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환 역
생각의나무
2005년 04월
정가 : 10,000원
페이지 : 260
첫 번째 이야기 - 미운오리새끼
“전원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여름철답게 밀밭은 노랗게 출렁거렸고, 귀리밭은 푸른 물결로 넘실댔으며, 초록의 목초지 곳곳에는 건초 더미가 쌓여 있었다.” 「미운오리새끼」는 이렇게 사랑스런 전원 풍경으로 시작해서, 그보다 훨씬 더 목가적인 정원을 묘사하며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 평화롭기 그지없는 ‘오프닝’과 ‘클로징’ 사이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거부와 생존, 갈망과 학습을 체험하며 의도된 “개체”로 성장해 나가는, 몹시 격렬한 이야기를 목도한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영웅의 “인생여정”이다. 미운오리새끼는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이야기 내내 풀이 죽은 모습을 보이는 주인공. 그래서 우리는 그가 마침내 모종의 ‘근성과 줏대’를 보여줄 때 굉장한 놀라움을 체험한다. 그 과정을 한 번 살펴보자. 먼저 그의 생존본능이 솟구치자 그는 학대에 대한 거부의사를 밝힌다. 이어서 자신의 정체성이 발현되자 순응을 거부한다. 그리고 끝으로 자신의 진수인 “백조다운” 본성을 확인하자 스스로의 잠재력을 수용한다.
줄거리
어느 여름날, 장원의 영주 저택을 둘러싼 연못 근처의 보금자리. 어미 오리 한 마리가 알을 품고 있다. 새끼들이 하나 둘 알을 깨고 나오지만, 이상하리만큼 큰 알 하나는 도대체 부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알의 표면이 갈라지기 시작하고… 그런데 모습을 드러낸 놈을 보니 너무 크고 못생긴 새끼오리다! 어미 오리는 놈이 헤엄도 못치는 칠면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끼들을 이끌고 연못으로 향한다. 새끼오리들은 차례대로 풍덩 소리를 내며 뛰어들어서는 우아하게 물 위를 떠다닌다. 미운오리새끼도 마찬가지다. “그래, 칠면조가 아니야!” 어미 오리는 안도한다. “내 새끼가 맞아!”
그러나 마당에서 놀고 있는 오리들과 닭들, 다른 새끼오리들이 자기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미운오리새끼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오리들은 미운오리새끼에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암탉들은 부리로 쪼아대며, 심지어 모이를 주러 나온 계집아이마저 발길질을 해댄다. 미운오리새끼의 남매들은 고양이가 그 애를 물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어미 오리마저 그 애가 어디론가 멀리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절망에 빠진 미운오리새끼는 울타리를 넘어 늪지대로 도망쳐버린다.
늪지대를 떠돌던 미운오리새끼는 친절한 야생 거위들을 몇 마리 만난다. 그러나 갑자기 사냥이 시작되고... 거위들은 총에 맞아 쓰러지고, 물은 핏빛으로 물든다. 무시무시한 개 한 마리가 물을 첨벙이며 달려와서는 물어죽일 듯이 노려보다 그냥 가버린다. “내가 얼마나 혐오스럽게 생겼으면 사냥개조차 물어가지 않는 걸까!” 미운오리새끼는 극도의 공포감과 함께 절망감에 휩싸인다. 밤이 되자, 미운오리새끼는 늪지대를 벗어나 어느 초라한 농가로 숨어든다. 나이든 할머니가 고양이와 닭을 키우며 사는 농가다. 그 집에서는 고양이가 주인님이고 닭이 마나님이다. 고양이와 닭은 세상물정은 모르면서 현자인 척하며 사는 ‘우물안 개구리들’이다. 미운오리새끼는 ‘누구든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믿는 바와 다른 의견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미운오리새끼의 의견은 무시하고 자신들의 얘기만 옳다고 고집한다. 그곳에서 몸은 편했지만, 미운오리새끼의 내부에서는 바깥 세계에 대한 갈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그런 마음을 암탉에게 털어놓는다. 암탉은 놀고먹으니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이 드는 거라며, 바쁘게 움직이라고 충고한다. 그래도 미운오리새끼가 갈망을 접지 않자, 사리를 분간 못하는 철부지라고 쏘아붙인다. 고양이나 암탉, 할머니가 물을 첨벙거리며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주리라 기대했던 게 잘못이다. “당신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요!” 미운오리새끼는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난다.
자신의 고유한 영역으로 돌아온 미운오리새끼는 물을 헤치고 자맥질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다른 동물들은 여전히 그와 어울리길 거부한다. 어느 가을 저녁, 미운오리새끼는 하얀 깃털에 길고 우아한 목을 가진 한 무리의 새들을 목격한다. 다름 아닌 백조들이다! 그 당당하고 장엄한 새들은 화사한 날개를 펼쳐들고 따뜻한 기후를 찾아서 저 멀리로 날아간다. 미운오리새끼는 그들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매력적인 새들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겨울이 찾아오고, 불쌍한 미운오리새끼는 물이 완전히 얼어붙지 않도록 계속해서 주위를 헤엄쳐 돌아다닌다. 그러다 결국 힘이 다 빠져서 얼음에 갇히고 만다. 하지만 다행히도 한 농부가 그를 발견하고 구해준다.
드디어 다시 돌아온 봄. 미운오리새끼는 자신의 날개짓을 시험해본다. 날개는 ‘휙’ 소리를 내며 강하게 움직이고… 어느새 그는 아름다운 정원 위를 날고 있다! 물에 내려앉은 미운오리새끼는 다시 예전의 장엄한 새들을 목격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새들이 날개를 부풀리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게 아닌가! 미운오리새끼는 자신의 흉측한 모습 때문에 쪼아 죽이려고 달려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은 미운오리새끼는 잔잔한 수면 위로 머리를 수그린다. 순간 그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란다. 그 자신도 백조였던 것이다!
우리들의 직장생활 이야기
본래의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은 불편하다. 어느 정도의 안정과 편안함을 버리고 불안정과 격렬한 성장을 체험한 후 다시 한 차원 높은 안정과 융합으로 돌아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10대 소년이 불안정기를 겪으면 우리는 그것을 정상적인 과정으로 보며 “사춘기라서 그렇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인에게서 불안정한 징후를 엿보면, 우리는 그것을 방종으로 보며 “무책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순응에 의문을 품고 깃털 몇 개를 곤두세울 때 우리는 비로소 성장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일, 그리고 이 세계를 바라보는 보다 훌륭한 시각을 지닐 수 있다.
- 두목 행세하는 암탉에 맞서 자신의 주관을 유지하라 : 놀이마당의 학대와 늪지대의 폭력에서 탈출한 미운오리새끼는 할머니와 고양이, 암탉이 사는 농가에 들어간다. 그러나 고양이와 암탉은 통제권을 행사하길 원한다. 그들은 의견을 피력할 때면 늘 “우리와 이 세상은-!”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자기들이 이 세상의 반이라고, 더욱이 “최상의 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회사의 “두뇌”라고, 그것도 “최상의 두뇌”라고 생각하는 경영진과 다름없다. 혹은 경영진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며 모든 변화에 저항하는, 고집 센 직원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들 대부분의 주변에도 이렇게 ‘두목’ 행세하는 암탉이 있기 마련이다. 부모 중 한 명이 그럴 수도 있고, 시댁이나 처가 식구, 배우자, 친구, 동료, 직장 상사 가운데 ‘암탉’이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들 암탉의 ‘꼬꼬댁’ 소리를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들 암탉의 ‘꼬꼬댁’ 소리는 책임감을 앞세우는 현실적인 목소리다. 물론 이런 암탉의 현실적인 태도는 우리의 실용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생까지 암탉에게 맡길 순 없지 않은가. 만약 인생을 이런 암탉에게 맡기면 우리는 너무 바빠서 생각할 시간도 갖지 못하게 되고, 너무 폐쇄적이 되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게 되며, 적절한 세월이 흐르기도 전에 늙은이가 되고 말 것이다.
- 힘껏 날아서, 청명한 수면을 바라보라, 백조가 보이는가? : 어느 봄날 완전하게 성장한 그는 강력한 날개짓으로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난다. 문득 청명한 수면을 향한 그의 눈길은 자신이 경외하던 아름다운 한 마리 백조를 발견한다. 그 자신도 백조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릇된 정체성이 죽고 진정한 정체성이 탄생하는, 탈바꿈의 순간이다. 자신의 위대함에 접근하는 것은 사실 두려운 일이다. 우리는 멀리 떨어진 채 뭔가 비범한 것을 볼 때는 안전을 느끼지만, 막상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며 “함께 하자!”고 하면 겁을 집어먹는다. 스스로 그런 수준에 못미치면 어쩌나, 그래서 망신이나 당하면 어쩌나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 우리는 그러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기보다는 뒤로 물러서며 피하려 든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비범한 뭔가에 개입 혹은 관여하거나 섞이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목도할 수 있단 말인가.
미운오리새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 전체를 통해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도 나름대로의 내적인 여정을 밟아볼 필요가 있다. 당신은 때로 주위를 둘러보며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당신은 혹시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암탉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숨기곤 하는가? 당신은 누구에게 이끌리며, 누구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며, 누구에게 뭔가를 배우고 싶어하는가?
- 잔잔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여라 : 신화학자인 조셉 캠벨은 “너의 행복을 좇아라”라는 말을 했다. 그것은 ‘그 작고 잔잔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즉 ‘너만의 그 고유한 소명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이다. 그러한 소명을 따르는 일은 언제나 위험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그 속삭임은 우리를 뻔한 경력의 길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길을 만들 것을 요구한다. 하고 있는 일이 불만족스러워질 때, 당신은 그냥 적응하고 불평하며 상황이 “정상”으로 돌아오길 희망하는 경향이 있는가? 아니면 당신은 이미 가진 것을 “놀랍도록 창조적으로” 개선하려는 경향이 있는가? 그도 아니면 당신은 문자 그대로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나버리는가?
“오랜 옛날, 새 옷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잘 차려입는 일에 돈을 다 써버리는 임금님이 살았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첫 줄은 이렇게 허영과 허식으로 외양을 가꿀 수도 있는 한편,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안데르센은 특정한 무엇에 집착하거나 특정한 외양을 가꾸는 것에 대해서 우리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 역시 말쑥한 차림을 좋아했고, 외모 관리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거짓된 허세”였다. 따끔한 충고를 담고 있는 이 동화는 결국 엉터리와 속물근성을 조롱하는 그 나름의 방법인 셈이다. 우리가 제도권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동의하지도 이해하지도 않는 것을 얼마나 인정하는 척하는지, 그 거짓된 가면을 꼬집는 그 나름의 방법이라는 얘기이다.
줄거리
임금님은 옷을 너무나 좋아해서 다른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임금님이 집무실에 있는 것이 일상사라면, 이 임금님은 “드레스 룸”에 있는 게 일상사다. 어느 날, 두 명의 협잡꾼이 도착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천을 짤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리고 그 천은 성질이 특이해서 “지위에 걸맞지 않거나 허용할 수 없이 어리석은”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임금님은 지위에 적합하지 않고 현명하지 못한 대신들을 가려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즉시 그 천을 제작하라”고 명령한다. 성 안의 모든 백성들이 그 천의 신기한 힘에 대해 알게 되고, 과연 어떤 사람들이 부적절한 얼간이로 판명날 것인지 궁금해서 몸살이 난다.
얼마 후, 임금님은 천의 직조 작업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그 천의 이상한 힘에 다소 불안한 마음이 생긴 임금님은 처음에는 가장 신임하는 대신을, 다음에는 붙임성 있는 관리를 보내 일의 진척 상황을 확인해 보라고 한다. 그 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아무것도 없었으니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둘은 큰 혼란에 빠진다. “내가 바보란 말인가?” “내가 걸맞지 않은 지위에 올라 있단 말인가?” 이들은 그러한 사실을 남들이 알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색상과 무늬가 훌륭하다며 거짓된 칭찬을 과장해서 늘어놓는다.
며칠 뒤, 임금님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해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작업실을 찾는다. ‘이게 뭐야?’ 임금님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내가 바보란 말인가? 임금 자격이 없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이 알까봐 걱정이 된 임금님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아, 정말 아름다운 천이로구나!” 수행원들도 눈을 씻고 계속 들여다보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정말 훌륭하군요! 장려한 아름다움이에요! 절묘합니다!” 이런 칭찬들이 돌고 돌아 급기야는 임금님에게 다가오는 경축 행렬 행사에 이 천으로 만든 새 옷을 입고 나갈 것을 권유하기에 이른다.
행사 전날 밤, 협잡꾼들은 마치 천을 재단하고 새 옷을 짓느라 바쁜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임금님에게 모든 옷을 벗도록 요청하고 새 옷을 “입힌다.” 행사가 진행되자 군중들은 환호하며 박수갈채를 보낸다. 임금님의 새 옷이 이렇게 대단한 환호를 받다니! 전에 없던 일이다. 그런데 그때 한 꼬마가 외친다. “하지만 아무것도 입지 않았는데요!” 사람들은 꼬마가 한 말을 귓속말로 옮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모두가 한마디씩 떠들기 시작한다. “근데, 아무것도 안 걸치셨구먼!” “임금님이 벌거벗으셨어!” 임금님은 공포로 온몸이 오싹해진다. 사람들 말이 맞는 것 같아서다. 그러나 거기서 도망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는 끝까지 그 모습으로 행진에 임한다.
우리들의 직장생활 이야기
「벌거벗은 임금님」이야기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경우를 꼬집을 때, 혹은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교묘한 상술에 넘어가는 경우를 비판할 때 주로 인용된다. 어느 경우든 사실을 직시하고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말이 쉽지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타인의 거부를 회피하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되어 있다. 생존하려면 소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추방당하면 정체성은 물론이고 생명까지 위협받는다는 것을 수천 년에 걸쳐 익혀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파멸을 예방하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서로 협력하고 충성을 다지며 조직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경합을 벌인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실리적이 되면, 즉 자신의 경력 관리에 치중하게 되면, 우리의 관계는 단순히 거래가 되고, ‘역할 놀이와 안전 제일주의’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
- 역할 놀이 :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꾸미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이나 멋지게 화장한 얼굴, 품위 있는 표정을 지은 얼굴 등. 이런 얼굴을 갖추면 우리는 연기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이미지와 걸맞고 우리의 적응에 도움이 되는 말과 행동을 보여줄 준비가 된다는 의미다. 우리는 ‘옷감’이 보이지 않을 때조차도 그것의 열렬한 지지자 역할을 수행하는 법을 알고 있다. 남들의 기대에 부응해 연기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렇게 우리가 수행하는 역할은 종종 혼동을 야기할 뿐 아니라 때로는 자아를 완전히 장악해 정체성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에서는 어떠한가. 임금님이 신임하는 대신과 관리가 명을 받들어 진행 상황을 확인하러 작업장을 찾는 장면에서 이들의 내면의 ‘개인 매니저’가 활동하는 모습이 나온다. 작업장에서 아무것도 안 보이자 그들의 개인 매니저들은 처음에는 당황해한다. ‘내가 바보란 말인가? 아니면 무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개인 매니저들은 재빨리 ‘안전 제일주의’로 움직일 것을 결정해 버린다. 정직을 버리고 안전을 택함으로써 그들은 결국 믿을 만한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실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들 대부분이 이와 유사한 딜레마에 종종 빠지며, 또 대개는 안전을 택하는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용적인” 것으로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개인 매니저의 지나친 실용주의 경향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이 과도한 실용주의 경향은 때로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에서처럼 당면한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식의 대응 형태를 띤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은 좀더 전략적인 양상을 보인다. 보다 나은 경력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방법을 모색하는 우리, 조직의 용도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포장하는 우리를 생각해 보라. 이런 행태는 꿈과 갈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 대부분은 종종, 일시적인 합리성을 택하느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희생시키곤 한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실수를 자각하고 후회한다.
- 안전 제일주의 : 예절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마감 시한을 맞추는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사회적 적응을 위해 많은 일을 행한다. 여기에는 문제될 게 하나도 없다. 문제는 그러한 적응을 위해 우리가 사실을 무시하고 우리 자신의 가치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적응을 위한 노력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종종 두려움 때문이며, “안전하게 가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똑똑해 보이고 싶고 “경력에 해가 되는 일”은 피하고 싶으며 자리를 보전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두려움은 종종 재정적 취약성에 기인한다. 빚에 빠져 있거나 직장에서의 자리가 불안해지면 우리는 위험을 느끼고 안전 제일주의를 선호한다. 지배적 위치에 있는 자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견을 스스로 거부한다. 다른 사람의 아젠더를 채택한다는 의미다.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새로운 옷감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무시하고 남들이 기대하는 내용을 말한다.
- 당신은 누구의 아젠더에 따라 살고 있는가? : 궁극적으로 이 이야기의 주요 교훈 가운데 하나는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아젠더를 관리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적응에 연연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젠더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이로울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매우 위험성이 높은 행태이다. 자신의 경력과 관련해 실리와 계산에 치중하다 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경력을 너무 엄격하게 관리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제안하는 직업을 선택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능력을 익히며 그들의 분기별 실적 평가에 연연하게 된다. 상사나 인사 책임자 혹은 다른 중요 인물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그들의 규칙에 적응하며 그들의 점수판을 채택하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의 일이 축소되거나 외주로 나가거나 해외로 이전되면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자신의 아젠더를 회수하면 된다. 우리가 열정을 느끼는 일,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일에 종사하면 된다. 그러면 어떤 자격을 부여받는 느낌 대신에 책임을 다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일에 수준급 전문가가 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즐기게 된다는 점이다.
「쇠똥구리」는 한 쇠똥구리의 흥미로운 모험담을 빠른 호흡으로 풀어놓는 우화다. 우리의 주인공 ‘까다로운 쇠똥구리’는 어느 날 자신이 살던 마구간을 나와 바깥세상으로 향한다. 이후 수많은 시련을 겪게 되는 쇠똥구리, 그러나 결국 그는 본래의 편견을 고스란히 움켜쥔 채 다시 마구간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야기 속에서 그는 자존심 강한 나르시시스트(narcissist, 자기도취형의 사람)가 할 법한 행위들을 보여준다. 즉 그가 품고 있는 과장된 자아상에 반하는 사실과 마주하게 되면, 그것을 자신의 자아상에 부합하도록 재해석해 버리는 것이다. 이야기 속 쇠똥구리가 말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자신에 대해 ‘배울’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맞는’ 입장만 정립하고 피력하는 능력이다.”
줄거리
어느 날, 왕의 말이 금 편자를 달게 된다. 이유인즉, 그는 왕을 태우고 전장에 나가 용맹스럽게 싸웠으며 무엇보다 위험에 처한 왕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대장장이가 말에게 금 편자를 다 달고 나자 주인공인 쇠똥구리가 기어오더니 자신의 가느다란 다리를 내밀며 말한다. “먼저 말이 상을 받았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요.” 그러자 대장장이가 묻는다. “뭘 원하는 거지?” “금 편자요!” 쇠똥구리의 말에 대장장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묻는다. “넌 저 말이 왜 금 편자를 달게 된 건지 모르는 게냐? 그 이유를 이해 못 하겠니, 엉?” 그러자 쇠똥구리는 이렇게 소리친다. “뭘 이해하라는 거죠?” 쇠똥구리가 생각하기에, 저 왕의 말이라는 녀석은 혼자서는 먹이도, 심지어는 물 한 모금도 해결하지 못하고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게으른 짐승에 불과한데도 자신은 받지 못한 금 편자를 얻는 특혜를 입은 것이다! 결국 화가 난 쇠똥구리는 씩씩거리며 그곳 마구간을 떠나버린다.
마구간을 나온 쇠똥구리는 얼마 후 꽃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만난 무당벌레가 말한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렇죠?” 그러나 쇠똥구리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이게 아름답다고요? 보세요, 여긴 거름 더미 하나 없잖아요!” 정원을 떠난 쇠똥구리는 이번에는 배추벌레를 만나게 된다. 배추벌레는 말한다. 자신은 이제 ‘깊은 잠‘에 빠지게 될 것이며, 깨어나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쇠똥구리는 배추벌레를 향해 조롱의 말을 던지고는 잔뜩 성질이 돋아서 날아가 버린다. 세찬 빗속에서 하룻밤을 보낸 쇠똥구리, 아침이 되자 저쪽에서 개구리 두 마리가 나누는 대화가 들려온다. 그들은 ‘이렇게 습한 날씨를 사랑하지 않는 건 곧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다. 쇠똥구리가 길을 물어보지만 그들은 들은 체도 않는다. 세 번이나 물었는데도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한 쇠똥구리는 굴욕감을 느끼며 소리친다. “난 두 번 묻지 않아!”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쇠똥구리는 드디어 한 도랑에서 동족인 쇠똥구리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 앞에서 자신이 왕의 마구간에서 왔으며, 금 편자를 달고 태어났노라고 으스대는 쇠똥구리. 그곳에서 그는 결혼을 하게 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지겨워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곳을 떠나버린다.
그 후 숱한 우여곡절 끝에 쇠똥구리는 한 마구간 창문으로 날아들게 된다. 자신이 떠나온 바로 그 마구간의 창문이다. 그리고는 왕의 말 위에, 그 부드러운 갈기 위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애쓰며 쇠똥구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 왕의 말 위에 올라타 있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래,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어!” 다음 순간, 쇠똥구리는 기분이 최고조로 상승한다. ‘세상이 그리 형편없는 곳만은 아냐.’ 쇠똥구리는 생각한다. 왕의 말이 왜 금 편자를 달게 되었던가? 바로 이 쇠똥구리님을 태우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우리들의 직장생활 이야기
안데르센 동화 속의 쇠똥구리는 자아도취적이고, 자기 과시적이며, 지위에 대한 강한 욕구를 지닌 존재다. 그는 어떤 사실과 대면했을 때 거기에 자기 확대적인 견해를 들이댄다. 그러나 자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결코 금 편자를 얻지 못하며, 환상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인정받는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설계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인간이 되려면 우리는 자신의 장단점, 동기와 목표, 그리고 감정적 유인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우리가 모든 ‘쇠똥구리적’ 성향을 억압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올바르게만 활용한다면 쇠똥구리적 에너지와 상상력은 분명 우리에게 득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는 자신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능력에 정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우리는 비로소 성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 오만한 쇠똥구리 : 쇠똥구리가 지닌 단점 중의 하나는 자아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그는 스스로의 중요성에 대해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심리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쇠똥구리는 ‘과도한 자기 존대 성향의’ 자기주의자, 즉 나르시시스트라고 할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자신을 평가절상하는 태도에 있다기보다는 타인을 평가절하하는 태도에 있다. 문제는 쇠똥구리가 끊임없이 타인을 깎아내린다는 데 있다. 일터의 나르시시스트는 어떠한가? 그들은 타인과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칭찬 받기만을 갈망한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검증되기보다는 박수 받기를 원하며, 무언가를 배우기보다 배우지 않고도 옳기를 바라고, 성공의 공은 자신이 취하고 실패의 책임은 타인에게 전가한다. 일이 성공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지난번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내 덕분이야.” 반대로 일이 실패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놓은 계획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문제가 있다면, 그건 저들에게 그것을 실행할 만한 결단력이 없었다는 거야.” 그들이 어떤 말을 하느냐는 전적으로 일의 결과에 달려 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가만히 앉아 결과에 대해 거들먹거리곤 한다.
- 지위에 집착하는 쇠똥구리 : 쇠똥구리가 지닌 성향 중에서 또 하나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은 자제를 모르는 지위욕이다. 그는 금 편자에 집착하고 그것을 탐한다. 『동기Driven』라는 책에서,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폴 로렌스(Paul Lawrence)와 니틴 노리아(Nitin Nohria) 교수는 이러한 욕구를 획득 동기라고 정의한다. 이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이러한 획득 동기 외에도 결속 동기, 학습 동기, 방어 동기가 내재되어 있으며, 때때로 발생할 수 있는 이 동기들간의 충돌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 직면한 과제 중 하나라고 한다.
쇠똥구리는 오로지 금 편자로 상징되는 지위에만 관심을 보이며, 스스로 부여한 자기 중요성을 완강히 방어하려고 든다. 반면, 그의 결속 동기와 학습 동기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다. 그는 타인과의 관계를(심지어 동족인 쇠똥구리들과의 관계조차)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획득 동기에 경도된 사람들은 종종 타인의 관점은 무시한 채 자기 견해만 고집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지나친 경쟁 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결속 지향적’인 사람들을 향해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그들은 다양성과 그것이 지닌 시너지 효과를 무시하며, 그러한 개념이 ‘현실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 결속 지향적인 사람들은 경쟁이란 원시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며 성숙한 인간이라면 협업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야심적인 사람은 곧 파괴적이고 이기적이며 시야가 좁은 사람이며,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경쟁적인 사람들이 당장은 성공을 거둘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도덕과 윤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경쟁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비록 실패는 할지언정 적어도 도의가 무엇인지는 알아.”
- 자아 중심적인 쇠똥구리 : 우리 주변의 ‘쇠똥구리‘들은 종종 타인이라면 몇 분이면 집어낼 수 있을 자신의 단점을 전혀 보지 못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이 성공하면, 이들은 당연히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다. 반대로 실패를 하면, 이들은 타인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그러나 때로 거대한 현실이 모습을 드러내 오묘하기 그지없는 방식으로 깨우침을 선사하기도 한다. 심각한 질병이나 충격적인 사건, 혹은 예기치 못한 피드백의 형태로 말이다. 우리는 피드백을 보다 유능하고 보다 강인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데 활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온순하게 만들어 조직의 정해진 틀에 밀어 넣는 데 이용할 때가 많다. 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만일 내가 쇠똥구리를 만난다면, 그에게 어떤 피드백을 제공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의 놀라운 상상력과 집중력, 그리고 자기 조장 능력을 북돋워줄 것이다. 단, 자기 환상을 고수하는 데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현실과 대면하라는 당부와 함께 말이다. 나는 ‘결코’ 쇠똥구리를 길들여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그를 안락의자에 기댄 채 달콤한 사탕이나 핥는 존재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나는 그가 미숙한 에너지를 통제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한층 강한 존재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자아 중심적이면서도 여전히 멋진‘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쇠똥구리적 에너지, 공격적 분노의 에너지를 억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에너지를 좀더 키워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착한 인간상을 강요하는 이른바 전통적 사회 속에서 자신의 송곳니와 발톱을 몽땅 빼앗긴 사람들 말이다.
난쟁이 정령(精靈) 니세는 약 90센티미터의 키에 빨간색 원뿔형 모자를 쓰고 있으며 사람들 눈에 띄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실제로 본 일이 없다 하더라도 덴마크 어린이들에게는 현실적인 존재다. 농가들에는 대부분 그 집만의 니세가 있으며, 주인이 니세를 잘 대접하기만 하면 그 집안이 잘되도록 보살펴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큰 사발로 포리지(여기서는 설탕과 계피를 뿌리고 커다란 버터 한 덩어리를 얹은 쌀 푸딩을 말하며, 일반적으로는 오트밀을 물이나 우유로 끓인 죽을 가리킨다) 한 그릇만 주면 된다. 그러나 가족들은 어떤 식으로든 니세의 모습을 보려 해서는 안 되며, 만약 그렇게 했다가는 펄펄 뛰며 성을 내고 앙갚음을 한다. 이 이야기 속의 니세는 집주인에게 충실하고 호기심 많으며 장난기가 넘친다. 이 현실적인 작은 존재가 이상의 세계에 눈떠감에 따라, 우리도 재물(財物)과 시(詩)에 대해 각자 품고 있는 욕망, 즉 배를 채우는 음식과 마음의 양식에 대한 욕구를 생각해 보게 된다.
줄거리
다락방에 사는 학생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식료품점 주인은 그 집 전체의 주인이며, 니세에게 크리스마스 포리지를 대접해 줄 능력이 있다. 그래서 니세는 가게 주인과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저녁, 학생이 치즈를 사러 내려온다. 학생이 나가려 하자 주인 여자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잘 가요!”라고 인사한다. 가벼운 인사만으로 끝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한다. 사실 주인 여자는 타고난 수다쟁이다! 어쨌든 학생은 치즈를 싼 종이에 한눈을 팔고 있다. 오래된 시집에서 찢어낸, 시가 적혀 있는 페이지이기 때문이다. 식료품점 주인은 그 종이를 찢어낸 시집을 팔겠다고 제안하고, 학생은 너덜너덜한 시집을 받고 치즈를 돌려준다. 학생은 그런 책을 찢는 것은 죄악이라 말하고 나서, 가게 주인이 헌 신문을 담아둔 통만큼이나 시를 모른다고 농담을 한다. 니세는 그 말이 매우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밤에 니세는 주인 여자의 말 잘하는 재능을 빌린다. 니세가 그 “말재주 입”을 어떤 물건에고 붙이기만 하면 그 물건은 주인 여자만큼이나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니세는 우선 그 말재주 입을 통에게 올려놓고 묻는다. “너는 시가 뭔지 모른다던데…… 그게 정말이야?” “그럴 리가요, 당연히 알지요.” 통이 대답한다. “시란, 신문의 아래쪽에 씌어 있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통은 자신이 학생보다 시를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다른 물건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대다수가 동의하는 것을 존중할 수밖에.”
그런 다음 니세는 학생에게 훈계를 할 생각으로 위층에 올라간다. 그러나 열쇠구멍으로 몰래 들여다보니, 학생이 해어진 시집을 읽고 있는데, 방 안이 희한한 영상과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뭐 이런 게 다 있지?!” 니세는 매우 놀란다. “이제부턴 학생과 함께 있어야겠군!” 하지만 니세는 곧, 학생은 포리지를 제공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생각나서 다시 아래층 주인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니세는, 이제는 더 이상 “가게 안의 지혜와 지성”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매일 밤 열쇠구멍을 통해 학생의 방을 들여다보고, 그때마다 어떤 장엄한 느낌에 압도당한다. 그러다 학생의 방에 불이 꺼지면 니세는 추위를 느끼고 서둘러 가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어 가게 주인에게서 포리지를 대접받게 되자, 가게 주인이 니세에게는 확실한 최고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거리는 큰 불로 화염에 휩싸인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구하러 뛴다. 주인 여자는 귀고리를, 주인은 채권을 건지러 달린다. 니세는 잽싸게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다락방에선 학생이 창가에 서서 거리 저편의 불길을 지켜보고 있다. 니세는 시집을 움켜잡고 급히 지붕으로 올라간다. 이제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해졌다. 그러나 불길이 잡히고 마음이 차분해지자 니세는 생각한다. ‘아무래도 포리지가 있으니 가게 주인은 결코 포기할 수 없겠어!’ 그리하여 니세는 양쪽 모두와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우리들의 직장 이야기
- 식료품점(현실적인 삶) : 우리의 이성이 내는 현실적인 목소리는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 좋은 교육을 받아라,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라, 돈을 잘 벌어라, 풍족한 생활을 누려라. 그거면 됐지, 인생이 별건가! 다시 말해, 니세 식의 호기심만 억제한다면 인생은 그리 복잡할 것이 없다.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기 위해 우리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 하고 시험에 대비해 공부를 한다. 평판 있는 회사를 골라 제대로 능력을 키우고 목적을 달성한다. 만족할 만한 브랜드로 몸을 감싸고 자동차나 이웃, 아이들 학교도 마음에 흡족하도록 고른다. 삶은 착착 진행되고, 삶에 대한 통제권도 우리에게 있다! 그게 아닌가? 혹시 우리는 그저 상황에 순종하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그저 “가게 안”의 기준에 의거해 살며, 대다수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무조건 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문제는 훌륭한 삶을 원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훌륭한 삶을 사회의 통념에 맞는 삶으로 해석한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출판물만을 읽고 자신의 견해를 받쳐주는 프로그램만을 시청할 때 일어나는 문제와 같다. 그렇게 되면, 결국 시가 씌어져 있는 종이는 포장지로 전락하게 되고, 정보는 “지혜”와 혼동이 되며, 우리는 모두 “대다수의 의견”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 학생의 공부방(생각이 깊고 초연한 삶) : 현실적인 니세는 식료품점 주인과 함께하고 싶어한다. 가게 주인에게는 재산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의 삶은 초라해 보인다. 그러나 무일푼인 그 학생이 필요한 것은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학생은 치즈와 너덜너덜한 책을 맞바꾸어 버터 바른 빵에 아무것도 얹지 않고 그냥 먹기로 하면서, 그 거래에 만족하는 것 같다. 돈에 개의치 않는 이 학생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있다. 위대한 사상들을 깊이 파고들고 우주의 이상을 탐구하며, 인생의 의미를 명상할 시간이 있다.
니세는 학생에게 훈계하기 위해 다락방에 올라가지만, 정작 자신이 뭔가를 배우고는 놀란다. 학생의 세계와 만나면서 니세는,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장엄한 느낌에 압도당한다. 무엇이 이 키 작은 현실적인 존재에 그토록 충격을 준 것일까? 진리나 용기, 연민 혹은 아름다움의 힘에 감동 받은 것일까? 아니면 불멸의 사상들에 감동을 받은 건가? 만인을 위한 자유와 평등, 정의라는 깨우침의 이상들, 옛 나라를 바꾸어 새 나라를 낳게 하는 그 “비현실적인 개념들”에 영향을 받은 것인가? 니세는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것에 깊이 빠지면서도, 불이 꺼지고 환영이 사라지면 다시금 현실과 부딪치게 된다. 삶에 있어 이상이란, 영감을 주기는 하지만 우리가 거처할 곳을 마련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삶이란 중단 없는 효율성 증대와 끝없는 업무 목록 그 이상의 무엇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 생각이 깊은 행동 : 식료품점 주인은 가게의 삶을 즐긴다. 사람들의 왕래와 흥정, 무게를 달고 돈을 주고받는 행위 등등, 이것은 활기찬 삶이다! 우리는 대부분 재물에 우위를 두고 있으므로 불이 나면 귀고리나 채권부터 챙긴다. 이와 대조적으로 학생은 다락방에서 고독하게 생활하며 위대한 지성들과 벗삼는 쪽을 좋아한다. 이것은 생각이 깊은 삶이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현실 세계”에서 너무 동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큰 불이 거리를 휩쓰는데도 학생은 창가에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한다. 그는 그저 방관자일 뿐이다.
난쟁이 니세는 양쪽 세계에 모두 속해 있다. 처음에는 가게 안에서 편안해 하지만, 그의 지성이 위대한 사상들에 강하게 이끌린 이후로는 더 이상 가게에서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안락함을 원하지만 다락방의 불빛에도 끌린다. 화재 중에 니세는 포리지 생각을 까맣게 잊는다. 그 대신 그는 다락방으로 뛰어올라가 자신의 빨간 모자 속에 낡은 시집을 쑤셔 넣고, 지붕으로 해서 굴뚝까지 쏜살같이 올라간다. 그리곤 굴뚝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모자를 부여잡는다. 그는 이제 자신의 마음을 안 것이다! 그러나 화재가 진압되고 마음이 안정되자 자신이 얼마나 포리지를 좋아하는지 생각이 난다. 이곳, 가게와 다락방을 모두 딛고 선 이 위에서 모든 것은 명백해진다.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양쪽 모두와 함께 할 것이다.
명상과 행동을 상반된 것으로 보면, 그 둘이 투쟁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상아탑에 묻힌 현실성 없는 엘리트주의자”니,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기꾼”이니 하면서 어느 한쪽을 비하하고, 다른 한쪽에 드러내놓고 전념함으로써 문제를 악화시킨다.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가게 주인과 학생은 서로 분리된 세계에 살고 니세는 어느 한쪽을 선택한 상태다. 가게 주인이 승자다. 집주인인데다 최상급 버터를 팔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은 가진 것이 없으니 제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런 학생이 가게 주인을 놓고 농담을 했을 때 니세는 대단히 화가 나서 학생에게 훈계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실제로 교훈을 얻는 것은 니세 쪽이다. 이제 그는 양쪽 세계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누구든 대립하는 양쪽 중 한쪽을 택하고 다른 한쪽을 무시하는 대신에 양쪽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양쪽 세계에 나누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예를 들면, 주중에는 대부분 현실적인 문제에 전념하다가 일요일에는 명상을 한다든지, 아니면 몇 달 동안 스트레스 쌓이는 과제에 집중한 다음에 낚시를 간다든지 배낭 여행을 떠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이 니세가 중간에 택한 방식이다. 니세는 낮에는 아늑한 가게에서, 저녁에는 다락방에서 지낸다. 두 곳은 모두 중요하지만, 서로 접촉하거나 교감을 나누지는 않는다.
「전나무」는 우리 인생에 대한 비극적인 우화다. 이 이야기가 비극적인 이유는 마지막에 전나무가 죽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단 한순간도 진짜 인생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과거 또는 미래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전나무는 결코 현재를 충실하게 살지 못한다. 전나무 이야기는 행복한 삶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한 진실 하나를 일깨워준다. “지금 이 순간”의 참 의미와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평소에 자주 듣는 말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들은 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감사해야 할 것들을 세어보렴.” 덴마크의 시인이자 과학자인 피에트 하인(Piet Hein)은 “그대가 하는 일이 곧 그대의 인생 / 지금이 아니면 안 되리니, 그대의 선택은?” 하고 노래했으며, 존 레논은 “계획을 짜느라 바쁜 동안 현재의 당신 인생은 흘러간다”라고 노래했다.
현재를 즐기는 방법은 퍽 간단하다. 일부러 시간을 내거나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간 큰 용기를 낼 필요도 없다. 현재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할 줄만 알면 된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 현재를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가? 좀더 충만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줄거리
어느 숲 속에 작고 예쁜 전나무가 한 그루 있다. 전나무는 어서 빨리 자라서 그곳을 떠나고 싶어할 뿐 따뜻한 햇볕과 신선한 바람에 고마워할 줄 모른다. 바다를 가르며 달리는 배에 달린 키 크고 멋진 돛대 이야기를 들은 전나무는 ‘나도 빨리 자라서 바다를 떠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또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 얘기를 듣자 빨리 크리스마스가 왔으면 하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한다.
마침내 전나무가 베어진다. 도끼가 나무의 몸 깊은 곳을 찍어 내리고, 고향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전나무는 무척 슬퍼진다. 하지만 아름답고 환한 방에 도착하자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사람들이 다가와 전나무의 몸을 초와 사탕들로 장식하며 말한다. “오늘밤에 불을 밝혀야지!” 그 말을 들은 전나무는 마음이 들뜬다. ‘밤이 빨리 되었으면! 촛불이 켜지면 어떻게 될까?’ 밤이 되자 초에 불이 붙여진다. 전나무는 눈부시고 찬란하게 변하지만 혹시 촛불이 떨어질까 걱정되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다. 조금 후 사람들이 나무 주변에 빙 둘러서서 손을 잡고 춤을 춘다. 나무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지금 뭐 하는 거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마침내 촛불이 다 탄 후에 몸집이 자그마한 한 남자가 아이들에게 클룸페 둠페 이야기를 해준다. 전나무 역시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후 공주와 결혼한 남자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는다. 나무는 다음날도 화려하게 장식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 찬란함을 한껏 즐기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 전나무는 다락방으로 옮겨진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생쥐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온다. 전나무는 생쥐들에게 고향인 숲 속 얘기를 들려준다. 생쥐들은 “아, 넌 참 많은 것들을 보았구나! 정말 행복했겠다!” 하며 감탄한다. 전나무 역시 숲에 있던 시절이 정말 즐거웠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전나무는 생쥐들에게 크리스마스 이브에 있었던 일과 조그만 남자에게 들은 클룸페 둠페 이야기도 해준다. 생쥐들이 말한다. “아아! 넌 정말 행복했겠다!” 전나무는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다시 올 거라고, 클룸페 둠페처럼 자기도 공주를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루는 큰 쥐 두 마리가 찾아온다. 그들은 햄과 돼지고기 얘기를 듣고 싶어할 뿐 전나무가 해주는 얘기는 지루해한다. 생쥐들도 이제 전나무의 이야기에 흥미를 잃고 모두 가버린다. 전나무는 생쥐들이 자기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때를 그리워한다. “작은 생쥐들이 내 주변에 동그랗게 앉아 얘기를 들어줄 땐 정말 즐거웠는데……” 전나무는 다시 그럴 기회가 생기면 마음껏 그 시간을 즐기리라 다짐한다.
어느 날 아침. 사람들이 전나무를 마당으로 끌어내고, 나무는 신선한 바람과 햇빛을 마음껏 들이마신다. “이제 멋지게 살게 되겠지!” 전나무는 즐거움에 들떠서 소리치고 가지들을 힘껏 뻗으며 기지개를 켠다. 전부 누렇게 시들고 말라빠진 가지들… 전나무는 못생겨진 자기 모습을 부끄러워한다. “아, 그때 나의 삶을 마음껏 즐겼더라면!” 한 남자가 전나무를 조각조각 자른 후 커다란 가마 밑의 불 속으로 집어넣는다. 불꽃이 타다닥 소리를 낼 때마다 전나무는 한숨을 내쉰다. “이젠 다 지나갔구나! 다 지나갔어!”
우리들의 직장생활 이야기
전나무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은 몸이 있는 곳을 떠나 다른 곳을 헤매는 경우가 많다. 주중에는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느긋하게 쉬거나, 재미있는 여가를 즐기거나, 밀린 잠을 자거나, 하고 싶었던 일을 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막상 토요일이 되면 우리 마음은 벌써 일터로 돌아가 있다. 교회나 해변에 앉아서도 생각은 저 멀리 다른 데로 달려간다. 또 아이들 잠자리에서 같은 동화책을 네 번째 읽어주면서도, 머릿속에는 해야 할 일 목록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는 척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아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지난 일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한다. 또 보다 나은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앞일을 미리 생각하고 “만일 ~이라면?” 하고 질문도 던져봐야 한다. 그러나 진지한 질문을 해보는 것과 마음속에서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수다쟁이에게 모든 순간을 빼앗기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삶은 우리에게 출생, 성장, 성숙, 노화, 죽음, 그리고 (종교적 의미로) 부활이라는 선물을 준다. 순환하는 사계절과 차고 이지러지는 달처럼, 인생에는 늘 새로운 국면이 등장한다. 대개 사람들은 인생의 전반부는 열망하지만 후반부는 외면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인생은 전반부와 후반부 모두 나름대로 우리에게 줄 선물을 준비해 두고 있다. 전반부는 발전과 활력을, 후반부는 성숙과 균형 잡힌 통찰력을 주기 때문이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두 축 사이에는 수많은 소(小)주기들이 존재한다. 어떤 대상과의 관계에 흥미가 생기거나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 특별한 취미 활동을 시작하거나 그만두는 것, 어떤 프로젝트를 개시하거나 마무리하는 것 등이 바로 그러한 소주기들이다. 심지어는 상품의 수명이나 비즈니스에도 주기가 있지 않은가.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어야 수액을 공급받을 수 있는 나무와 달리, 우리는 언제든 수액을 재생할 수 있다. 신이 나서 하던 일이 언젠가부터 귀찮게 느껴질 땐 스스로 이렇게 물어봐야 한다. “왜 힘이 나질 않을까? 만족감도 짜릿한 즐거움도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마감 날짜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이유를 잊어버린 건 아닐까? 그렇다면 삶에 조금 더 여백을 만들어야 한다. 아니면, 경험과 실력이 늘어 맡은 프로젝트가 너무 쉽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그런 경우라면 그건 그냥 잊어버리고 잠시 재충전을 한 후 다른 새로운 건을 시도해 보는 편이 좋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정하고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보다는, 찾아온 기회를 놓칠세라 덥석 뛰어들기부터 한다. 늘 앞서 나가려는 과도한 열망은 발전에 독이 되는 법인데 말이다.
-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은 갈망 : 「전나무」의 전반부에는 현대인의 조급함과 불안한 심리가 묘사되어 있다. 전나무는 하루빨리 자라서 숲을 떠나 멋진 삶을 살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언제까지고 자신의 몸 안에 싱싱한 수액이 흐르리라 생각하는 전나무는 빨리 어른 나무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다. 그러나 너무 조급함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밤도 즐기지 못한다. 늘 앞서가며 “다음엔 어떤 일이 있을까?”만 생각하느라 순간의 즐거움은 모두 놓치고 만다. 오늘날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선택과 기회에 둘러싸여 살아가지만, 예전보다 더 만족할 줄 모른다. 늘 불안해하고 뭔가 놓칠지 모른다는 조바심에 전전긍긍한다. 우리의 머릿속은 이런 질문들로 가득하다.
“모든 걸 꼭 들어맞게 조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사람들의 기대에 잘 부응하고 있는가?”
《파이낸셜 타임스》의 리처드 톰킨스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욕심을 줄여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는 한 마을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고 가능한 일들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전체가 마을이요 경기장이다. 좇을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며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톰킨스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종종 휴대폰을 꺼놓을 필요가 있으며, 아이들은 밖에 나가 뛰어놀게 해야 한다. 좀더 적게 사고, 좀더 적게 보고, 조금 덜 돌아다녀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해 스스로 경계를 정해야 한다.”
- 실패와 좌절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 전나무는 다락방에 갇혀 있는 동안 과거를 되돌아보며 생각할 시간을 갖고 인생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얻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전나무는 진정으로 깨닫지는 못한다.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거나 다시 멋지게 비상하는 환상만 키울 뿐이다. 우리는 직장에서 사소한 좌절을 흔하게 경험한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좌절감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대개 지난 분기의 실적을 통해 가치를 평가받고, 직장에서의 위치도 상사의 마음먹기에 따라 ‘상승’ 또는 ‘하강’하며, 시장 잠재력에 따라 관심 ‘안’에 들거나 ‘밖’으로 밀려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는 만족스러워하지만, ‘B팀’으로 좌천당하면 당황하고 심란해한다.
또 치명적일 만큼 심각한 문제에도 부딪힌다. 나 역시 해고를 당해본 경험이 있다. 나는 당연히 그것이 부당하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우리의 직업을 예전처럼 알아주지도 않고 시대에 뒤떨어진 일로 여긴다. 자기 일에 대해 큰 자긍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몹시 괴로울 수밖에 없다. 또 한때 번창하던 회사가 시장의 변화로 또는 잘못된 경영 때문에 쇠락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경험하면서 잘 나가던 옛 시절을 회상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비틀거리고 실패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다락방’에서의 시간을 반성하고 계획을 재정비하며 깨닫는 시간으로 활용하느냐 하는 점이다. 실패는 엄한 스승과 같다. 실패를 겪은 후에 ‘한물 간 퇴물’이 되느냐 ‘노련한 베테랑’이 되느냐 하는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 핵심과 만나라: 전나무가 그랬듯이 우리는 모두 빛나는 삶을 갈망한다. 하지만 피상적인 것에만 의지하거나 화려한 외양에만 마음이 쏠리면, 현상의 핵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향기 좋은 와인을 마시면서도 맛을 음미하기보다는 병 표면의 브랜드를 먼저 보게 되는 것이다. 핵심과 다시 만나려면 당신 자신의 생활과 당신 자신의 삶의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당신이 현재 갖고 있는 것들의 의미를 제대로 음미할 줄 아는가? 침착하게 내면을 응시하며 삶의 소박한 순간을 즐길 줄 아는가? 창조적인 활동에 열정적으로 몰두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가엾은 전나무보다 훨씬 더 커다란 삶의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피상적인 삶과 핵심에 연결되는 삶의 차이는 무척 중요하다. 전나무는 항상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거나, 옛날 일을 회상하고 있다. 또 늘 뭔가를 걱정하기 때문에 삶의 소박한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화려한 크리스마스 이브도 즐기지 못한다.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지 못한 전나무가 마지막 순간에 내쉬는 한숨은 한없이 슬프게만 들린다. 우리는 전나무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것, 불만을 느끼게 하는 많은 원인들에 우리의 집중력과 에너지를 허비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현재의 삶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대상에 자신을 투신해야 한다. 그러면 마지막 순간에 깊은 만족감이 배인 한숨을, 진정으로 “삶을 살았다”는 깨달음의 한숨을 내쉴 수 있게 되리라.
숲 속의 나이팅게일은 삶을 즐긴다. 이 이야기는, 매력적인 나이팅게일과 골목대장 같은 황제, 자만심 강한 궁정 악장, 허둥대는 시종들 등의 다채로운 배역진을 등장시켜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1. 당신은 자신의 일에서 무엇을 중요시하는가? 이 질문은 자신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당신은 진정한 힘보다 높은 직위나 전문적 권한을 존중하는가? 감정보다는 이성을, 직관보다는 객관적인 자료를 중시하는가? 뜻밖의 찬란한 성취보다는 미리 예측이 가능한 성과 쪽을 선호하는가?
2. 무엇이 당신을 목청껏 노래하게 하는가? 이는 동기 부여에 관한 질문이다.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황금과 직책, 박수갈채 등에 유혹 받는다. 따라서 황제는 하사품이나 황금 덧신, 직책 따위를 내린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힘을 자연이나 의미, 친교, 자유 등에서 이끌어낸다. 이들은 모두 황제의 통제 밖에 있는 것들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직장생활에서 일어나는 주요 갈등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줄거리
중국 황제의 궁전은 가장 부서지기 쉬운 자기로 만들어졌고 정원에는 작은 종들을 매단 희한한 꽃들이 있다. 황제의 궁전은 모든 것이 정교하게 정돈되어 있다. 황제의 숲에는 나이팅게일이 살고 있는데, 너무도 황홀하게 노래를 불러 삶에 지친 일꾼들을 감동시킨다. 방문객들은 멋진 궁궐과 정원, 그리고 나이팅게일에 대해 ?
안데르센 탄생 200주년(1805. 4. 2 생)을 맞이하여 그의 고전 작품 속에 담긴 강력한 교훈을 현대의 일터에 탁월하게 적용한 책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꼭~ 읽어보시길...
ⓒ 개구리운동장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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