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물리학회 화장이며 고체 물리학의 권위자인 김희규 박사(56·동국대 문리대 교수)가 1978년 7월 24일 집을 나간 후 8일째 돌아오지 않아 경찰이 소재 수사에 나섰습니다.
김 교수는 연구논문이 부진하자 1978년 7월 20일부터는 서재에 들어가 한번도 밖에 나오지 않고 줄곧 담배만 피우면서 23일까지 꼬박 밤을 새웠다고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이 전했습니다.
김 교수는 1978년 7월 24일 상오7시40분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2동 25의3 자택을 나갈 때 초췌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감색양복으로 정장을 한 뒤 출근하려 해 부인 한씨가 24살된 장녀에게 "학교까지 모셔 드리라"고 했으나 거절했으며 혼잣말처럼 "내가 이 꼴이 됐는데 학장이 무엇이냐. 학장직 발령을 사양하고 9시까지 돌아오겠다."면서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잠시 1978년으로 돌아가면 당시 해외애서 수입한 '그라나다' 승용차는 1978년 10월 출시 당시 가격이 1154만원 이었지만, 1979년 1월부터 특별소비세가 인상되어 출시 두달만에 1274만원으로 올랐습니다. 이후 수입원가 상승을 이유로 1980년 1512만원, 1982년에는 1867만원까지 오르게 되는데, 79년 말 분양을 시작한 대치동 은마아파트 31평형 분양가가 1847만원이었으니 그야말로 아파트 한 채 가격과 맞먹는 초고가 차량이었습니다. 당시 자가용을 가진 집안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날 김교수는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고 택시로 출근하여 오전 8시30분쯤 동국대 총장실에서 정재각 총장을 만났습니다. 총장에게 "혈압이 높아 건강상 학장직을 맡지 못하겠다."라며 오전 8시35분쯤 총장실을 나갔답니다. 최근 임명된 문리대 학장직을 사양하겠다고 밝힌 뒤 총장실을 나와 종로3가 재건 화공약품 상사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청산가리와 염화암모늄 5백g씩을 산 뒤 오전 9시10분쯤 시내에서 본관수위실에 전화를 걸어 "지금 화공약품 상에 와있는데 내차가 오면 종로3가 지하철 입구로 보내라."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로 화공상을 나간 후 실종됐다는 것입니다.
김 교수는 자신이 맡은 연구논문이 이제까지 국내학자가 손을 대보지 않은 새로운 것이라면서 이에 필요한 외국 문헌을 찾지 못해 애태우고 있다고 말해왔다고 합니다. 김교수는 1977년 문교부로부터 학술연구비를 지원 받아 연구논문을 써 왔으며 마감 일인 1978년 7월 27일이 다가왔으나 연구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데다, 1978년 7월 20일에는 학교 교무처로부터 문교부의 논문결과를 독촉하는 공문을 받고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가족들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김 교수가 평소 학자로서의 긍지가 남보다 강했었다는 부인 한원주씨(51) 및 동료교수들의 진술에 따라 이번 실종이 연구결과가 부진한데 대한 책임을 지고 자살하려던 것이 아닌가 보고있으나, 학교측의 독촉공문이 김교수의 논문이 완성되지 않았을 경우 연구비 2백여만원을 반납하도록만 되어 있는데다 부인 한씨가 개업의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점 등으로 미뤄 다른 이유에서 실종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소재 수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물리학자 김희규 교수 실종사건을 수사중인 경찰은 1일 서울 청량리 경찰서에 수사본부(본부장 윤재호 수사과장), 서울시경에 수사 전담반(반장 김상명 경감)을 설치, 본격적인 소재수사에 나섰습니다. 경찰은 지금까지 수사결과 김씨가 자살했을 가능성, 잠적·또 다른 이유에 의해 실종됐을 가능성 등 세 갈래로 수사를 벌였습니다. 경찰은 김 교수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든 수배전단 2만장을 인쇄해 전국 관광호텔 등 접객업소와 유원지·사찰 등에 배포키로 했다.
경찰은 처음 김 박사가 문교부에 제출해야 할 연구 논문이 매듭 지어지지 않아 고민했다는 부인 한원주씨 등 가족의 진술과 실종되기 바로 전 청산가리 등 독극물을 사갔다는 점에서 자살이 아닌가 보고 수사를 벌였습니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물리학계의 권위자이면서 기간 내 연구논문을 제출치 못함으로 인한 학계에서의 권위실추와 학자적인 자존심 때문에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고민하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이경우 자살했거나 스스로 잠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경찰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학자로 지내온 김 박사가, 더구나 60을 바라보는 유복한 가장으로서 과연 연구 논문 하나 때문에 자살하거나 잠적할 정도로 비이성적이었는가 하는 점과 김 박사가 그토록 고민했다는 논문이 공동연구자인 홍치유 교수이 말에 따르면 지난달 7월 23일 거의 완성됐으며, 김 박사가 맡기로 한 이론 부문도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는 사실 등은 자살의 가능성을 배제하면서 많은 의문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또 실종 전후의 행동에도 의문이 많아 의혹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첫째 김 박사는 실종 당일인 24일 정오에 한국물리학회 부의장인 한국과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조병하 박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어긴 채 행방불명됐다는 점입니다. 조 박사에 따르면 김 박사는 실종 전날인 23일 오후 8시 조 박사 집에 찾아가 뭔가에 쫓기는 듯한 초조한 표정으로 논문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조 박사가 "뭐 그까짓 논문 하나 가지고 고민을 하느냐. 논문 제출기일을 연기 하든가 정 어려우면 연구비를 돌려주면 될텐데."라고 말하자 김 박사는 연구비를 돌려 줄 경우 신상에 미치는 영향을 묻고 제출기일 연기문제를 문교부에 대신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 두 사람은 다음날인 24일(실종일)정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조 박사는 문교부에 논문제출 연기 등 필요한 조치를 했으나 김 박사는 만나기로 한 약속을 어겼다. 조 박사와 김 박사의 다른 가까운 한 친구인 김형함 교수(동국대)는 김 박사가 지난 수년동안 3∼4차례 논문을 맡았었기 때문에 연기절차 같은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어 그에 따른 고민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는 평소 학자로서의 자존심과 긍지가 남달리 강한 그가 부인이나 친지들에게 연구논문에 대한 고민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자기연구분야의 중간 결과나 내용을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해도 털어놓지 않는 것이 상례로 이 경우 최악의 상태에서 절망감을 불러 일으켰다고는 볼 수 있지만, 자의든 타의든 뭔가 다른 고민을 숨기는 은폐 수단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세째는 평소 사용하는 자가용을 이날만은 사용하길 꺼린 점입니다. 김 박사는 24일 오전 7시 40분 부인 한씨가 장녀(24)와 함께 자가용을 타고 가라는 제의를 이유 없이 거절하고, 택시로 출근했습니다. 비서실의 전화연락으로 총장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전 8시 30분으로 자가용 운전사가 출근하는 8시에 출발해도 결코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오전 9시에 돌아오겠다는 말에 부인 한씨가 시간에 맞춰 학교로 차를 보내겠다고 했는데도 김 박사는 9시10분쯤 학교를 나서 택시로 종로3가 화공 약품상에 도착했으며 이곳에서 학교수위실에 연락, 차를 종로3가 지하철역 부근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한 후 이를 이용치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네째는 김 박사가 사간 염화암모늄과 청산가리가 연구실험에 필요한 재료이나 평소와는 달리 조교를 시키지 않고 김 교수가 이를 직접 구입해간 점입니다 또 학교에 전화를 걸어 운전사를 부르는 등 주변사람들에게 자신이 극약을 사간 점을 노출시킨 점에 의문이 있습니다.
다섯째 지난 7월 5일부터 12일까지 일본 동경에서 열린 '박막(엷은 필름)국제학회'에 참석한 기간에 전공과 거리가 먼 '태양 에너지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한다며 5일 동안이나 대만에 체류, 17일에야 귀국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김 박사는 학술대회 참석차 연2회 정도 일본 등 해외여행이 잦았습니다. 대만에서의 행적 또한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만은 일본에서 조총련 세력이 가장 센 지역이기도 합니다.
여섯째 김 교수는 경북 상주가 고향이나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 해주 중학을 나와 경도대 의대에 입학, 해방을 맞아 중퇴했습니다. 이때 부모는 월남하지 못해 아직도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곱째 김 박사가 실종된 당일 오후 8시 부인 한씨가 경찰에 가출인 신고를 했고 실종 전 2∼3일 동안 고민 속에 두문불출했다는 한씨의 진술이 그 동안 김 박사를 만났다는 친구들의 진술(조·홍 교수)과 엇갈리고 있는 점도 의문점입니다.
이 같은 김 박사의 실종 전 행동과 배경으로 볼 때 김 박사는 자살이나 자의로 잠적했을 가능성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습니다. 김 박사가 국내물리학계의 권위, 특히 반도체와 고체물리학으로 세계적 수준인 국내 물리학계를 이끌어 가고 있는 점, 최근 원자로 도입계획에도 참여한 점 등은 자살이나 잠적가능성 보다는 다른 이유에 의한 실종의 의문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이 경우 그가 학교에 들러 가지고 간 '노란 봉투 속의 내용물'이 무엇인가도 의문으로 남습니다.
결론입니다. 물리학자 김희규 박사(56·동국대 교수)가 실종17일 만인 8월 10일 오후 4시쯤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도봉산 중턱 오솔길 숲 속에서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김 교수의 시체는 칠석 불공을 드리고 하산하던 성동구청 청소부로 근무하는 이 모씨(45) 부부가 발견,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시체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 있었으며 경찰은 사망시간을 15일전으로 추정했습니다. 경찰은 김 교수의 주민등록증과 안경·의복 등 소지품을 현장에서 발견, 김 교수임을 확인했습니다. 경찰은 김 교수가 연구실적이 부진한데다 학자로서의 한계점을 느껴 심한 우울증세로 자살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유서는 없었습니다. 암자 은석암에 이르는 도봉산 등산로에서 옆으로 7m쯤 떨어진 후미진 숲 속에 김 교수는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숨져 있었습니다. 김 교수 머리맡에는 감색양복상의가 곱게 접어져 있었고 종로3가 재건화공약품에서 사갔던 청산가리, 염화 '암모늄'병이 놓여 있었으며 '암모늄'병은 마개가 닫힌 채 그대로였습니다. 또 2홉들이 빈 소줏병 1개와 사이다병 1개, 땅콩봉지, 플라스틱 컵이 주위에 흩어져 있어, 경찰은 김 교수가 소주를 마신 뒤 사이다에 청산가리를 타 마신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세이코' 전자팔목 시계는 정확히 돌아가고 있었으며 3푼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 반지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은석암 오솔길은 입산금지 구역으로 인적이 드문 잡초와 물오리나무 등이 우거져 은폐가 쉬운 곳으로 지난 5월 김 교수부부와 친구인 단국대공대학장 고명원 교수 부부가 함께 하이킹을 왔던 길이었습니다. 경찰은 치열을 검사한 결과 윗니 오른쪽에 김 교수의 백금니를 확인했습니다. 한편 김 교수의 사체부검이 8월 11일 낮12시 30분부터 도봉산 발견현장에서 서울지검 성북지청 최연희 검사 지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전기덕 검시관에 의해 실시됐습니다.
검시관들은 김 교수의 바지 뒷 주머니에서 한일은행발행 자기앞 수표 10만원 권 1장·5만원 권 1장·1만원 권 7장·5천원 권 2장·1천원 권 5장·5백원 권 1장·1백 원짜리 동전2개·10원짜리 동전10개 등 현금 23만5천8백 원을 찾아냈습니다.
경찰은 김의규 박사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고 수사를 종결했습니다.
가을이다. 닫힌 것들에 상처를 입은 바람이 우루루 우루루 몰려다니며 가을이 왔다고 외친다. 마치 상처 입은 도시의 바람처럼 순경이 휘두르는 장대를 피해 우루루 몰려다니며 표를 사고, 줄을 서서 아슬아슬하게 고향을 찾았던 村(촌)사람들. 다시 서울에 올라와 제자리에 앉았는지? 갑자기 지난 여름, 옷을 벗고 바다를 만지면 해수욕장의 숱한 무리와 번화가의 분주한 발걸음 따스하게 느껴진다. 아무나 붙잡고 볼 부비며 유령처럼 히히 웃고 싶다. 내게 고함을 지르고,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침묵으로 겉을 스쳐가는 저들이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가튼 인간행렬이라는 이 충격! 우리가 살면 서 남기는 숱한 흔적들을 살펴보면 상처 난 바람처럼 우루루 우루루 몰려 다녔다는 이 부끄러움! 몰려 다녀야 살아남았다고 소리칠 수 있는 도시에 묻힌 우리들 삶! 우리는 가장 인간을 위하는 체 하는 非人間的(비인간적) 世態(세태)에 살고 있지나 않은지? 숱한 사건에 감동적인 要素(요소)까지 分析(분석)하여 충격으로 만든 후, 서로 나눠 갖지나 않는지? 분노가 없는 ‘참 눈물’을 아직까지 지니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新記錄(신기록)을 만들고, 大型事故(대형사고)를 더 크게 부풀려서 모두들 놀라고, 끊임없이 話題(화제)를 만들고, 다시 그것에 갇혀 만든 話題(화제)를 똑같이 입에 올리는 이 충격의 시대에 감동은 상처 난 몸을 이끌고 지금 어디로 우루루 몰려다니는지? 쉰살이 넘어서 대학에 입학했다는 눈물 나는 낭만은 재수생 非行(비행)이라는 사회문제를 들어 ‘再修生制限論(재수생제한론)’으로 분석, 처리되어 사라졌다. 환갑이 넘어서 복덕방에 나가 산보 삼아 집을 소개하던 노인네의 직업은 부동산 투기라는 팽팽한 핏기에 밀려 사라졌다. 아파트에 갖힌 자신을 돌아보고 도시를 탈출하기 위해 아파트에서 뛰어 내린 할머니. 그 죽음을 보고 눈물보다 문제점에 더 귀 기울이는 이 世態(세태). 충격 뒤에 감동이 따르지 않는 이 世態(세태)에 우리가 서 있다. 10代(대), 20代(대), 30代(대), 혹은 60代(대) 등 확고한 世代(세대)의 금을 긋고 그 구분에 맞는 삶을 제시하여 살아가는 재미를 劃一化(획일화)시키는 재미없는 세상. 그 世代(세대)에 그때 그때 맞춰 살다가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주어진 生(생)을 까먹는 우리, 현대인들. 世代(세대)의 벽을 허물고 자유롭게 사색하는 공간을 무엇이 빼앗아 갔는가. 인간의 삶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미리 계산된 삶과 목적에 맞춰진 생활은 로버트 쇳덩이 피부처럼 멋없다. 삶은 상대적이며 어느 드라마보다 劇的(극적)인 요소를 지닌 훌륭한 작품이다. 行動(행동)하나하나에, 행동이전의 사고에 필연적인 理由(이유)를 품고 있는 흠잡을 데 없는 創造物(창조물)이다. 人間(인간)을 인간 이하로, 또는 인간 이상으로 생각하면 인간은 남는 게 없다. 인간답게 바라볼 때, 그곳에 내 입김이 서린 ‘우리’라는 人間群(인간군)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分析(분석)․解剖(해부)하는 충격을 뭉개고 人間(인간)을 서슴없이 해부하는 풍조를 어떻게 해석해야 우린 떳떳할 수 있을지. 物理學者(물리학자) 金熙圭(김희규)박사의 죽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固體物理學(고체물리학)의 권위자이며 ‘硏究(연구)’를 삶과 직결시켰던 철저한 學問的(학문적) 태도를 지녔던 이른바 學者(학자)를 우리는 잃었다. 왜 죽음을 생각했는지는 故人(고인)만이 명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여기에 관심을 보인 여론은 한마디로 서글픔보다는 충격적 사실을 캐내는데 더 열을 올렸다. 金(김)박사 실종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매스컴은 사건해결이라는 命題(명제)하에 고인을 사정없이 칼질했다. 주위사람들 조차 알지 못한 염문을 速報(속보)로 내보냈고, 결코 金(김)박사에겐 어울리지 않는 私生活(사생활)을 파헤쳤다. 정작 실종보다 그 뒷얘기(私生活(사생활))가 더 충격적인 78년도 한 여름의 世態(세태)에 우리 모두 서있다. 구구한 억측을 몰아내기라도 하듯 金(김)박사는 자신의 주검을 세상에 드러냈다. 과연 인간을 해부하면 같은 인간으로 우리가 남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냄새를 풍기며 情(정)을 주고 받을 때 인간은 인간으로 남는다. 이미 해부하여 實體(실체)가 파헤쳐진 인간에게서 어떤 매력을 느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한 인간을 ‘部分(부분)’으로 파악하고 그걸 다시 현대적이면서 가장 原始的(원시적)인 발상의 ‘人間(인간)칼질’은 이 가을에 더 없는 憂愁(우수)를 가져다준다. ‘클로즈․업’. 部分(부분)을 확대시켜 화면을 꽉 채우는 이 영화 用語(용어)는 우리에게 상세한 사실을 알려주는 대신, 전체적인 면을 살피는데 소홀하기 쉽다. 인간을 보는데 뜯어 보거나 한 面(면)만을 보고 칼질한다면 우리 중 완전하게 남아있을 사람은 누구겠는가? 인간을 인간답게 돌아보자. 인간을 해부하기 전에 이해하는 태도가 절실하다. 인간을 인간숲에서 살려내자. 무엇이든 分析(분석)하고 해부하여 충격을 만드는, 충격적 세태에 과연 우리는 어떤 충격으로 대답해야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우리 주위를 휩싸다가 가을바람, 상처 난 바람이 닫힌 것을 피해 우루루 몰려가고 있다. <빈 무대. 노을을 걸치고 잔잔한 노을빛을 받으며 감동 등장> 감동 = 한 사람의 生(생)은 정말 아름다워. 태우면 무지갯빛으로 피어오르는 그 향기.(엷은 무지개가 피었다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진 무지개, 내가 눈물로 다시 나올 마음도 사라진거야. <인공아기실험관을 손에 들고, 사고버스 운전사 모자를 쓰고, 홈런을 때린 야구배트를 메고, 당당한 자세로 충격 등장.> 충격 = 한사람의 生(생)은 너무 멋져. 주검에 색칠만 하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거든.(거센 조명이 실험관․모자․배트․에 비춰지자 아기 울음소리, 비명소리 함성이 차례로 튀어나왔다가 사라진다. 거센 조명에 감동의 모습이 점점 엷어지더니 이내 소리만 남는다.) 소리 = 오랜만이네. 충격 = ... 그대, 놀랍게도 희미하게 야윈 그대. 소리 = 자네가 놀랄 때도 있군. 자네는 사건을 해부하고, 나는 그걸 기워 다시 살리던 옛날이 그립네, 헌데 자네 말은 내가 들어갈 틈이 없는 만큼 너무 단단해졌어. 충격 = (시무룩하게 듣고 있다가 느닷없이) 하하하... 소리 = 웃지마! 우린 사람들이 만든 무대의 배우에 불과해. 충격 = 골치 아픈 얘기 하지 말게. (실험관을 내려놓고,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배트를 휘두른다.) 소리 = 자네도 언젠가는 죽게 돼 있어. 그건 충격사일거야. 남는 게 없을 죽음을 생각해봐. 주검에 집착을 버리라구. <충격의 몸놀림이 활발해진다.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記者(기자)들이 충격을 향해 커다란 사진기를 들이대며 흥분된 몸짓을 하고 있다. 점점 늘어나는 사람들처럼 거세지는 조명. 소리(감동)는 밟혀 눈물만 남아 흐느낀다. 이때 무대 밖에서 무대 안을 노려보는 눈. 기다렸다는 듯 사진기 셔터를 누른다. 일시에 세상은 다시 비어있다.>
金澤根 <文理大(문리대) 國文科(국문과)>
‘백세시대’가 회자되는 요즘이지만, 이 나이쯤 되면 기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흐릿하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다. 아무리 의술 발전이 눈부시다고 해도, 이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 종의 자연스러운 생로병사의 원리이다. 오죽했으면, 농촌의 한 구십대 노파가 장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죽을 만하면, 애들이 병원에 데려가 살려놓는다.’고 한탄 아닌 한탄을 했을까. 건강도 온전하고 정신도 말짱하고 합당한 소일거리도 있어야 제대로 된 백세 인생일 것이다.
한원주 선생은 이 책에서 일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시대의 격랑을 헤치면서 의사로 살아 온 자신의 90평생을 담담하게 반추했다. 뭔가 남다른 건강 비결이 실려 있음직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작가 스스로가 근 30년 이상 십이지궤양을 달고 산 환자의 몸이라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현직 의사로서 아직까지 젊은이 못지않은 구십대의 노익장을 불태우고 있는 삶을 지탱해 준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경남 진주에서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3.1운동을 주도했던 부모님 아래서 딸 여섯 중 셋째로 태어났다. 결혼 후 뒤늦게 의술을 배운 부친의 임지에 따라 마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해방을 앞뒤로 의대를 입학하고 졸업했으며, 한때 서울에서 산부인과 개인 병원을 열기도 했다. 6.25 직전 물리학자인 남편과 결혼했고, 유학 떠난 남편을 따라가 미국에서 인턴, 레지던트, 전문의 과정을 새로 밟았으며, 귀국 후 10년 넘게 내과 병원을 개원했다. 여기까지는 개화한 유복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고 초창기 여의사의 길을 걸으면서 평탄한 인생행로를 겪은 셈이었다. 식민지 시절과 해방, 전쟁이라는 험한 세월 속에서도 일시적인 어려움은 있을지라도 생이별과 같은 극한의 고통은 피할 수 있었다.
1970년대 말, 물리학자이던 김희주 박사의 돌연한 죽음으로 인생행로에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이후 2016년 현재까지 경기도 남양주의 매그너스재활요양병원 내과 과장으로 재직하면서 누구보다 활기차고 왕성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또한 의료봉사에 몸담은 이래로, 매년 휴가철을 주로 해외에서 무료진료를 하며 지내고 있다. 노구의 건강을 염려하는 가족의 만류도, 틈틈이 재발하는 지병의 방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원주 작가의 백세 현역의 꿈은 이렇게 봉사와 신앙의 힘에 의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인생의 전환기에 작가가 선택한 길은 기독교의료선교협회를 매개로 한 의료봉사, 곧 무료진료와 전인치유였다. 그 바탕에는 의료봉사의 길을 몸소 실천한 부친 한규상 선생의 모범과 모태신앙이던 기독교의 박애 정신이 있었다. 처음에는 개인 병원을 운영하면서 의교선교 진료소에서 짬짬이 의료봉사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개인 병원의 문을 닫고 의료선교의원(나중에 ‘우리들의원’으로 개명)에 전념했다. 이런 봉사가 2008년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 의료선교의원은 인간의 질병을 단순히 육신의 질병으로만 한정해 보지 않았다. 영혼의 고통과 사회의 적폐를 함께 치료해야 온전한 치료라는 ‘전인치유’의 개념을 정립했고 이를 앞장서서 실천했다.
작가 한원주는 전인치료에 대한 관심으로 의료선교에 칼럼을 게재한 바 있다. <한원주, “전인치료진료소 확장 운영” 의료선교 통권 4호(1978.): 4f.> 관련 논문으로는 이태곤의 <치유목회의 실천적 방법과 교회성장>이라는 석사학위 논문도 있다.
치유목회의 실천적 방법과 교회성장.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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