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위험을 대충 계산하는가?
심리학자가 밝히는 숫자와 통계의 함정
최근 연달아 두 건의 스캔들이 터졌다.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과 차영 전 민주통합당 대변인의 ‘친자 확인 소송’ 사건과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의혹’. 이 두 사건의 진위를 밝혀줄 것은 무엇일까? 바로 유전자 검사다. 현대에는 DNA 지문을 활용한 유전자 검사가 친자 관계를 밝혀주는 데 거의 확실한 수단이 되었다. 또한 친자 확인뿐만 아니라 성범죄, 살인 사건 등 많은 부분에서 유전자 검사를 신뢰한다. 그렇다면 유전자 검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저자 게르트 기거렌처는 1980년대 중반이 돼서야 DNA 지문이 친자 여부를 확인하는 데 쓸 수 있을 만큼 신뢰도가 높은 방법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DNA 지문이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범죄 사례에 적용했을 때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나의 DNA가 범죄 현장의 DNA 흔적과 일치한다?
상황을 가정해보자. 당신은 살인죄로 기소돼 법정에 출두했다. 당신의 DNA가 희생자에게서 찾아낸 DNA 흔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치가 우연히 일어날 확률은 10만 분의 1입니다.” 이 증언만 듣고도 당신은 곧 감옥에 가게 되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전문가가 똑같은 정보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면 어떨까? “10만 명 중에 1명꼴로 DNA 일치가 관찰됩니다.” 이 설명대로라면, 꽤 많은 사람이 살인자로 의심받을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성인 인구 100만 명이 사는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피해자에게서 발견된 DNA 표본과 일치하는 사람이 이 도시에 10명 정도 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이제 DNA ‘일치’라는 증거는 당신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되기 어려워진다. 이렇듯 숫자를 말하는 방식을 바꾸면 진실이 보인다. 기거렌처는 “기술에는 심리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대단한 기술이라고 해도 그것이 품은 불확실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착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술될 경우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계의 거장이자 ‘올바른 선택’에 관해 꾸준히 연구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위험과 불확실성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밝히고 그 해결책을 내놓는다.
죽음과 세금 말고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총 3Part로 나뉜 이 책은 먼저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죽음과 세금 말고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인용하며 세상의 불확실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HIV 양성 반응 후 에이즈 환자들과 콘돔 없이 섹스를 했는데 몇 달 후에야 첫 검사 결과가 위양성이었음이 밝혀진 20대, 자신의 환자에게는 유방촬영술을 권하지만 직접 받겠냐는 질문에는 ‘No’라고 답하는 부인과 전문의, 흡연의 위험성이 확실시 된 후에도 온갖 재력을 쏟아부터 수십 년 동안 대중을 속여온 거대한 산업 단체, 독일 정부 고위층의 “독인은 광우병 청정 지역입니다.”라는 말이 얼마나 근거 없이 만들어지고 재생산되었는지…. 저자가 늘어놓은 실례들은 말 ‘그대로 피부에 와 닿는다’. 내가 가지고 있던 확실성에 대한 환상, 위험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고 그런 착각을 부추기는 너무나 거대한 집단들에 대한 공포가 세상의 불확실성에 대한 자각을 불러온다.
그녀는 반드시 양쪽 가슴을 절제해야만 했을까?
Part2에서는 앞서 던진 질문에 대해 ‘확실한 것은 없다’고 자답한다. 그리고 유방암 검진, 에이즈, 폭력, 재판, DNA 지문,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 등에 대해 하나하나 깊이 있게 논의한다. 특히 챕터5에서는 최근 안젤리나 졸리의 유방절제술로 세간의 화제가 된 유방암 검진, 고위험군, 유방절제술 등에 대해 다룬다. 10명 중 1명은 유방암에 걸린다는 대중화된 문장에 우리가 얼마나 쓸데없는 공포를 느껴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유방 검진의 불확실성에 대해 ‘까발린다’. 실제로 60여 명의 의료관계자들이 모여 토론하는 장소에서 ‘(만약 남성이라면 여성이라 가정하고)유방촬영술을 받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부인과 전문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단 한 명도 YES라고 하지 않았다는 일화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챕터 9와 10에서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전문가들, 검사, 판사, 변호사 등이 어떻게 숫자를 착각하고, 그 착각이 죄 없는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고 또 진짜 범죄자를 얼마나 쉽게 풀려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러한 상황은 그들이 언제나 들이미는 ‘수치’ ‘숫자’ ‘통계’ ‘확률’ 등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기껏해야 17세기 중반에 등장한 확률 이론은 진화적으로 우리에게 맞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류 시작부터 우리에게 익숙했던 ‘자연 빈도’를 사용할 것을 권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쉽고 직관적으로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지 증명한다.
계산맹을 속일 기회란 무궁무진하다
Part3에서는 계산맹 상태가 어떻게 악용되는지, 숫자를 읽을 줄 아는 몇몇이 그렇지 않은 우리를 얼마나 쉽게 속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연구비 획득을 위해 의도적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숫자를 사용하는 연구자들, 손실을 이익처럼 보이게 보도자료를 만드는 법, 사회적 불안을 불러일으켜 돈을 버는 법 등. 계산맹의 수는 어마어마하며, 이들을 속일 기회란 무궁무진하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서 개안해서 누군가를 속여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속아왔는지를 명백히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는가!
하지만 이 책은 ‘내가 바보였구나’ 하는 상실감만 남기고 끝내지 않는다. 저자는 실제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1~2시간 동안 표현 방법을 바꾸는 방식(확률에서 자연 빈도로)을 알려주고,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을 테스트해보았다. 그 결과는 정말 놀라운데, 겨우 10퍼센트 정도였던 정답률이 90퍼센트로 올라갔다. 이렇듯 그가 지적한 위험들에 비해 해결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고 실행하기 쉽다. 단지 어려운 표현 방법을 버리고 마음이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방식으로 바꾸면 된다. 그러면 도처에 산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거장의 탁월함뿐만 아니라 신진 학자의 아이디어를 겸비한 이 책은 책 한 권을 읽는 수고만으로 평생을 바꿔놓을 가치 있는 변화를 선물한다. 스스로를 신뢰하지만 숫자에 약하다고 생각한다면, 합리적이라 생각했지만 잘못된 판단을 한 적이 있다면, 잘못된 소통으로 피해를 본 적이 있다면, 의사나 검사 전문직 종사자라면, 아니 전문가가 아닌 그 누구라도,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받은 적이 있다면 꼭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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