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안에 있는 철학자가 세상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일찍이 사르트르나 마르크스가 발휘했던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 지적에 위화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실무를 다루며 매일매일 생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바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다. (……) 지금까지 인류가 반복해 온 비극을 우리는 또다시 되풀이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지불한 비싼 수업료의 값어치를 살려 더욱 높은 수준의 지성을 발휘하는 인류, 이른바 새로운 유형의 인류로 살아갈 것인가?
<프롤로그_교양이 없는 전문가보다 위험한 존재는 없다>, pp.16~17
이솝우화에 「여우와 신 포도」 이야기가 있다. 여우가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발견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손이 닿지 않았다. 결국 여우는 “이 포도는 엄청 신 게 분명해. 이런 걸 누가 먹겠어!”라며 가 버린다. 이는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사람의 전형적인 반응을 보여 준다. 여우는 손이 닿지 않는 포도에 대한 분한 마음을 ‘저 포도는 엄청 시다’라고 생각을 바꿈으로써 해소한다. 니체는 바로 이 점을 문제 삼아 우리가 갖고 있는 본래의 인식 능력과 판단 능력이 르상티망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01. 타인의 시기심을 관찰하면 비즈니스 기회가 보인다>, pp.50~51
오늘날 조직에서 의견 교환이 기탄없이 오가면 오갈수록 의사 결정의 질이 높아진다는 사실이 수많은 실증 연구에서 밝혀졌는데, 밀은 무려 150년 전에 그 사실을 확신했다.(……) 밀은 『자유론』에서 처형된 소크라테스나 예수가 현재는 위인으로 칭송받고 그들이 남긴 사상이 광범위한 분야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어느 시대의 ‘악’은 시대를 거치며 ‘선’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다시 말해 어떤 아이디어의 옳고 그름은 그 시대의 엘리트가 통제하는 대로 결정되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다면적인 사고를 거쳐 결정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16. 끝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p.137
레빈에 의하면 어떤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정착되어 있는 조직은 ‘행동-혼란-재동결’의 과정을 거쳐 변화한다. 여기서 이 프로세스가 ‘해동’에서 시작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해동이라는 것은 바로 ‘끝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고 할 때 앞으로의 일을 ‘시작’하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쿠르트 레빈의 지적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지금까지의 방식을 잊는 것, 즉 이전 방식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18. 혁신은 새로운 시도가 아닌 과거와의 작별에서 시작한다>, p.151
우리는 항상 이해력이 빠른 아이를 사랑하는 한편,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 아이는 아주 짧은 기간 내에 포기하는 나쁜 습성을 갖고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교육을 위한 비용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사에서의 교육 투자든 사회 자본으로서의 교육 기회든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비용 대비 효과가 더 높은 아이에게 교육 투자를 몰아주는 경향이 있다. 초기의 성적 결과에 따라 잘하는 아이에게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고 그 결과 성적이 더 올라간다. 반면 첫 타석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아이는 점점 더 힘든 여건으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이런 일이 계속되다 보면 세상 물정에 밝은 아이만 조직에 받아들여지게 되고, 어느 정도 능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본질적으로 사물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아이 즉 혁신의 종자가 될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소외시키게 될 가능성이 있다.
<21.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진다>, p.172
주체적으로 최적의 해답을 구하기 위한 논리 사고가 강세인 오늘날에는 ‘무엇이 정답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되어 가는 형편대로 결정하자’는 태도가 ‘포기’로 비칠지도 모른다. 경영 관리 측면에서는 철두철미하게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태도가 미덕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일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쩌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최적의 정답을 스스로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지적 오만이 아닐까? (……) 모든 일이나 상황의 관련성이 복잡해지고 한층 더 역동적으로 변해 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논리적인 톱다운 사고에 의지해 최적의 해결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는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최적의 해답을 최적의 접근법으로 찾으려만 하지 말고 ‘만족할 수 있는 해답’을 휴리스틱으로 추구하는 유연성이 필요한 시대다.
<28.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pp.213~215
우리가 어떤 선택을 무의식적으로, 아무 목적 없이 행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그것을 ‘선택’하고 다른 것은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기호가 생겨난다. 이 거북한 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기호의 지옥에서 살고 있다고 강조했다.
뒤집어 말하면, 무언가 기호성을 갖지 않거나 또는 갖더라도 희박한 상품과 서비스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아실현적 소비는 시장 성장의 최종 단계에서 발현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때 자아실현이 자발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마찬가지로 ‘타자와의 차이’라는 형태로 규정된다면, 그 상품 나름대로 서비스가 어떠한 차이를 규정하는지를 의식하지 않는 이상 성공할 만한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기는 어렵다.
<36. 사람들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다르게 보이기 위해 돈을 쓴다>, p.257
그렇다면 후설의 에포케를 아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에포케는 다양한 내용을 시사해 주는 사고관인데 그중에서도 ‘타자 이해의 어려움’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을 꼽고 싶다. (……)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대화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진다는 점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자신에게 보이는 세상과 상대에게 보이는 세상은 크게 다를 수 있다. 그때 양자가 모두 자신의 세계관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으면 어긋난 차이가 해소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 (……)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은 애초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 세계관을 확신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이른바 어중간한 경과 조치로 일단 잠시 멈춰 보는 중용의 자세가 바로 에포케다. 그러니 이 에포케야말로 지금 이 시대에 더더욱 필요한 지적 태도가 아닐까?
<44. 때로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pp. 30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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