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김씨(江陵金氏)
강원도 강릉(江陵)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로 시조는 한국사 최초의 분봉왕이셨던 명주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이다.
시조 김주원은 신라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6세손으로 37대 선덕왕(宣德王)때 각간(角干)으로 시중(侍中 신라 최고 관직)겸 병부령(兵部令 군사 총책임자)을 지냈다. 신라 6만군을 통솔하는 총사령탑으로 그의 권한은 막강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그가 명주왕(溟州王)이 되기까지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덕왕(宣德王)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군신회의에서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추대키로 했다. 그러나 그는 경주(慶州) 북쪽 20리 쯤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신회의가 열리는 날 때마침 내린 폭우로 알천閼川(현 경주시내 하천)을 건너지 못했다. 이에 군신들이 “이는 천명(天命)이라”하여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곧 원성왕(元聖王)이다. 그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끝내 이를 사양하고 모향(母鄕)인 하슬라(何瑟羅, 현 강릉江陵)로 퇴거했다. 그러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더욱 감복, 명주(溟州)일대를 분봉해 다스리도록하며 왕호를 허락한다. 명주((溟州)는 9郡25縣으로 이뤄진 신라 영토중 가장 넓은 지역이다. 아래 그 분봉토역의 내용을 싣는다.
명주(溟州) 9郡25縣 (『三國史記』卷第35 雜志第4 地理2)
☉ 溟州(何瑟羅-河西良 현 江陵) 4領縣
① 旌善縣(현 旌善郡 旌善)
② 栜(촉)隄縣〈혹 棟隄〉(현 旌善郡 東面 추정)
③ 支山縣(현 溟州郡 連谷)
④ 洞山縣(현 襄陽郡 孫陽 추정)
1. 曲城郡(屈火 현 安東 臨河) 1領縣
①緣武縣〈혹 椽武〉(현 靑松郡 安德)
2. 野城郡(也尸忽 현 盈德) 2領縣
① 眞安縣(현 靑松郡 眞寶)
② 積善縣(현 靑松郡 靑松)
3. 有鄰郡(于尸 현 盈德 盈海) 1領縣
① 海阿縣(현 迎日郡 淸河)
4. 蔚珍郡(于珍也 현 蔚珍) 1領縣
① 海曲縣(현 蔚珍郡 近南 추정)
5. 奈城郡(奈生 현 寧越) 3領縣
① 子春縣(현 丹陽郡 永春)
② 白烏縣(현 平昌郡 平昌)
③ 酒泉縣(현 寧越郡 酒泉)
6. 三陟郡(悉直 현 三陟) 4領縣
① 竹嶺縣(현 榮州市 豊基 추정)
② 滿卿縣(현 奉化郡 奉化 추정)
③ 羽谿縣(현 玉溪)
④ 海利縣(현 東海 추정)
7. 守城郡(䢘城 현 杆城) 2領縣
① 童山縣(현 杆城)
② 翼嶺縣(현 襄陽)
8. 高城郡(達忽 현 高城) 2領縣
① 豢猳縣(현 高城)
② 偏嶮縣(현 通川)
9. 金壤郡(休壤 현 通川) 5領縣
① 習谿縣(현 通川郡 歙谷)
② 隄上縣(현 通川郡 碧養)
③ 臨道縣(현 通川郡 臨南)
④ 派川縣(현 安邊郡 沛川)
⑤ 鶴浦縣(현 安邊郡 鶴城)
김주원(金周元)은 명주성(溟州城)을 쌓고 영동일대를 통치했으며 이에 따라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게 됐다. 강릉김씨(江陵金氏)는 신라김씨(新羅金氏) 중 제일 처음 분적한 맏집이 되는 셈이다.
김주원(金周元)은 종기(宗基 元聖王조 시중<侍中>), 헌창(憲昌 憲德王조 시중<侍中>), 신(身 憲德王조 이찬<伊湌>)등 3명의 아들을 두어 신라조에 번성을 누렸다. 이중 둘째인 헌창(憲昌)은 헌덕(憲德)왕때 공주(公州)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일시 전라(全羅)ㆍ충청도(忠淸道)지방을 점령했으나 실패로 자결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가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국정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러나 강릉김씨대종회의 주장은 다르다. 즉 당시 헌덕왕(憲德王)은 조카인 애장왕(哀莊王)과 동생 예명(禮明)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왕실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정권쟁탈전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왕실을 바로잡고 나라와 백성을 편안케 하기위해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는 앞서 애장왕(哀莊王)대 시중(侍中)으로 있다가 외임으로 청주(淸州)도독(경남(慶南)지사), 웅천주(熊川州)도독(충청도(忠淸道)지사)등을 지냈는데 중앙의 시중(侍中)에서 밀려난 데 대한 불만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과는 다르다. 이러한 사실은 현 사학계에서도 재조명돼 새로운 평가가 시도되고 있다. 아무튼 왕권에 도전했던 김헌창(金憲昌)은 거사가 실패하자 자결했고 그의 아들 김범문(金梵文) 또한 북한산(北漢山)에서 재기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맏이인 김종기(金宗基)의 손자 김양(金陽)은 서기 838년 희강(憲德王)왕 때 민애왕(閔哀王)인 김명(金明)이 희강왕(憲德王)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는 패륜을 범하자, 이에 분개, 청해진(靑海鎭 현 莞島)에 군사를 일으켜 경주(慶州)를 공격, 민애왕(閔哀王)을 제거했다. 그리고 김우징(金祐徵)을 신무왕(神武王)으로 세우고 정권을 왕실로 돌려 국정을 바로 잡았다. 이후 김양(金陽)은 각간시중(角干侍中) 겸 병부령(兵部令)에 올랐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강릉김씨를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명문이라고 찬양했다.
현재 강릉김씨는 셋째인 김신(金身)의 후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헌덕왕(憲德王) 2년에 이찬(伊湌)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나 왕실 기강이 문란 하자 이를 거절하고 강릉으로 퇴거, 여생을 보냈다. 그 후 후손들이 번성, 판서공 청풍파 (判書公 淸風派) 부정공파(副正公派)ㆍ옥가파(玉街派)ㆍ평의공파(評義公派)ㆍ상서공파(尙書公派)를 모체로 강릉김씨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고려 초기의 인물로는 대광 김순식(大匡 金順式), 태사삼중대광 김경(太師三重大匡 金景), 내사령 김예(內史令 金乂)등이 돋보인다.
김순식(金順式)은 고려 건국초 명주(溟州)장군으로 끝까지 고려군에 항거하다 왕건(王建)의 설득을 받고 그에게 협력, 후백제 정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벼슬이 대광(大匡)에 오르고 이들은 김수원(金守元)ㆍ김장명(金長命)과 함께 왕건(王建)으로부터 왕(王)씨 성을 하사 받았다. 그러나 김순식(金順式)은 정확히 강릉김씨계열은 아님이 근래 밝혀졌다. 이외 왕건(王建)으로부터 왕(王)씨 성을 하사 받은 이로는 金乂의 경우가 있으나 조선 개국 후 왕(王)씨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20세 지(輊)가 원래 성인 김(金)씨로 귀성했다.
강릉김씨는 김주원(金周元)의 6세손 김식희(金式希 고려개부의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 高麗開府義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太師)로 고려에 귀부후 명주(溟州)지부를 다스리며 후손이 세거해왔다. 강릉김씨는 고려 선(宣)ㆍ헌(獻)ㆍ숙(肅)ㆍ예(睿)ㆍ인(仁)ㆍ의종(毅宗) 등 6조에 걸쳐 <삼대팔시랑(三代八侍郞)평장사>를 배출, 융성기를 맞았다. 선종(宣宗)대의 명신 김상기(金上琦)와 그의 조카 김작여(金綽與)와 김우(金祐), 김상기(金上琦)의 아들 김인존(金仁存 태사문하시중)과 김고(金沽)형제, 김인존(金仁存)의 아들 영석(永錫)ㆍ영윤(永胤)ㆍ영관(永寬)등 3형제가 각각 시랑평장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김인존(金仁存)은 고려조에 강릉김씨를 대표하는 문무 겸비의 명신이었다. 한때 판서북면병마사(判西北面兵馬使)로 거란군(契丹軍)을 압록강까지 격퇴시키는데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문장과 학식이 뛰어나 당대의 석학으로 중요한 국사를 논할 때마다 반드시 왕(王)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한다. 왕명으로 음양서적인 ‘해동비록(海東秘錄)’, ‘시정요책(時政要策)’등을 찬(撰)했다. 그의 아들 영석(永錫)또한 당대의 석학으로 송(宋)나라 및 신라의 의서를 국민들이 보기 쉽게 편찬한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을 남겼다. 이 밖의 고려조의 인물로는 공민왕(恭愍王)때 동북면(東北面 咸鏡道)병마부사로 쌍성(雙城) 총관부를 공격 원(元)의 지배아래 있던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명신 김원봉(金元鳳)ㆍ김양남(金揚南 두문동(杜門洞 72인)등이 있다.
강릉김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백3명을 냈다. 신라ㆍ고려 조에 비해서는 다소 기세가 꺾인 느낌이다. 조선 초기에는 김반(金伴 세종조 大司成), 김종(金悰 世祖조 大司成), 김순명(金順命 宣祖조 양관(兩館)대제학), 김세행(김세행 顯宗조 대사간-대사헌)등 석학을 냈을 뿐이다. 김반(金伴)은 성균관(成均館)에 40여년 간 재직, 세종때 수 차례나 대사성(大司成)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던 분이다. 김구(金鉤)ㆍ김말(金末)등과 함께 <조선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기도 했다. 만년에 강서(江西)에 은거후 세상을 떠났다.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은 조선 초기인 1445년 수양(首陽)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그의 패륜과에 통분, 끝까지 세조(世祖)에 저항하고 절의를 지켰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매운 절개와 고고한 지성,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그는 강릉김씨의 정신적인 지주다. 3세에 이미 시(詩)에 능했고 5세때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통달, 신동(神童)으로 이름났다. 이런 천재적재능이 온 세상에 알려지자 세종(世宗)대왕은 승정원(承政院)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을 시켜 시험해 보도록 분부를 내렸다. 이에 박이창(朴以昌)은 “동자지학 백학무 청송지말(童子之學 白鶴舞 靑松之末 동자의 배움은 백학이 청송 끝에서 춤추는 것과 같도다”) 라는 글귀로 그 댓구(대구(對句)를 재촉했다. 이에 김시습(金時習)은 서슴지 않고 “성왕지덕 황룡번 벽해지중(聖王之德 黃龍飜 碧海之中 성주의 덕을 비유하건데 황룡이 벽해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도다”)로 화답했다. 이때 시습(時習)의 나이 겨우 다섯 살로 비범한 문재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世宗)은 크게 경탄, 장차 요직에 등용할 것을 약속하고 명주 50필을 하사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신동김오세(神童金五歲)’라 불렀다. 후일 그가 은거하던 설악산(雪嶽山)의 암자도 이런 연유로 ‘오세암(五歲庵)’이라 명명되었다. 5~15세까지 성균관(成均館) 대사성 김반(金伴)과 개국이래 사범지종(師範之宗)이라 불리었던 윤상(尹祥)의 문하에서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예서(禮書)’‘제자백가(諸子百家)’ 등을 배웠다. 그후 나이 스물 한 살 때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던 시습(時習)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통분,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삼촌이 조카를 죽이는 역리(逆理)의 시대>에 대한 저항이었다. “사청환우우환청 천도유연황세정 예아변시환훼아 도명각자위구명(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譽我便是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잠깐 개는가 하면 곧 비가 내리고 다시개네, 하늘도 이 같거니 세상 인심이야 어이하랴, 나를 기리는가 하면 돌아서서 헐뜯네, 이를 숨기고 사는 것이 명예를 찾음일세)……” (『梅月堂集』卷4「乍晴乍雨(사청사우)」) 시습(時習)은 그의 유시(遺詩)처럼 갰다 곧 비내리는 변덕스럽고 어지러운 세상에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영원한 야인으로 살았다. 경주 금오산(金鰲山)에 은거. 자조적인 자화상을 그려놓고 ‘진흙구덩이에 얼굴을 쳐박아야 마땅한 놈’이라고 자학하면서 광기와 독설로 울분을 삭았다.
이 같은 김시습의 기행(奇行)을 함석헌(咸錫憲)씨는 그의 저서 ‘성서적(聖書的)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시습(時習)이 21세의 청년으로 삼각산(三角山)중에서 독서하고 있더니 변보(變報)를 듣고 통곡한 후 책을 불사르고 발광하여 승려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명산(名山), 사찰 등에서 보내며 시대에 대한 울분을 풀었다. 산사(山寺)에서 승배(僧輩)들과 무료(無聊)를 풀기도 했으며 취한 몸으로 하수구에 절벅거리기도 했다. 그렇듯 그는 일개의 광승(狂僧)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단순한 광인(狂人)이상의 것이 있었다. 항상 비분강개하여 지축을 끼고 냇가에 앉아서 글을 지어 물에 띄어 보내고는 울기도 했고 농부의 목상(木像)을 만들어 안상(案上)에 벌려 놓고 종일 들여다보다가 통곡하기도 했다 또 곡식을 심어 그것이 자란즉 하루아침에 낫을 휘둘러 베어버리고 방성대곡했으며 관리의 비행을 보고는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하고 부르짖으며 호곡(呼哭)하기를 마지아니하였다는 것을 들으면 그의 가슴속을 가히 헤어릴 수 가 있다. 그의 미침은 의(義)로써 미친 것이었다. 그 가슴의 아픔이 너무 도를 지났기 때문에 미침이요 정상인으로 살기에는 그 사회가 너무 부끄러워서 미친 것이다. 어떤 때 세조(世祖)가 법회(法會)를 모으매 그도 뽑히었더니 새벽에 문득 거처(去處)를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찾게 하니 길가 거름웅덩이에 빠져 얼굴 만을 겨우 내놓고 있었다. 세상을 부끄러워함이 이러하였다. 그는 실로 세조(世祖)와 그의 사업에 향하여 유령과 같이 음울한 냉소를 보내는 이었다.” 이렇듯 시습(時習)은 숱한 기행과 일화를 남겼다. 성종(成宗)2년 그의 나이 37세 되던 해 봄, 그는 왕의 부름을 받고 금오산(金鰲山)을 떠나 서울로 왔다. 20년 가까운 오랜 세월을 두고 방황하던 그가 서울에 와 보니 젊어서 친했던 서거정(徐居正)은 예문과 대제학을 지내고 있었고 정창손(鄭昌孫)은 영의정, 김수온(金守溫)은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활약하고 있었다. 이중 정창손(鄭昌孫)은 성삼문(成三問)등이 단종(端宗)복위를 도모할 당시 사위 김질(金瓆)과 함께 이 사실을 세조에게 고해 바쳐 사육신(死六臣)사건의 참화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이 공으로 그는 영의정에 올라 영화를 누렸다. 이 때문에 시습(時習)은 그에 대해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 어느날 정창손(鄭昌孫)이 초헌을 타고 입궐하는 것을 보고 ‘야! 정(鄭)가 도둑놈아 아직도 살아있느냐!’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러자 정찬손(鄭昌孫)은 시습(時習)의 기개에 눌려 못 들은 체 하고 그냥 지나쳤다 한다. 일국의 영상을 감히 ‘도둑놈’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닥칠 화가 두려워 이때부터 누구도 시습(時習)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당대의 문장이었던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만이 의리를 지켰을 뿐이다. 성종(成宗)13년 48세 되던 해, 조정에서 ‘윤씨(尹氏) 폐비문제’를 둘러싸고 암투를 벌이자 이를 보다 못해 다시 괴나리 봇짐을 꾸렸다. 다시 시작된 유랑과 방황의 생활 10년. 마침내 성종(成宗)24년 2월 충청도(忠淸道)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숨을 거두니 이때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행한 천재였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의 세계를 문학에서 찾았다. 금오산(金鰲山)에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할 당시 국문학 사상 불의 명작인 ‘금오신화(金鰲新話)’와 ‘매월당집(梅月堂集)’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유교적 성리를 근거로 하여 불교사상의 중핵적인 율벌을 체득함으로써 유ㆍ불혼합일치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국적 규격과 구조주의로부터 의연히 독립된 이방인이었다. 충렬(忠烈)과 의협심으로 끝까지 의(義)를 저버리지 않고 매운 절개를 지켰던 김시습(金時習). 그 ‘서릿발 같은 야인정신(野人精神)이 강릉김씨의 문중혼’이라고 후손 김후경(金厚卿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실장)은 말한다.
선팔판, 후팔판으로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는다.
중기 이후엔 명종(明宗)~숙종(肅宗)대에 8명의 판서(先八判), 영조(英祖)~정조(正祖)대에 또 8명의 판서(後八判)를 배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는다.
선팔판(先八判)은 김첨경(金添慶 형(刑)ㆍ예(禮)ㆍ이판(吏判)), 김홍주(金弘柱 병판(兵判)),김득원(金得元 병판(兵判)), 김홍권(金弘權 이판(吏判)), 김시환(金始煥 예(禮)ㆍ이판(吏判)) 김시현(金始鉉 이판(吏判)), 김시혁(金始奕 이판(吏判)), 김시경(金時烱 병판(兵判)) 후팔판(後八判)은 김상익(金尙翼 예판(禮判)), 김상성(金尙星 예(禮)ㆍ호(戶)ㆍ이판(吏判)), 김상중(金尙重 형(刑)ㆍ공판(工判)), 김상집(金尙集 형(刑)ㆍ공(工)ㆍ호(戶)ㆍ병판(兵判)), 김상철(金尙喆 육판(육판)ㆍ영의정), 김노진(金魯鎭 예(禮)ㆍ형(刑)ㆍ이판(吏判)), 김화진(金華鎭 예(禮)ㆍ형(刑)ㆍ호(戶)ㆍ공판(工判)), 김계락(金啓洛 공(工)ㆍ형(刑)ㆍ예판(禮判))을 이르는데 이 시기에 강릉김씨는 절정을 이루었다.
현재 서울의 팔판동(八判洞)은 당시 강릉김씨 판서들이 집단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전해진다. 이중 유일하게 영의정에까지 오른 사람은 김상철(金尙喆)이다. 학덕이 뛰어나 영조(英祖)의 신임을 받았고 우의정 때 우리나라의 문물, 제도를 망라한 문헌의 필요성을 느껴 왕에게 건의, 영조(英祖) 46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역사 연구에 많은 편의를 주었다. 이듬해 명사(明史)에 실린 ‘강감합찬(綱鑑合簒)에’ 조선왕실의 계보가 잘못 적혀 있다는 대관(臺官)의 상소가 있자 자진해서 변무사(辨誣使)로 북경(北京)에 가 그 책의 개인소장을 금지시켰다는 청제(淸帝)의 약속을 받고 귀국, ‘신묘중관록(辛卯重光錄)’을 편집ㆍ간행하기도 했다. 김상규(金尙奎 숙종(肅宗)조ㆍ대제학), 김상건(金尙建 영조(英祖)조ㆍ대사간), 김상지(金尙志 영조(英祖)조ㆍ대사성(大司成)), 김상구(金尙耈 正祖조 대사간), 강릉(江陵)의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된 유현(儒賢) 김윤신(金潤身)ㆍ김 담(金 譚)ㆍ김 설(金說)등도 조선조의 명현들이다. 일제의 암흑기에 강릉김씨는 의병장 감헌경(金憲卿)과 독립운동가 김영호(金永浩)를 배출했다. 감헌경(金憲卿)은 을미(乙未)사변 이후 삼척(三陟)지방의 창의군(倡義軍)으로 의병대장 민용호(閔龍鎬)와 함께 죽서루(竹西樓)에서 일본관군(日本官軍)을 격파, 잠시 삼척(三陟)군수서리를 지내다 체포되어 옥사했다.
일제(日帝) 암흑기에는 의병장(義兵將) 김연성(金演性)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가로 김학구(金學九) 김진숙(金振淑) 김진선(金振璇) 김인경(金麟卿) 김연순(金演淳) 김진우(金振宇) 등 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를 배출했다. 김영호(金永浩)는 3ㆍ1운동 후 상해(上海)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다 체포되어 5년의 옥고를 치렀다. 만주(滿洲)사변 후에 중한(中韓)의 용군청사령관으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다 상해(上海)에서 체포되어 우리나라로 압송 도중 선상에서 자결했다. ‘날개’로 문명을 날린 이상(李箱 본명 金海卿)은 강릉김씨가 낳은 풍자문학의 백미(白眉)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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