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회사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P사장님께서 문자 메시지로 암호와 같은 내용을 저에게 보내셨습니다.
P사장님께서 직접 보내신 문제 메시지를 받은 적도 처음이지만, 내용 또한 일상적이지 않아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습니다.
문자 내용은 시조와 같이 한 개의 기호라도 더 빼서는 안될 정도의 극히 절제된 단어로 작성되어 있었습니다.
'X월Y일 XYZ CC 서코스 07:30 티업'
저는 직감적으로 내용은 골프 예약일정을 보내주신 것으로 알아봤습니다. '일정으로 보면 바로 이번 주 토요일인데, 오늘은 목요일. 참석자 한 분이 사정이 생긴 것이구나.'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생각이 한꺼번에 스쳐갔습니다. 사장님과 함께 6시간을 지낼 수 있는 기회는 쉽지 않은데, 이처럼 직접 문자로 초청해 주신 것은 참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잠깐 망설였지만, 비서실에 사실 여부나 사장님의 일정을 확인할 필요없이 '회신'을 눌러 답장을 드렸습니다.
'사장님, 좋은 기회 감사합니다. 열심히 준비해서 그날 뵙겠습니다. @김형래 팀장 올림'
만일 사장님께서 내 문자를 보시고 또 다시 답장을 보내시면서 '자네에게 잘못갔군'하면 실수로 보내신 것이고, 'OK' 정도의 답변이라면 잘 전달된 것을 확인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2번으로 답변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2번도 답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1번도 답이 아니었습니다.
사장님께서는 3번으로 답을 주셨습니다. 아무런 답장이 없으셨습니다.
물론 문자에 적힌 그날 토요일, 때 이르게 기상을 하고는 '골프 연습장'에 가서 숏게임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마무리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약속시간 훨씬 전 골프장 클럽하우스에 도착했습니다. 데스크에서 사장님 시간을 재확인하면서 문자가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약도 분명되어 있었습니다.
운동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와 클럽하우스 로비에서 경건하게 입구를 향해 정자세를 취하려 할 때, 사장님께서 보스턴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리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며 가방을 받았습니다. 평소대로 가방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연습은 많이 하셨나?"
하시며 사장님께서도 밝은 얼굴로 저를 대해 주셨습니다. 제 뒤로 허겁지겁 A전무이 따라 나오며 사장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는 A전무의 표정이 어색해보였습니다. 사장님께서 락커룸으로 들어가신 후 A본부장은 저에게 의야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김팀장이 어떻게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어?"
저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보여드렸습니다. 사장님과 주고 받은 문자메시지가 답을 대신했습니다. A전무는 내 추측과 일치하는 답을 주었다.
'B부장과 함께 약속이 되었었는데 그 밑에 당신이 나타난거야.'
어리둥절한 상황이었지만, 칼을 갈아 오늘을 기다린 저에게는 아주 좋은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P사장님, A전무, 손님으로 모신 C언론사 사장님 그리고 저와 함께 즐거운 운동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날따라 저의 스윙은 가벼웠고 80대를 기록하면서 3등으로 경기가 끝났습니다. 운동이 끝나고 신도 부러워 한다는 '삼락(三樂)' 중 하나인 사우나를 P사장님과 함께 탕안에서 벌거벗은 채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자네 부장에게 문자를 넣는다는 것이 내 실수로 자네에게 보낸 것이네. 어쨋거나 자네는 준비가 되어 있더군. 앞으로 종종 같이 자리를 같자구"
잘못 보낸 문자 메시지라는 사실에 저는 놀랐습니다.
"그나저나 자네는 어떻게 언론사와 공동 마케팅할 생각을 했는가?"
그때까지 언론사는 회사의 흠결을 찾아내어 기사화하거나 더 큰 기사는 광고 끼워팔기로 활용하는 부담스런 존재로 겉으로는 밀월관계를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서로 협력할 수 없는 견원지간이었습니다. 매일 오후 5시가 되면 가판대에 나가서 기사를 확인해야하는 것이 홍보실 직원의 숙명이었던 시절입니다. 언론담당 부서장은 상시 대기상태이고 임원은 2차에서라도 눈도장을 찍어야 마무리가 잘 되는 구조였습니다.
홍보실에서는 알리고 싶지 않은 기사를 억제하는 최종 책임이 있다면, 마케팅에서는 긍정적인 기사가 더 실리도록 하는데 책임이 있었습니다. 한 상대를 두고 다른 입장에서 바라보는 상황이었습니다. 정해진 예산을 좀 더 확장적으로 쓰고자 하는 생각에 홍보실을 통해 마케팅으로 관계를 풀어가보자는 제안과 상부상조의 전략으로 언론사를 기사가 아닌 마케팅 영역으로 가져가자는 저의 발상이 '골프 회동'을 통해 시동이 걸린 셈이었습니다.
상당기간 홍보실과 마케팅 그리고 비서실이 협력하여 언론사 C사 사장님과 우리회사 P사장님과의 회동을 기획했는데, 정작 주무부서의 B부장이 아닌 그 밑의 팀장이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운동 중간 중간마다 나는 우리 P사장님과 C사 사장님에게 양사의 협력이 서로 얼마만큼의 이익이 되고 확장적인 가치가 있는지를 해외 사례와 실무적 여망을 담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B부장님도 저만큼 관련된 실무적 내용을 몰랐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었습니다. ECN을 염두에 두고 자체 매매체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모의투자대회를 통해 시스템 기반이 준비될 수 있는 일거양득을 6시간 운동을 통해서 관철시킨 셈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제 골프 실력이 경기 운영에 전혀 문제되지 않을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매일 야근하는 줄 알고 있는데, 언제 골프를 연습한거야?"
P 사장님의 칭찬이었습니다. 제가 골프를 시작한 것은 입사 3년차 1989년입니다. 당시 상사였던 S지점장께서 앞으로 비즈니스 세계에서 꼭 필요한 개인기라며 저를 재촉하셨고 덕분에 남들보다 빨리 시작하고 좀 더 길게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 운동경기를 기회로 C언론과 협력하기로 했고, 양사간 TF팀을 꾸려 준비한 이벤트는 성황리에 끝이났습니다. 물론 양사간의 이벤트 기획과 운영의 총책임은 제가 맡았습니다.
어쨋거나 사내에서 저는 '유력인사의 배경'을 숨기고 있었다는 소문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P사장님께서는 저를 종종 필드로 부르셨습니. 그해 12월 뜻하지 않게 과장급 팀장이던 저는 차장을 거치지 않고 부장으로 고속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모시던 B부장님은 임원으로 승진하셨습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만, 저는 '유력인사의 배경'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준비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준비되었나요? ⓒ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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