다. “어마어마한 집과 기차, 불빛이 있는 곳에 함께 가자”는 그의 꼬임에 넘어간 길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 됐다.
미국에 도착한 에스키모 6명은 애당초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도착 즉시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지하실에 수감됐다. 아빠와 함께 온 6세 남짓한 미닉의 인생유전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두번째 위선. 석달이 채 되지 않아 에스키모들은 전원 병원에 입원한다. 뉴욕의 대기중을 돌아다니던 각종 병원균에 그들은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되면서 미닉의 아버지 키수크를 비롯, 4명이 죽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미닉이 보는 가운데 박물관 정원에서 거행됐다. 그러나 이는 소년의 눈을 속이기 위한 위장된 장례였다. ‘표본’에게 인간의 장례가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버지의 유골은 인류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 자연사박물관으로 운반됐다.
그럭저럭 뉴욕 생활에 적응해가던 미닉의 삶은 그나마 돌봐주던 양아버지의 가계가 파산하면서 다시 한번 꼬였다. 박물관장도, 피어리도 이들을 외면했다. 영문을 모르고 낯선 환경에 던져진 미닉의 삶은 눈물로 채워졌다. ‘슬픔도 분노가 된다’는 명제는 미닉에게도 적용됐다. 가짜 장례식과 아빠 유골의 행방을 알게 된 미닉은 펜을 들었다.
에스키모들이 미국에 도착한 지 10년이 된 1907년 1월 월드지에 박물관에 전시된 아빠의 유골을 돌려달라는 미닉의 기사가 게재됐다. 사람들은 새삼 미닉에게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박물관측은 유골을 돌려주지 않았다.
미국의 이중성에 환멸을 느낀 그는 그리운 고향, 그린란드로 돌아간다. 까마득하게 잊은 모국어와 사냥기술을 익혀나갔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이미 ‘문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였다.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불빛이 그리워진 미닉은 뉴욕으로 돌아온다. 1918년 10월30일 피츠버그의 벌목촌에서 막노동을 하던 미닉은 폐렴에 걸려 외로운 삶을 마쳤다. 그의 나이 28세.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버지와 달리 조그만 무덤에 안장될 수 있었다는 것.
“아빠의 유골을 돌려달라”는 미닉의 외침은 뒤늦게 캐나다인 캔 하퍼의 심장을 울렸다. 이누이트어에 익숙했던 그는 오랜 취재와 자료조사 끝에 지난 86년 바로 이 책을 출판했다.
20세기 초 몇몇 미국의 지극히 정상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자행된 에스키모 유골의 박물관 전시는 이때서야 비로소 야만적 행위로 조명을 받았다. 비난이 쏟아지자 자연사박물관은 결국 93년 에스키모 4명의 유해를 그린란드로 옮겼다. 숱한 관람객들의 구경거리로 능멸당한 지 100년이 다 되어서야 이뤄진 귀향이었다.박종인 옮김.
--- 경향신문 책마을 02/08/17 김진호 기자
"문명과의 만남, 그들에겐 죽음이었다"
다큐멘터리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은 북극의 탐험가로 오늘날까지 명성이 높은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에 도착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첫장면은 에스키모 미닉의 운명과 맞닿아 있다. 로버트 피어리는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보조큐레이터 프란츠 보아스의 인종 표본 연구 요청에 따라 에스키모 여섯 명을 1896년 뉴욕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모든 비극은 이 행위로 인해 완성되었다.
엄숙하고 강인하면서 또 잔인성에 있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복합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피어리는 말 그대로의 ‘백지 상태’인 에스키모들을 “햇살이 비치는 땅에 있는 따뜻하고 멋진 집과 총과 칼,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을 약속했”던 것이다.
이 여섯 명 에스키모 가운데 미닉과 그의 아버지 키수크도 속해 있었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이 별천지에서 인기있는 놀이갯감이 되었다. 그들은 자연사박물관의 지하실에 수용되었다. 이들 에스키모 앞에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들이 뉴욕에 도착한 것이 1896년 8월 26일이었는데, 불과 2년도 안되는 1898년 2월 키수크를 시작으로 네 명이 차례로 죽어갔다.
극지방에서 누대에 걸쳐 살아온 이들이 전혀 다른 풍토에서 적응한다는 것은 사실상,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이다.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의 4장에 나오는 어린 미닉과 키수크의 사별 장면은 전편을 통해 가장 강한 인상과 애절함을 남긴다. 근래 이처럼 슬픈 이야기를 나는 본 적이 없었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동안 피어리는 단 한 번도 이들을 찾지 않았다. 그 사이 그는 북극점 탐험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 켄 하퍼는 이런 사실들을 적시하며, 한 인간이 지닌 탐욕이 또 다른 인간에게 얼마나 가공할 만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가할 수 있는지를 폭로하고 있다.
살아남은 두 에스키모 가운데 한 명은 운좋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미닉뿐. 그는 자연사박물관의 건물관리인인 월리엄 월래스에게 입양되었다.
그러나 미닉의 슬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닉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른 아버지 키수크의 장례식은 가짜였다. 키수크의 유해는 자연사박물관에 운반되어 전시되었던 것이다. 후에 진실을 알게 된 미닉은 큰 충격에 휩싸이고 “아빠를 돌려달라”는 탄원을 하지만 거부당했다.
28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미닉은 그린란드와 뉴욕을 오가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해야 했으며 끝내 아버지의 유골을 찾지 못했다. 미닉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유골은 그가 죽고 난 뒤 80여년이 지나서야 자연사박물관을 떠나 그린란드에 안착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미닉의 짧은 인생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불필요하게 수식을 하지 않는 그의 글은 읽는 사람의 감정선을 집요하게 건드린다.
책을 읽고 난 뒤 소년 미닉의 분노와 슬픔을 공감하면서도 또한 ‘피어리’적인 세속적인 욕망에도 노출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당혹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미닉을 몰랐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에 몸이 떨려왔다. 이런 이기적인 생각이 들 만큼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은 인간이 가진 욕망의 추악함과 문명사회의 오만방자함을 강한 햇빛 아래 널어놓고 있다.
--- 동아일보 책의향기 02/08/17 정은숙 (시인)
"박물관에 진열된 아버지를 돌려달라"
1897년 9월의 마지막 날, 탐험선 호프(Hope) 호가 뉴욕 항에 도착했다. 북극점을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로버트 피어리는 두 가지의 선물을 가져왔다. 하나는 그린란드에 떨어져 있던 운석이었고, 다른 하나는 6명의 살아있는 에스키모들이었다. 이틀 동안 3만 명의 미국인들이 입장권을 손에 쥐고 에스키모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피어리는 과학적인 연구를 위해 에스키모들을 데리고 왔다고 밝혔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실패한 탐험에 대한 여론을 잠재우고 후속 탐험을 위한 기부금을 모집하기 위해서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깜짝 이벤트가 절실했던 것이다. 뉴욕에 도착한 이후로 피어리는 단 한번도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에스키모는 북극점 정복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채워줄 효과적인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피어리를 포함한 다수의 백인들에게 에스키모는 인간이 아니거나 하등 인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6 명의 에스키모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자연사 박물관에서 살아있는 인종 표본으로 전시되었다가, 백인 풍토병인 감기에 집단적으로 감염되고 만다. 몇 달이 되지 않아서 4 명의 에스키모들이 죽었고, 한 명은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폐렴으로 아버지를 잃은 7살의 에스키모 소년 미닉(Minik)만이 황량한 대도시에 고아로 남게 된다.
그후 미닉은 미국 가정에 입양되어 양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새로운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해 나간다. 하지만 1907년에 청년 미닉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자연사 박물관 측이 치러준 아버지의 장례식은 가짜였으며, 시신은 해부되어 유골이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닉은 유골의 반환을 요청하지만 박물관의 관료주의적인 무관심과 교묘한 언론 플레이에 막혀 번번이 좌절된다. 백인사회에 대한 환멸 때문에 괴로워하던 미닉은 1909년 고향인 그린란드로 돌아간다.
고향에 돌아간 미닉은 행복했을까. 12년 동안의 미국 생활로 그는 이미 모국어 이눅티투트를 잊은 지 오래였다. 에스키모의 생활방식들을 열정적으로 배워나갔지만, 그는 이미 브로드웨이의 밝은 빛을 보았던 터였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는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결국 7년 만에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던 미국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미국에서 북극은 철지난 유행에 지나지 않았다. 벌목장 노동자로 살아가던 미닉은 1918년 가을 스페인형 유행성 감기에 걸려 2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인디언들의 땅이었던 뉴햄프셔에 묻혔다.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을 읽는 동안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미닉의 짧고 비극적인 삶에 대해서는 연민을 감출 수 없었고, 에스키모인들의 시체를 빼돌려 인종 표본으로 만든 과학의 오만함에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동시에 과학적(이라는 딱지가 붙은) 지식과 함께 이미 내 속에 들어와 있는 인종주의적 편견에 대해서도 슬픈 분노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위인전집에서 피어리를 읽었던 유소년기 이래로 북극점 하면 일종의 조건반사처럼 피어리를 떠올렸다. 반면에 북극지방의 진정한 주인인 에스키모인들의 존재는 형체 없는 유령처럼 흐릿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백인의 마음을 가진 채로 누런 가면을 쓰고 살아왔는 지도 모르겠다.
일반화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있지만, 서구적 기원을 가진 과학(학문)적 지식 속에서 인종주의적·제국주의적인 편견이 작동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인종 전시는 제국주의의 문화적 축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식민지관(館)을 설치하고 아프리카 원주민과 그들의 마을을 통째로 옮겨놓았다. 1903년에 일본에서 개최된 내국권업박람회의 인류관(人類館)에는 아이누, 숙번, 말레이, 자바, 마두라스 등의 인종이 낯설고 흥미로운 구경거리로 ‘진열’되기도 했다. 객관성의 신화(과학)로 교묘하게 포장된 인종주의적 오만은 문명 속의 야만과 결코 다르지 않다.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은 과학의 오만과 인종 차별이라는 무척이나 민감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서구의 죄악을 고발한다는 선정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다. 작가 켄 하퍼는 백인 중심의 문명사회에 대한 증오의 표현이 또다른 인종주의적인 편견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8년 동안 수집한 자료를 통해서, 놀랍게도 미닉이 한 사람의 ‘이누이트’(인간)이라는 사실을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오래도록 잊지 못할 책이 될 것 같다.
--- 조선일보 책마을 02/08/17 김동식 (문학평론가)
그들에게 우리는 전시품이었다
19세기 후반 막 태동하고 있던 근대 인류학은 제국주의의 이론적 배경으로 작용하는 과오를 범한다. 당시의 서구 인류학은 인종주의의 편견에 사로잡혀 비서구를 야만으로 몰아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제국주의에 도덕성과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서구에서 ‘과학의 이름으로’ 이뤄진 이 같은 행위들은 비서구 세계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모욕을 안겨주기도 했다. 심지어 살아있는 에스키모들이 인종표본처럼 다뤄지고 나중에는 이들의 시신이 실험실의 동물처럼 해부되어 꼬리표가 붙은 채 박물관에 보관되는 엽기적인 일도 벌어졌다.
켄 하퍼의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은 19세기 후반 뉴욕에 있는 미국 자연사박물관을 배경으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서구 과학의 거만함과 문명의 몰이해로 빚어진 에스키모 소년 미닉의 비극적 삶을 추적한다.
100여년 전 그린란드에 살고 있던 미닉과 그의 아버지 키수크 등 에스키모 6명은 1896년 8월 북극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의 손에 이끌려 뉴욕에 도착한다. 햇살이 비치는 땅, 따뜻하고 멋진 집, 총과 칼, 풍부한 양식 등 피어리가 약속했던 뉴욕에서의 삶은 꿈에 불과했다.
애초 약속과 달리 피어리는 에스키모를 연구하고 싶어했던 미국자연사박물관 연구원의 부탁으로 미닉 일행을 낯선 뉴욕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뉴욕에 도착한 뒤 수많은 군중들에 휩싸여 ‘동물’ 취급을 당하다 자연사박물관의 지하실에 수용된 에스키모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2년여만에 차례로 죽음을 맞는다. 그 사이 에스키모 한 명이 그린란드로 돌아갔고, 고아가 된 미닉만이 뉴욕에 남게 된다.
서구 과학자의 오만함과 무자비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미닉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 키수크의 가짜 장례식을 치르고 시신은 빼돌려 살과 뼈를 발라낸 채 박물관에 전시한다. 그들에게 에스키모들은 인류학적이고 민족학적인 연구의 흥미로운 대상일 뿐이었다.
박물관 관리인에게 입양돼 비교적 뉴욕 생활에 잘 적응하던 미닉은 뒤늦게 이런 비밀을 깨닫게 되고 뉴욕 생활과 미국의 이중성에 환멸을 느낀다.
정당한 매장을 위해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받겠다는 요구가 박물관에 의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닉은 북극으로 떠나는 귀향선을 탄다. 하지만 에스키모 말을 잊은 채 13년간 뉴욕 사람으로 지냈던 미닉은 ‘자기 세계에서 강제로 떠나고 다른 세계에서는 완전히 환영받지 못하는’슬픈 운명이었다.
두 세계의 틈새에 끼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미닉은 1918년 피츠버그의 벌목촌에서 결국 폐렴으로 죽고 만다.
캐나다 태생 백인으로 에스키모 여인과 결혼한 저자는 1975년 장모로부터 미닉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들었다. 그는 8년 동안 덴마크 왕립도서관, 미국 국립기록보존소, 자연사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관련 자료를 모아 ‘뉴욕 에스키모’사건을 완벽하게 재구성해냈다.
100년 동안 자연사박물관이 은폐해왔던 반인류적인 범죄행위를 폭로한 이 책은 1986년 출간되자마자 사회적인 공분(公憤)을 불러일으켰다.
1990년 ‘원주민 집단이 요구하면 박물관은 유골을 반환해야 한다’는 법이 의회를 통과했고 ‘뉴욕 에스키모’들의 유골이 93년 마침내 그린란드로 옮겨지게 됐다는 뒷이야기도 재미있다.
저자는 에스키모 사이에 전설로 내려오고 있던 미닉 이야기를 치밀하게 부활시켜 문명과 과학이 제국주의 아래에서 세계 각지의 토착 문화를 어떻게 파괴해 왔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가 의지와 도전의 역사로 알려져 왔던 북극 탐험사를 비판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책에는 세계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한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가 에스키모들을 뉴욕에서 전시하고 입장료를 챙기는가 하면 북극의 운석, 모피, 해마, 일각고래 등을 팔아 넘겨 이익을 남긴 부정적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또 피어리에게 살아 있는 에스키모를 박물관에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바로 미국 인류학의 창시자 프란츠 보아스였다는 사실, 피어리의 후원자로 정복지 북극에서 얻은 이익을 함께 나눈 사람이 자연사박물관의 설립자이자 YMCA의 회장이었던 모리스 제섭이었다는 사실도 폭로된다. 원제는 『Give Me My Father's Body』.
--- 한국일보 책과세상 02/08/17 김영화 기자
야만적인 문명세계 고발
1896년 북극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는 자신의 ‘식모’로 일하던 만니크의 아들 미닉을 포함해 6명의 에스키모들을 뉴욕으로 데리고 온다. 이는 뉴욕 자연사 박물관의 프란츠 보아스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에스키모인들은 도착하자마자 박물관 지하실에 수용된다.
미닉의 아버지 키수크를 포함해 4명이 폐렴에 결려 죽자 한명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미닉은 박물관 관리인에게 입양된다. 그후 미닉은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어디에도 정착을 못한채 불안한 삶을 살게 된다.
책은 문명세계의 야만과 거만함을 낱낱히 고발한다. 책은 '문명인’들이 살아있는 에스키모인들의 두개골을 탐하며 북극점의 첫 ‘정복자’가 누구냐는 논쟁을 벌이는 동안 짓밟히고 소외됐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박종인 옮김.
--- 문화일보 북리뷰 02/08/16 전영선 기자
에스키모에 비친 문명의 이중성
『뉴욕 에스키모 미닉의 일생』은 20세기초 유명한 북극탐험가 로버트 피어 리의 손을 붙잡고 뉴욕에 온 에스키모 소년 미닉에 관한 이야기이다.미닉은 낯선 사람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된 후 곧바로 미국자연사박물관 지하에 수용 된다.여기까지는 흔한 “서양문명의 ‘야만’길들이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죽은 아버지가 살이 발려진 채 인종표본으로 전시된 것을 미닉이 발 견한 순간부터 이 책은 “서양문명에 대한 ‘야만’의 투쟁기”가 된다.저자 켄 하퍼는 28년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버지 유골을 돌려받으려고 치 열하게 싸운 에스키모인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다.문체는 차라리 억눌린 분 노처럼 조용하다.
미닉이 살던 당시의 미국은 북극의 오로라와 브로드웨이의 불빛처럼 이중적 인 세계였다.한편에는 제국주의·백인중심주의와 이성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허용되는 과학맹신주의라는 ‘야만성’이 있었고,다른 한편에는 인도주의, 관용·사랑을 내세운 기독교리,자유·평등을 외치는 민주주의라는 ‘고상함 ’이 있었다.
그 모순적인 이중세계를 상징하는 인물이 피어리일 것이다.북극점에 도달하 고자 평생을 바친 구도자적인 숭고함과,에스키모인들을 박물관에 팔아넘긴 장사꾼적인 속물성은 피어리에게 공존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이중성을 이 책을 읽는 방식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 스키모 미닉의 삶은 너무도 특수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이기도 하다.북극과 브 로드웨이 사이를 떠돌면서 ‘집’이라 부를만한 장소를 찾아 헤맨 사내,이기 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절망적인 싸움을 계속하는 사내의 이야기는 평범한 우리네 이야기와 그리 다르지 않다.바로 그 특수-보편의 이중주가,자칫 딱딱 한 서양문명 비판으로 끝났을 뻔한 이 독서체험을,은밀한 공감을 통한 카타 르시스로 승화시키는 큰 힘이 된다.
--- 대한매일 02/08/16 채수범 기자
야만적 인종주의에 희생된 에스키모 소년
1893년 시카고의 세계콜럼비안엑스포에는 살아있는 전시물이 등장했다. 래브라도에서 온 에스키모인들이었다. 1896년에는 박물관 전시를 위해 갓 만든 에스키모인의 무덤이 파헤쳐졌다. 다시 1897년에는 에스키모인 6명이 미국자연사박물관의 ‘인간 실험’을 위해 뉴욕으로 수송돼왔다. 이들 중 4명은 1년도 안돼 백인 풍토병으로 세상을 떴고,시체는 피부와 살이 발린 채 전시됐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인류학은 아직 골상학에 몰두해 있었다. 두개골의 모양이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판가름한다는 발상. 바탕에는 흑인,인디언,에스키모 같은 ‘열등’ 인종의 두개골을 백인의 것과 비교,분석하면 인류의 진화 과정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는 허황한 믿음이 깔려있었다. 살아있는 에스키모인이 전시되고,이들의 시체가 실험실 동물처럼 해부돼 박물관에 보관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과학의 이름으로 횡행할 수 있었던 이유다.
켄 하퍼의 『뉴욕 에스키모,미닉의 일생』은 서구 학자들의 야만적 인종주의에 희생된 한 에스키모 소년 미닉의 이야기다. 그린란드에 살고 있는 키수크와 그의 아들 미닉,눅타크 가족 등이 뉴욕에 도착한 것은 1897년 9월. 북극 탐험을 위해 그린란드를 오가던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는 미국자연사박물관 직원의 부탁을 받고 이들을 데려왔다. 그 직원은 미국 인류학의 시조로 불리는 세계적인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였다.
‘과학의 발전을 위해’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은 시름시름 앓다 몇개월만에 차례로 목숨을 잃는다. 그 사이 한 사람은 북극으로 돌아갔고,어린 소년 미닉만 뉴욕 땅에 남겨졌다. 박물관의 관리인 윌리엄 월래스의 가정에 입양돼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던 미닉의 생활이 뒤틀린 것은 아버지 키수크의 유골이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영민하고 예민했던 10대 소년은 아버지의 오장육부가 갈가리 찢기고,뼈와 살이 분리돼 생물 표본처럼 쇼윈도우에 전시됐다는 사실에 몸서리쳤다. 어린 시절 그가 본 아버지의 장례식은 박물관 직원들이 꾸민 연극이었다.
그 즈음 설상가상으로 양아버지의 생활마저 곤궁해졌다. 한때 이들을 맞기 위해 뉴욕항에 몰려들었던 수만명의 미국 대중은 더이상 에스키모 소년을 신기해하지 않았다. ‘인간 실험’을 계획한 미국자연사박물관도 미닉의 존재를 부정했고,평판에 민감한 피어리 역시 오래 전 미닉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
뉴욕 한가운데 버려진 미닉은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서 북극에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싸움은 계속됐지만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자살까지 결심하고 캐나다로 도주한 미닉. 결국 피어리의 ‘적선’으로 미닉은 북극에 돌아가게 된다.
미닉은 고향에서 행복했을까. 결말은 불행이었다. 미닉은 북극에서도 이방인이었다. 일곱살에 북극을 떠난 미닉은 이미 영어를 그리워하는 반쪽짜리 미국인이 돼 있었다.
영화 배우 케빈 스페이시가 추천의 글에서 썼듯 “자기 세계에서 강제로 떠나고 다른 세계에서는 완전히 환영받지 못한 채 영원히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헤매도록 저주받은” 소년은 뉴욕에서 북극으로,다시 뉴욕으로 떠돌았으며 결국 1918년 피츠버그에서 기관지 폐렴으로 세상을 떴다. 저자는 미닉의 21년을 과학이란 미명 하에 자행된 실패한 인간 실험이자,문명이 가한 폭력의 기록이며,무책임과 몰인정의 결정판으로 결론내린다.
책은 도전,정복,승리 등으로 포장된 백인적 시각의 북극 탐험사에 대해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특히 세계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한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와 세계적 학자 프란츠 보아스,미국자연사박물관의 설립자 모리스 제섭 등 역사가 기억하는 영웅에 대한 추악한 뒷이야기가 충격을 던진다.
피어리는 북극의 모피와 일각고래,해마 이빨,모피 등으로 장사를 해 큰 이득을 얻었다. 에스키모인들에게 유일한 거래선이었던 피어리는 이런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귀한 북극 물자를 헐값에 사들였고 이를 미국에 들여와 몰래 판매했다. 피어리의 ‘세탁’을 도운 것이 바로 미국자연사박물관. 훗날 피어리와 경쟁 관계였던 탐험가 쿡은 “피어리와 친구들이 이런 장사를 통해 100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고 폭로했다.
미닉의 슬픈 생은 그저 끔찍한 옛날 이야기일 뿐일까. 책이 출판된 86년에도 아버지 키수크와 그의 친구들의 유골은 ‘수납번호 99/3610’이란 꼬리표가 붙은 채 미국자연사박물관의 상자 속에 들어 있었다. 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정당하게 장례를 치르겠다는 소년의 꿈은 여전히 요원했다. 키수크의 유해가 고향 땅에 묻힌 것은 이 책이 미국에 알려지고 비난 여론이 비등해진 지난 93년. 고작 10년 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도 미국자연사박물관에는 북미 원주민관과 동아시아 민속관,중앙아시아 민속관이 있다. 아직도 이들에게 백인 이외의 역사는 모두 ‘자연사’일 뿐일까. 북극 탐험이란 위대한 시대의 끝에 전개된 미닉의 슬픈 생이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아직도 유효하다. 문명과 야만은 무엇인가,그리고 과학은?
에스키모 거주 지역에서 교사로 일한 켄 하퍼는 그린란드와 뉴욕,덴마크를 오가는 9년여의 취재 끝에 지난 86년 캐나다에서 책을 처음 펴냈다.
--- 국민일보 책과길 02/08/16 이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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