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속도를 늦추어라 에크낫 이스워런 저 박웅희 역 바움 2004년 07월 정가 : 9,800원 페이지 : 337 | 516g
시간에 쫓기는 삶
우리의 현대 문명은 스피드 광을 낳았습니다. 이 광증은 일종의 전염병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병에 걸려 있습니다 : 어떤 보편적 충동에 붙들려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거기 붙들려 있지 않은지 의문을 제기할 생각을 거의 못하며, 어떻게 거기서 풀려날 수 있는지도 묻지 못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불평하지만, 그 불평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조금 다릅니다. 실제로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뜻이니까요. 이상하게도, 시간은 없는데 무언가 더 많이 하려 할 때, 매일 아침 우리가 더 많이 하고자 애쓰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잠입니다. 물론 대개는 전날 밤에 무언가 더 많이 하려다가 잠자리에 늦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랫동안의 경험에서 우리들 대다수에게 깨어 있는 삶을 향한 첫걸음은 속도를 늦추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 느리고 충만한 삶을 설명할 때, 나는 육체적 ? 정신적 ? 지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최상인 삶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랫동안의 경험에서 우리들 대다수에게 깨어 있는 삶을 향한 첫걸음은 속도를 늦추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속도를 늦추고 우리의 주의를 붙듦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우리의 자원과 우리의 사랑을 어디에 바칠지를 결정할 때 매일 현명한 선택을 할 능력을 얻게 됩니다. 깨어 있는 삶이 단순히 나 한 사람의 생활을 고양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 문명을 다시 만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구적 규모의 정글을 진정한 지구촌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지구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기억하는 곳으로 말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이것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는 바로 이것을 평생 찾고 있는 것입니다.
늦추기
일찍 일어나라 :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너무 쉬워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찍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당신에게 일찍 일어날 뿐만 아니라 일어나서 곧장 일에 뛰어들지 말고 맨 먼저 -샤워를 하거나 차를 마신 뒤라도 좋습니다- 30분 동안 명상이나 영적 독서를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우리는 의미심장한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생활의 자연스런 리듬에 따라 밤과 낮 사이, 활동과 휴식 사이에는 썰물과 밀물의 경우처럼 이 둘을 이어주는 시간이 있습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시간입니다. 만약 아침 일찍 고요히 지낼 시간을 따로 떼어놓는다면 당신은 그 시간으로 인해 그날 하루의 활동을 좀더 긴 안목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루를 꽉 채우지 말라 : 정해진 시간 속에 더욱더 많은 것을 채워 넣으려는 욕구가 널리 퍼지고 있으며, 테크놀로지는 그런 압력을 가중시켜 왔을 뿐입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은 중요한 것과 하찮은 것을 분별하도록 돕겠다고 하지만, 어떤 것이 진정으로 중요하고 그것을 평가할 시간을 어떻게 확보할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욱더 많은 정보 속에 빠뜨리기만 할 뿐이지요. 우리의 생활이 워낙 빠르기 때문에, 흔히들 집중시간이 짧은 것을 당연시합니다. 나는 심지어 사람들이 그것이 창의력의 증표나 되는 듯이 집중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자랑하는 소리도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더 짧은 시간 속에 모든 것을 쑤셔 넣으려 애쓰는 태도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때 초래되는 결과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창의적인 사람은 집중시간이 매우 깁니다. 위대한 화가, 음악가, 과학자가 한 주제에 골몰할 때는 몇 분이 아니라 몇 시간, 며칠, 심지어 몇 년 동안 그 문제에 매달려 갈수록 더 깊이 들어갑니다. 집중시간이 길수록 더 짧아지는 이 순환 고리를 깨는 방법은 가능한 일을 다 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속도를 늦추려면 우리가 모든 것을 읽을 수는 없고, 모든 순간을 다 재미있게 보낼 수는 없으며, 매일 우리에게 제공되는 모든 정보를 흡수할 수 없음은 물론 모두 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선택해야만 합니다. 더구나 ‘정보고속도로’가 펼쳐지고 있으니, 앞으로 이런 선택이 더욱 절실해질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따져라 : 나는 명상이 제일 먼저 할 일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자리를 잡고 앉아 꼭 해야 할 일들을 목록으로 작성했습니다. 그런 다음, 붉은 색연필로 반드시 필요하지 않거나 실제로 유익하지 않은 항목들에 하나하나 가위표를 해나갔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이 남았을까요? 매주 수많은 시간이 절약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다소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곧, 그러는 것이 자신을 속박에서 풀어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당신은 자신에게 중요한 일들을 할 시간이 더 많아진 것을 알게 됩니다.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할 시간, 성찰을 위한 시간, 명상을 위한 시간 등 삶을 좀더 가치 있게 만들어줄 시간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 목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의 우선순위를 반영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당신이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런 깨달음에 이르고 나면, 당신은 비로소 ‘나는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 무엇이 중요한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일단 목록에서 활동들을 줄인 다음에는 몇 주간 자신의 판단을 테스트하십시오. 당신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했던 활동을 없애더라도 당신과 세계가 잘 돌아간다는 것과 당신이 선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시간을 조정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관계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라 :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는 인간관계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속 생활에서 대개 제일 먼저 희생되는 것이 이 시간이지요. 식사라는 간단한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많은 문화에서 함께 먹는 것을 신성한 의식으로 여깁니다. 이 단순한 유대가 사회를 결합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혼자 살더라도 정기적으로 친구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도록 계획을 짜십시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식탁에서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애정 어린 교제도 얻습니다. 물론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질적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늦추어라 : 내면에서 늦추는 방법에 대해 몇 마디하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늦추기의 진정한 핵심입니다. 화, 두려움, 걱정, 강박적 갈망 등 부정적 생각들은 대개 빠릅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실제로 그것이 질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 인내, 온유, 동정, 이해 등 긍정적 생각들은 느립니다. 거칠고 급한 시내가 아니라 조용하고 맑고 깊은 대하(大河)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히도, 대다수 사람들은 부정적 사고를 위해 마음을 사용합니다. 남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사실 빠른 마음은 부정적 사고와 동의어요, 사고에 대한 사고와 동의어입니다. 사고에 대한 사고, 우리는 여기에 말려들어 이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우리가 마음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고 그것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해결하기 가장 어려운 문제는 실재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사고의 속도를 늦추면 늦출수록 우리는 더욱더 큰 통제력을 갖게 되고, 우리가 사고에 대한 사고라는 미로에 붙들릴 염려도 줄어듭니다. 느린 마음은 건전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질주하기를 그칠 때 그것은 자연히 분산되지 않고 집중되며, 자연히 무례하지 않고 친절하며, 자연히 이기적이지 않고 다정합니다. 바로 그것이 마음의 역학입니다. 흥분할 원인이 있을 때조차 쉽게 흥분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제력을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직장의 사소한 돌발사태에서 지진 같은 커다란 재난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이 판단력을 잃지 않게 돕습니다. 그들은 위험에서 자신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보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에 한 가지만
일념집중은 당신이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아마 훈련된 마음의 가장 큰 혜택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안정일 것입니다 : 주의는 훈련할 수 있으며, 인생에서 주의를 뜻대로 움직이는 것보다 중요한 기술은 없습니다. 이 기술의 이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만약 마음을 한 번에 한 가지 일에 온전히 집중하도록 훈련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분야에서도 목표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과학이든 예술이든 스포츠든 전문직이든, 집중이야말로 그 모든 분야의 기본 요건입니다. 일념집중(one-pointed attention)은 당신이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아마 훈련된 마음의 가장 큰 혜택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안정일 것입니다. 화를 내려면, 집중이 깨뜨려져야 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노선을 바꾸어야 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주의를 벗나가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당신의 마음이 당신의 뜻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바뀌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마음을 계속 한 노선을 달리도록 통제할 수 있다면, 집중은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주의력의 주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원망이라는 짐을 과거로부터 가져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와 연관된 두려움과 근심걱정을 안고 있습니다. 이 역시 우리가 인간이기에 조건화되는 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우리의 에너지가 미래로 벗어나가는 것을 막고 그것을 철저히 현재 속에 간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수년 동안 주의력 훈련을 거치면 당신은 결국 과거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당신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당신이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백 퍼센트 현재에 삽니다. 이는 당신이 백 퍼센트 살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연스런 집중이야말로 모든 인간관계의 비결입니다. 상대가 면식이 있는 사람이든 직장 동료든 동업자든 친구든 가족이든 상관없습니다. 더구나 특별한 친한 사이가 아닐 때 일념집중은 더욱 중요합니다 : 선가(禪家)에서는, 스승이 말할 때는 잠시도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는 어느 경우에도 타당한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당신에게 말하고 있을 때는 전심을 기울이세요. 두 눈, 두 귀, 정신과 마음의 초점을 말하는 사람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당신의 진심 어린 관심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대화는 마음이 하나로 모이게 훈련하는 기회입니다. 자연스런 집중이야말로 모든 인간관계의 비결입니다. 상대가 면식이 있는 사람이든 직장 동료든 동업자든 친구든 가족이든 상관없습니다. 더구나 특별히 친한 사이가 아닐 때 일념집중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고 반대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창의적이고 가치 있는 일을 할 때 그렇습니다. 우리는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적을 잠재적 협력자로, 모든 비판을 성장의 자양분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반대자를 설복시키기 위해, 곤경을 기회로 바꾸기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부정적 특성을 강점으로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시련들입니다. 집중된 마음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완강한 반대를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도전으로 볼 수 있고, 그러면 인내와 예의와 깊은 신념을 통해 지극히 사나운 적도 설복시킬 수 있습니다.
균형 찾기
분별력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떤 일에 뛰어들어야 할 때와 거기 얽히지 않아야 할 때를 알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에너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에너지로 인하여 벗어나기 어렵고 고통스런, 곤란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상황에 말려들기 쉽습니다 : 우리가 방향을 모르고 있을 때, 최우선적인 목표가 없을 때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를 놓치기 쉽습니다. 더욱이,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을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걷잡을 수 없는 기분에서 각종 활동에 참여하는데, 이럴 때는 경고신호를 보고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게 됩니다. “바쁘게 산다고 다는 아니다. 중요한 건 무엇 때문에 바쁘냐는 것이다.” 유익한 지적입니다. 어떤 활동을 시작할 때와 그만둘 때를 알려면 판단력이, 객관성과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인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분별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분별력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떤 일에 뛰어들어야 할 때와 거기 얽히지 않아야 할 때를 알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에너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에너지로 인하여 벗어나기 어렵고 고통스런, 곤란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상황에 말려들기 쉽습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는 역동적 균형 속에 통제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을 최대한으로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 무기력은 신체적으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다는 느낌이고, 정신적으로는 나태한 마음입니다. 주위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려 해도 마음이 나태하면 아무것도 강렬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에너지가 많은 것은 단점뿐 아니라 장점도 있지만, 무기력은 좋은 점이 전혀 없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것보다는 에너지가 많아서 곤란을 겪는 편이 백 번 천 번 낫습니다. 영어에서 가장 비극적인 말들 가운데 하나가 ‘알게 뭐야(I don't care)'입니다.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포함해 누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알 게 뭐야.” 무기력은 힘이 얼어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힘은 있는 것입니다.
물이 얼었다가 녹고 다시 얼 수 있듯, 우리의 에너지도 활성과 마비 사이에서 비등했다 냉각되기를 거듭합니다. 다행히, 에너지 사이클의 이 국면을 모두 초월한(들뜬 활동성과 굼뜬 무기력을 모두 넘어선) 상태가 존재합니다. 무기력으로 얼어붙은 에너지는 풀릴 수 있으며, 그런 뒤에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역동적 균형 속에 통제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을 최대한으로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활력, 생명력, 에너지와 의지는 모두 개발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활기차고 열성적인 사람을 좋아하지만, 열성적인 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의를 우리가 선택하는 어떤 분야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에너지와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열의가 있더라도 일을 끝까지 마무리할 수 없습니다.
자유 속에 살기
자유로운 삶을 누리려면, 즉 ‘깨어 있는 삶’을 살려면 우리는 우리의 오감을 우리에게 순종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의는 감각을 좇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자신에게서 좋은 음식이나 좋은 오락까지 박탈할 필요는 없고, 유익한 것은 즐기되 뒤에 후회할 방종은 무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 우리는 옷에서 견해까지 어느 것에 대해서도 까다로운 취향을 가질 수 있지만, 취향을 느슨하게 풀기 시작할 가장 실제적인 출발점은 우리의 오감입니다. 맛보고, 냄새 맡고, 보고, 듣고, 만지는 것과 관련한 취향 말입니다. 취향이라는 폭군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먼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할지를 우리의 판단에 따르도록 오감을 훈련해야 합니다. 오감을 훈련한다는 것은 감각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건강이나 안전, 자유를 해칠 만한 것들을 요구하지 않도록 오감을 교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감 훈련에서, 우리는 삶에서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 어떤 것도 상실하지 않습니다.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 오감은 마음과 외부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이며, 이들 감각과 마음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신체가 음식을 소화 흡수하듯 마음은 오감이 받아들인 것을 소화 흡수합니다. 실제로 요가 심리학에서는, 우리는 우리의 오감을 통해 먹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우리 인격의 일부가 됩니다.
사실, 내가 말하는 ‘올바른 오락’은 늦추기에서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와 함께 있을 때면 시간을 내어 영화나 연극을 봅니다. 그리고 극장에 갈 때면 항상 친구들과 함께 가며, 우리는 철저하게 즐깁니다. 친구들과 이런 식으로 오후나 저녁을 즐기는 데는 그리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을 여우 있게 음미할 수 있는 능력뿐입니다.
관계를 위한 시간
현대적인 생활방식에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인간적이고 친밀한 접촉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고속화된 사회는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기회를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살아가면서 숱한 기복을 훌륭히 헤쳐 나가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인간관계를 통해서입니다.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혼자 살든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살든, 우리는 일상에서 인간적인 관계를 도탑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대적인 생활방식이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현대적 생활방식은 우리에게서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기회를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성나 있고 참을성 없는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것은 스모그보다 나쁜 대기 속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숨쉬는 대기의 오염을 우려하지만, 내적 오염도 똑같이 위험합니다 : 사람들과 교제할 때 우리가 그들의 심적 상태에도 관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얼마간의 자기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는 것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성나 있고 참을성 없는 사람 하나가 그 집단 전체를 망쳐놓을 수 있습니다. 성난 사람을 만난 뒤면 우리는 아주 흥분해서 집에 돌아오기 때문에 차분히 앉아 식사를 할 수가 없고, 평안히 잠들 수도 없습니다. 흥분된 사람과 함께 있을 때면, 내적으로 어지간히 안정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흥분을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흥분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우리의 흥분을 표현하고 싶을 때, 침착하고 마음이 고요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은 실수입니다. 우리는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가 세상이 우리에게 저지른 해악을 늘어놓으며 우리는 늘 아무런 잘못이 없었음을 해명합니다. 하지만 도중에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가끔 잘못을 저지른다고, 어쩌면 가끔 우리가 사람들을 화나게 할지 모른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사랑과 이해가 깃들인 눈으로 그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집을 떠날 때면 우리의 흥분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친구의 애정 어린, 참을성 있는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거나 행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상태였습니다. 남을 앞세우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대개 이런 역할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거나 충고하지 않고도 그런 사람들이 발산하는 마음의 평화가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미지를 높여라
만트람은 마음의 속도를 제어하는 효과적인 브레이크입니다. 마음이 화, 근심, 걱정, 탐욕 속에 질주하고 있을 때, 만트람을 사용하면 그 속도를 늦출 수 있습니다. 좋은 브레이크가 안전한 운전에 필수적이듯, 이는 안전한 삶에 필수적인 기술입니다 : 마음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도구는, 인도에서는 ‘만트람(mantram)'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트람을 사용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일깨워 마음의 눈앞에 최고의 자아상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만트람은 마음의 속도를 제어하는 효과적인 브레이크입니다. 마음 이화, 근심, 걱정, 탐욕 속에 질주하고 있을 때, 만트람을 사용하면 그 속도를 늦출 수 있습니다. 좋은 브레이크가 안전한 운전에 필수적이듯, 이는 안전한 삶에 필수적인 기술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만트람이 있고, 대개는 하나 이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도 만트람을 이용할 수 있고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널리 쓰이는 만트람들 가운데 하나인 ‘라마’는 마하트마 간디도 이용했습니다. 라마는 ‘기쁨’이나 ‘기뻐하다’를 뜻하는 낱말에서 온 화신의 이름이며, 따라서 ‘라마, 라마, 라마’하고 외는 것은 마음속의 기쁨의 원천을 부르는 것입니다. 만트람을 하나 가르쳐달라면서 자기는 신을 믿지 않는다거나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장 많이 가르쳐주는 만트람이 이것입니다. 이 만트람은 짧고 리듬감이 좋고 기억하기 쉬우며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들에게 자주 주는 또 다른 만트람은 불교의 ‘옴 마니 팟메 홈’입니다. 마니는 ‘보석’을 뜻하고 팟메는 ‘연(蓮)’을 뜻하니 ‘마음의 연꽃 속에 있는 보석’을 뜻합니다. 이 만트람은 단지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보석인 불성(佛性)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뜻할 뿐입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아베마리아’라는 간결하고 아름다운 만트람이 있습니다. 거룩한 어머니로서의 신을 부르는 것입니다. 동방정교에서는 ‘예수의 기도’(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를 가엾게 여기소서. ‘간략하게는 키리에 엘레이손‘)’의 여러 가지 이형(異形)들이 수세기 동안 만트람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종파에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라는 이름 그 자체가 가장 오래된 만트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에서는 ‘알라’라는 이름 자체가 만트람입니다. 가장 널리 쓰이는 만트람들 가운데 하나는 ‘신은 위대하시다’를 뜻하는 ‘알라후 아크바르’입니다. 유대교에는 ‘우리를 축복하소서, 주님’을 뜻하는 ‘바루크 아타 아도나이’나, 하시드파가 만트람으로 사용하는 ‘우주의 주’라는 뜻의 ‘리보노 셸 오람’이 있습니다.
만트람은 신중하게 선택하십시오. 마음에 들되 불유쾌한 연상을 일으키지 않는 만트람이어야 합니다. 일단 하나의 만트람을 택했으면 그 만트람에 충실하십시오. 잠시 이 만트람을 써보았다가 다음에는 다른 걸로 바꾸지 마세요. 그런 사람은 우물을 파려고 이곳저곳에 계속 구덩이를 파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아무리 파도 물을 찾지 못하지요. 물론 주의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만트람을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는 주의를 온전히 그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런 때는 분명 만트람을 욀 시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루 중에는 마음이 한 가지 일에 열중하고 있지 않을 때가 아주아주 많으며, 그런 때가 바로 해묵은 강박적인 습관(걱정, 분노, 불안, 뒷공론, 옛날 테이프를 다시 트는 것 등)에 사로잡히기 쉬운 때입니다. 바로 이런 때 만트람을 외어야 합니다. 만트람은 일에 쫓기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세계에서 평정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내가 권하는 필수불가결한 도구입니다.
오랜 명상을 거쳐 내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은 끝이 없었습니다. 나는 생명 전체와 백만 가지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위대함입니다. 이를 깨달을 때 우리는 모든 고통을 초월합니다 : 나는 아침 명상을 마칠 때마다 명상이 우리의 삶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무한히 풍부하게 만들어줄 수 있음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명상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명상을 배워야 합니다. 평온하고 애정 깊은 마음을 바라는 사람은,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명상을 배워야 합니다. 명상의 가장 큰 혜택 가운데 하나는 부적절감(a feeling of inadequacy)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내게는 놀라운 일이지만, 나는 오늘날 내가 어디에든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또 우울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중요한 의무를 많이 지고 있고 매일 많은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지만, 명상을 통해 내 의식의 깊은 곳에 들어가 그날 부닥칠 어떤 난제도 해결할 수 있는 자원을 건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상태에 도달할 때, 고대 인도의 명상의 큰 스승이 조용히 설파한 대로 ‘이제 당신은 참된 자아를 만납니다.’
인생을 즐겁게 보내고 있으며 나아가 세상에 좀 기여하기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 뒤에 가서야 나는 내가 자기 능력이 새끼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것에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음을 깨달았습니다. 오랜 명상을 거쳐 내가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사랑도 한계를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지금 나는 내가 늙어 죽을 수밖에 없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나는 모든 사람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바다, 하늘, 산, 강, 숲, 들의 짐승들, 공중의 새들 등 주위의 모든 것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고요한 중심
마음이 고요하면 단편적이거나 기만적인 어떤 생각도 자라지 못합니다. 어떤 이기적 충동도, 어떤 원한도, 어떤 적대감도 자라지 못합니다. 이 경지에 확고히 오른 모든 사람이 직접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태어난 목적인 무한한 기쁨이요 무한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혔을 때, 그것은 마치 고산에서 수목 한계선을 넘은 것과 같습니다. 등반가들은 어떤 고도 위에서는 아무런 나무도 자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시, 과학, 음악 등의 분야에서 나온 위대한 천재들은 이 마음의 고요함을 여러 차례 체험했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앎의 최고 형태는 신비사상(the mystical)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이 고요함을 잠깐밖에 보지 못한 반면, 이 경지에 확고히 오른 신의 사람들은 이를 항상 봅니다. 그들은 어딜 가든 이 안온한 고요함을 조금 가져갑니다.
13세기 서양의 신비가 마크데부르크 메흐틸트는 평안한 마음과 사랑이 가득한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무한한 혜택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이론도, 형이상학도 아니고 실제 체험의 기록입니다. “하느님이 내게 가르쳐주신 천상의 것들에 대해 나는 조금밖에 말하지 못해요. / 겨우 꿀벌 한 마리가 넘치는 단지에서 발로 덜어 가져갈 수 있는 양. / 첫째 합창대에는 모든 선물 중에 으뜸인 행복이 있습니다. / 둘째에는 은유. / 셋째에는 자애. / 넷째에는 상냥함. / 다섯째에는 즐거움. / 여섯째에는 고결한 휴식. / 일곱째에는 재부. / 여덟째에는 공덕. / 아홉째에는 열렬한 사랑.” 이 시에서 나는 특히 ‘고결한 휴식(honorable rest)'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이는 전력을 다해 삶에 기여하면서 중심은 쉬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고요할 때 당신은 열심히 일하고 나날의 생활에 적극적이면서도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사욕(私慾)에 떠밀려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간디가 비이기적인 대의를 위해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한 주에 7일, 하루 열 다섯 시간씩 일하고도 전혀 지치지 않은 비결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항상 쉬고 있습니다.”
마음이 어느 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는 내면의 ‘고요하고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명상은 마음의 요란한 소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오래오래 흐른 뒤 이 소음이 깨끗이 사라졌을 때 우리 내부에 항상 흐르고 있던, 모든 것을 어루만지는 침묵의 소리를 들으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우리 마음을 원하면 언제든지 쉬게 할 수 있을 때, 원하면 언제든지 고요하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인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갈등과 분열과 끊임없는 변화만 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왜곡된 거울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세계를 화, 두려움, 탐욕, 정욕, 욕심 등 인간 조건의 일부인 그 모든 부정적 감정이 뿌옇게 낀 마음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할 때, 당신과 나는 산과 바다, 숲과 강, 들짐승과 날짐승, 나무와 풀, 모든 민족들, 모든 인종들, 모든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하나인 것을 압니다. 내면이 고요한 가운데 한번 이를 알고 나면, 당신은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이 영적 깨달음의 정상에서 돌아올 때는 모두를 위해 사용하고 싶은 실제적 지혜와 열렬한 사랑과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로 충만할 것입니다.
<효율적인 삶을 위한 8단계 프로그램>
8단계 프로그램을 매일 성심성의껏 실천하면 내가 직접 체험한 바로 증명할 수 있거니와, 누구나 안정되고 이타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를 조금만 실천해도 당신은 삶을 바꾸어 당신 자신과 주의 세계에 아주 유익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살아오면서 이용한 효율적인 삶을 위한 8단계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늦추기 - 하루 종일 서두르지 않으려면, 하루를 일찍 시작하십시오. 매일 아침 30분을 명상이나 영적 독서에 할애하세요. 시간을 충분히 갖고 기분 좋은 아침식사를 하세요. 하루를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애쓰지 않도록 생활을 단순화하십시오. 우선 당신이 하는 일들을 목록에 기록하세요. 그런 다음 목록을 줄이세요. 진정으로 필요하거나 유익하지 않은 것을 모두 삭제하라는 것입니다. 인내심을 기르세요. 함께 사는 사람들이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몰아대지 마세요. 그들에게 시간을 주세요. 그건 당신 자신에게도 시간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매사에 인간관계를 함양하세요. 갈수록 직접적인 접촉이 사라지고 있는 경향을 뒤집는 데 도움이 됩니다.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줄이세요. 느림을 나태와 혼동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태는 부주의와 미루는 버릇과 전반적인 비능률을 낳습니다. 세부적인 것들에 세심한 정성을 기울이세요. 제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세요.
2. 주의 집중 - 한 번에 둘 이상의 일을 할 때 당신은 마음에게 흩어지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 집중과는 정반대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마음이 분열되도록 훈련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마음에게 흔들리도록,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히도록, 문제들을 안고 낑낑거리도록, 강박이나 충동에 따라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때가 그런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읽으면서 동시에 먹을 때 마음의 일부는 읽는 데 가 있고 일부는 먹는 데 가 있습니다. 이런 때는 어느 활동에서도 최상의 것을 얻지 못합니다. 다음과 같은 붓다의 가르침을 명심하세요. ‘걷고 있을 때는 걸어라.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어라. 갈팡질팡하지 말라.’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은 당신의 온전한 주의를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단지 부분적인 주의를 받을 가치밖에 없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진정으로 할 가치가 있는지 자문하세요. 어떤 활동이 사소해 보이더라도, 당신은 마음을 훈련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3. 감각 기르기 - 음식, 책과 잡지, 영화, 텔레비전 프로를 두고 우리는 모두 까다로운 취향이라는 독재에 휘둘립니다. 이런 조건화된 태도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면, 당신의 취향을 속여넘기세요. 그러는 것이 주위 사람들(혹은 당신 자신)을 위하는 길일 때는 그렇게 하세요. 당신의 견해들도 속여넘기세요. 당신이 자신의 견해에 대해 완고하거나 감정적일 때는 특히 그렇게 하세요.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견해는, 실은 다른 사람들의 견해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을지 모릅니다. 먹을 것을 선택할 때는 맛보다 몸에 좋은 것을 선택하세요. 마음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세요. 마음도 오감을 통해 먹습니다. 읽을 것과 볼 것과 들을 것을 아주 신중하게 선택하세요. 그것이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를 높일지 낮출지를 따져보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곧 우리임을 잊지 마세요. 당신의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 당신 자신의 일부가 됩니다.
4. 남을 먼저 생각하기 - 자기에게 골몰하는 것은 당신과 남들 사이에 벽을 쌓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에 앞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생각하세요. 이는 우선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과는 사랑과 존중의 토대가 이미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한 방법들을 즐겁게 찾아보세요. 예를 들어, 식사를 할 때 다른 사람이 당신 것까지 주문하게 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보고 싶어하는 영화를 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어떤 관계에서도 경쟁하지 마세요. 반대로 서로를 완성하는 길을 찾으세요. 의견 차이가 생기면, 반드시 반대할 만해서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여유를 갖고 전심을 기울이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들어보세요. 반대하는 이유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크지 않을지 모릅니다.
5. 영적 교재 - 함께 있으면 당신이 향상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만드십시오. 동일한 영적 가치에 삶의 토대를 두고 있는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만날 때 특히 도움이 됩니다. 오락을 즐기는 시간을 그런 사람들과 함께 보내세요. 오락도 늦추기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6. 영적 독서 - 대중매체가 우리에게 심어주는 인간상은 워낙 저차원적이므로, 우리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보다 높은 인간상을 일깨워주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내가 매일 30분 정도 할애해 성구(聖句)나 종교에 상관없이 위대한 신비가들의 글을 읽으라고 권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저녁 명상 후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 특히 좋은 시간입니다. 잠들면서 하는 생각이 그날 밤 내내 당신과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7. 만트람 외기 - 만트람, 즉 ‘성스러운 이름’은 속으로 조용히 반복하면 의식을 바꿔주는 힘이 있는 강력한 영적 글귀입니다. 만트람 외우기는 단지 수행의 문제일 뿐입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만트람을 소리 없이 외세요. 걸을 때, 기다릴 때, 설거지 등 기계적인 허드렛일을 할 때, 특히 잠자리에 누웠을 때가 그런 때입니다. 한번 해보면 그것이 무심한 되풀이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트람은 긴장이 풀려 있으면서도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마음이 동요되었을 때는 되도록 밖으로 나가 빠르게 걸으면서 속으로 만트람을 외세요. 걸음걸이 리듬이 호흡 리듬과 결합하여 마음의 리듬을 안정시켜줄 것입니다.
8. 명상 - 이것이야말로 내 프로그램의 핵심입니다. 매일 아침 되도록 이른 시간에 30분 동안 명상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더 늘리지 마세요. 더 오래 하고 싶다면 밤에도, 특히 하루를 다 마쳤을 때 30분 동안 하세요. 등을 똑바로 받쳐주는 의자에 앉거나 머리와 목과 척추가 똑바로 선 자세로 마루에 앉으세요. 그런 다음 두 눈을 감고 명상의 글을 속으로 천천히 되새기세요. 연결되어 일어나는 어떤 사념도 좇지 말고 명상문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마세요. 낱말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면 의미는 자연히 스며듭니다. 명상을 하려면 긍정적이고, 실제적이며, 감화를 주는 글을 아주 다양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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