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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에 미국유학 다녀오기-09] 교회에 가선 눈물에 콧물까지 쏟고, 돌아오는 외곽도로에서 길을 잃다.

by Retireconomist 2011. 1. 16.

늦잠자는 호사를 누리다.

일요일 아침을 단 한 시간이지만 호화롭게 더 자고, 7시에 기상하니 몸도 상쾌하고 즐거운 마음가짐까지 생겨났다.

일요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인터넷 접속이 수월했다. 교회를 가기 위해 미리 점찍어 두었던 '오마하 한인 장로교회(http://www.kpcomaha.org'를 다시 지도로 검색했다. 거리는 약 20km. 눈이 채 녹지 않은 길이 예상되고, 지도로 보아서는 오마하 중심지에서 남서쪽에 있는 그곳까지의 길이 쉽지 않아 보였다.

우선 구글 맵에서 가는 길을 찾아보았다. 경로는 세 가지인데, 그중에서 내가 가장 쉽게 가는 길을 선택.

2011-01-10 Road to Church
[그림 : 구글 맵에서 찾은 교회까지 가는 길. A에서 출발해서 B로 도착하는 길이다.]

이 정도야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닷지로를 따라서 닷지로 130가까지 서쪽으로 가다가 거기서 좌회전 그리고 남향 그리고 L가에서 Q로를 따라가면 얼마 가지 않아서 바로 교회가 나온다. 멋진 이동 경로가 완성되었다.

예배 시간은 오전 9시와 오전 11시인데, 숙제도 있고, 읽어야 할 자료도 있고 하니, 이른 아침 9시 예배를 보고 12시에 열리는 도서관으로 가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그리고 컴퓨터를 가져갈 수 없으니, 컴퓨터에 나타난 경로를 머릿속에 그려넣고, 수첩에는 이정표가 되는 기점을 적어놓고 외투 호주머니에 품듯이 넣고 도서관 갈 채비에, 잘 말려진 검은 색 양가죽코트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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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교회 가는 길을 수첩에 적었다. 내비게이션이 없으니 이런 보조 작업이 필요했다.]

홈스테이 부부는 일요일 아침을 정말 휴식으로 맞이하고 계신지, 모든 등불도 잠을 자고 있다. 까치발로 홈스테이를 나섰다. 아침은 길거리에서 유일하게 문을 연 커피점에서 스콘 두 개와 블랙커피 작은 것 한 개로 충분했다.

수첩에 적은 방향으로 나는 교회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다행히 일요일 아침 여덟 시. 역시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이 전혀 없는 그래서 누구라도 지나가는 사람이 보이면 영화에 나오는 좀비 족일까 두려울 정도로 적막하고 한산한 닷지로를 따라서 서쪽으로 향했다.

닷지로 132번가, N 120로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바로 그때 우측으로 '홈인스테드 시니어케어' 본사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고향을 찾은 기분이랄까? 잠시 신호대기하는 가운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내 신호는 좌회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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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홈인스테드 시니어케어 글로벌 본사 (Home Instead Senior Care Global Headquarter)]

연수 간답시고 오마하에 왔지만, 정작 홈인스테드 코리아의 임원이라는 자가 본사에 한 번도 들리지 않은 무성의 때문에 미안한 생각도 들었고, 내가 운전해서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다.

눈치 100단은 내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고 싶을 정도로 단 한 번의 망설임과 단 한 번의 실수 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심'으로 단 한 번에 교회에 도착했다.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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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오른쪽에 빨간 원 안으로 교회의 십자가가 보인다. 운전 중임에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일요일 9시 예배는 어디 곤 본 예배에 미치지 못하는 성도들로 썰렁할 것으로 예상이 되었지만, 인터넷에 나와 있는 예배시간과는 달리 교회 입구에는 11시 예배만 커다랗게 게시된 것을 보고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Omaha_08_57_79231[사진설명: 오마하한인교회의 예배안내판, 인터넷에 게시된 것과는 달리 9시 예배는 없었다.]

1층에 아주 넓은 식당이 먼저 눈에 띄었다. 본당은 2층에 있는 것 같다. 1층에 들어서자 낯선 교인이 왔음을 직감했는지 식사준비를 하던 한국인 부인께서 서둘러 나를 맞이하신다. 필시 목사 사모님이 틀림없다. "잘 오셨습니다. 예배를 보시기 전에 목사님께 인사를 먼저 드리시지요?" 하면서 나를 목양실로 인도하셨다. 이건송 목사님. 인터넷에서 알고 있었던 분. 따뜻하게 느껴지는 첫인상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시간이 바로 9시가 되어 본당에 예배를 드리러 자리를 잡았다. 교인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 10명 안쪽.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에서 오신 장신근 교수님께서 설교하시는 것으로 주보에는 적혀 있었다. 

예배 순서도 조금 달랐지만, 한글과 영어가 한꺼번에 프로젝트에 올라오고, 둥근 바닥에 뿔처럼 천장이 만들어진 독특한 본당은 '길 잃은 양'에게는 더 없는 안식처로 느껴졌다.

그런데 웬일인가? 예배가 시작되자마자 '눈물샘'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이건송 목사님의 "자,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를 기점으로 망가진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묵도로 시작한 예배는 예배의 부름, 송영, 개회 기도를 지나 경배와 찬양 순서를 지나도록 고개를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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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오마하한인장로교회의 주보. 이날은 이건송 목사님이 예배인도만 하셨고, 설교는 서울에서 오신 목사님이]

한국 나이로 오십. 죽는 것이 예정되고 태어났지만, 그때까지 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풍부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가깝게는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내 감정이 왈칵 쏟아짐을 느꼈고, 어느 날 TV가 끝나는 시간 '애국가'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밀려오는 감동으로 눈시울이 적셔오는 것을 느꼈다. 다들 나이가 들면서 이런 경험들을 한 두 번씩 한다고 한다. 영화 보면서 펑펑 운 적이 있다. 박중훈과 안성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라디오 스타'라는 제목의 영화를 혼자서 보면서 몇 년간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위로받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듯, 내가 마치 주인공이 된 듯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얼마나 후련했는지.

'죄의 고백' 순서가 되었을 때는 이미 체면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소리를 죽여서 울어야 할 정도로 소매로 닦아내도 너무 눈물을 흘려서 닦아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신앙고백'으로 이어지면서 나는 바르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전능 끅 (하사) 천지 끅 (를 만드신) 하나 끅 (님 아버지를 ) 내가 끅 (믿사오며,) 그 외 끅 (아들 우리) 주 예 끅(수 그리스도를 믿사) 오니 끅, 이 끅(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훌쩍 마리 끅(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훌쩍 빌라도 끅 (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 끅(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 사흘만에 끅 (죽은 자 가운데서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고서 산 자와 죽은 자를) 훌쩍 심판 끅(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 믿사옵나이다. 끅(아멘.)"

쉽없이 이러지는 '사도 신경' 속도를 끅과 훌쩍하면서 그저 몇 자를 따라 했을 뿐, 옆자리에 앉은 사람, 아니 앞에서 인도하는 목사님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그저 펑펑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다. 옆에 앉은 사모님께서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주신 것으로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짜면 한 바가지 쏟아내도록 적시고 말았다.

'평화의 인사'로 교인들과 인사를 나눌 때, 나는 이미 안경을 벗고 있어서 앞과 양옆과 뒷자리에 앉은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웃을 수도 알아볼 수도 없는 미안할 정도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저 사람 왜 그래?'라는 시선이 있었을지라도 전혀 의식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저 눈물이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장신근 목사 교수님의 "환대, 봉사, 축제의 공동체'라는 제목의 설교는 또다시 잦아들던 눈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설교 중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말씀에 나오는 마치 쫓겨난 소녀가 나를 예시로 말씀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서럽게 울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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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서울에서 오신 장신근 목사님이 '쫓겨난 소녀'의 예화로 '환대'해야 함을 설교하셨다.]

지금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무엇이 나를 여기에 오도록 이끌었는가? 태어날 때 이미 죽는 것이 예정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누구인가? 세속적인 목적과 목표만이 유일하게 나를 조종해왔던 그 사실을 다시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싼 돈을 들이면서 귀한 공부를 할 준비가 되었는지? 가족들에게 얼마나 따뜻하게 대하고 있었는지? 무엇을 위해 내가 이렇듯 아침 밤으로 달리고 있는지? 내가 과연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향하고 있었는지... 

예배가 끝나고 이미 퉁퉁 부은 토끼 눈의 오마하의 교회를 찾은 키 작은 한국인 성도를 이건송 목사님과 장신근 목사 교수님은 따뜻한 차와 함께 담소로 위로해주셨지만, 잠시 뒤 식사를 하고 가라는 목사 사모님의 권유도 뿌리치고 교회를 나섰다. 사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11시 예배를 위해 성도들이 교회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남에게 내가 울었다는 것이 펑펑 울었다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일까.



 나는 교회를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옆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 달리다 보니, 정작 내가 가는 곳이 어딘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찌뿌드드하게 흐린 날씨는 아침부터 내내 화난 것처럼 눈가루를 뿌렸다 말았다 하듯이 개일 줄 몰랐고, 흐린 날씨 때문에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길가에 있는 이정표들은 모두다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길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헤리슨가 (Harrison Street)가 나와서 급히 차를 우회전해서 다른 길로 들어서니 콘허스커스가 (Cornhuskers Street)가 나타났다. 콘허스커스(Corn Huskers)는 네브래스카 운동경기의 대표적인 마스코트로 '수수를 수확하는 농부'를 상징하는데, 아무튼 지도에서 본 적이 없던 곳이다. 그야말로 벌판에 길만 덩그러니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차를 처음 인도받던 날, 좌회전을 찾지 못해 헤매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 배낭과 차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도는 나오지 않았다. 책상 어디엔가는 지도가 있었는데......

갑자기 두려워졌다. '오던 길로 다시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 차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쏜살같이 나오면서 어디론가 생각 없이 앞으로만 달렸기 때문에 내가 왔던 길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외곽도로의 어디라고 생각이 되는 것은 주변에 인가도 상가도 아무런 보행자도 없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그 흔한 택시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수단이 있다면 쫓아가서 물어보기라도 하련만 눈씻고 봐도 하나 없고, 어찌나 제 갈 길들이 바쁜지 쌩쌩 서둘러 사라지는 것이다.

동서남북을 모르지만 아직은 밤도 아니고, 이쪽으로 5분 정도 달리다가 아닌가 싶으면 좌회전 5분 정도 달려보고 또 아니면 그 길에서 우회전으로 달려보고 사람이나 상가가 나타나면 '육혈포 강도'에게라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즈음해서 길가에 달랑 한 건물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호텔이었다. '이곳에서 길을 물어보아야겠다.' 이미 심신이 많이 지쳐 있을 즈음이었지만 다시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텔이 들어서자 프런트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었다. 데스크 위에 놓인 '작은 종'을 울렸다. 한 번, 두 번. 인기척이 없었다.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막 되돌아 나서려는데 키 2m 정도의 키에 몸무게 150kg 정도의 머리를 빡빡 깎은 어마어마한 몸집의 흑인 청년이 어기적거리며 다가왔다. 멀리서 다가오는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숨이 '컥' 막혀왔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한 마디 구조요청을 했다. "길을 잃어버렸습니다."라는 내 말이 나오자마자, 거구의 흑인 청년을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걱정하지 마요. 오마하에서는 길을 잃는 경우가 절대로 없습니다. 내가 잘 알려줄게요."하면서 의외의 친절한 안내를 해주는 것이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잃었던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많이 본 듯한 지도 한 장을 꺼내놓고는 어디로 갈 예정인지를 물었다. 지도를 보는 순간 닷지로(Dodge Street)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네브래스카 대학도 보였다. 바로 청년은 노란색 형광펜으로 돌아갈 길을 표시해주는 것이다. 알고 보니 교회에서 불과 3~4km 떨어진 곳이었고, 주변을 계속 쳇바퀴 돌듯이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칠흑같이 검은 얼굴에 하얀 치아를 보이며 밖으로 나와 반복해서 방향을 가르쳐주고는 내가 호텔에서 멀어지도록 그 청년은 내가 떠나는 것을 지켜봐 주었다. 그의 이름은 '탐(Tom)', 호텔이름은 잊었지만, '탐'은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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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흑인 청년 '탐'이 노란 형광펜으로 가르쳐 준 되돌아갈 길. 난 귀국해서도 이 지도를 간직하고 있다.]

L로 (L street) 72번가에서 좌회전하여 10분쯤 지나니, '이바타'를 태워다주던 길이 나타났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시간을 보니 정오. 거의 두 시간을 이 좁은 오마하에서 길을 잃고 헤맨 것이다.

그렇게 나의 첫 일요일 오전은 또 이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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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살에 미국 유학 다녀오기 차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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