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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Column

진실을 말할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by Retireconomist 2016. 12. 5.

정치판에도 서열이라는 것이 깊게 작용합니다. 


한 야당 부대변인이 자신이 속해있는 당의 이전 대표 지지자들을 향해 포문을 열었습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대선후보, 지지하는 정당을 위하는 행동도 상식선에서 해야한다"고 언급한 것입니다.  나이라고는 75년생으로 갖 마흔을 넘은 이 여성 국회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사악한 권력집단 전체를 도려내기 위해 아무것도 가진 것없이 싸워나가는 사람들에게 '탄핵을 반대했다' '새누리 연대다' 거짓을 씌우고 총질을 해대는 것은 보수꼴통보다 더 한 짓"이라고 말했습니다.  다 같은 마음으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며 "정치 색깔이 다르다고 함부로 진실을 왜곡·막말·모욕하지 말자."라고 덧붙였습니다.


63빌딩 백리향이라는 중식당에서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마포대교를 바라보면서 찍은 이 사진은 당시의 어둠을 찍어내는 카메라의 성능과 찍사의 능력이 보여주는 어두운 진실이기도 합니다.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으로 인해서 대통령 퇴진운동이 국민을 중심으로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현실 정치인들은 이러한 혼란 국면의 다음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첨예한 준비작업을 진행하고 형국입니다. 그 중에서 분명 또 다른 대권을 쥐게 되는 대통령이 탄생하겠지요. 


그러니 이 여성 대변인의 포문은 차기 대통령을 향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한 일이 아닐텐데, 어떻게 만용에 가까운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진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실이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 동시적으로 가장 큰 헛점이 노출됩니다. 가장 위험한 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서양사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서 교훈이 되는 장면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제1차 십자군 전쟁입니다. 세계 기독교의 배꼽(omphalos)으로 여기는 기독교의 성도(聖都) 예루살렘은 예수가 수난의 피를 흘린 골고다 언덕길이 있고,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이 세우고 가꾼 기독교의 중심 성지입니다. 그 성지를 순례하기를 원하는 기독교인들을 방해당하면서 성도를 되찾자는 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 1099년 6월, 십자군은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 상황은 기독교인에게는 성지를 되찾은 아름다운 장면이지만, 기록에 의한 탈환전은 처절했습니다. 


종군한 프랑스 성직자는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 등에는 사람의 머리나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신전이나 모든 벽들은 물론 말을 탄 기사가 잡은 고삐까지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이렇게 썼습니다. 그 당시 세상사람들은 이 장면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성지순례를 방해했던 사람들로 더럽혀졌던 이 장소가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한 것일 뿐 아니라 찬양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사라센인을 학살한 것이 신의 영광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이 이런 것인가요? 성서의 무저항적 가르침과 상반되는 진실을 만나게 됩니다.


자율주행 자동차를 개발하는 최첨단의 과학기술을 갖춘 나라에서 집회 주최측 추산의 170만명과 경찰 추산의 32만명의 138만명 차이를 확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자가 나타나서도 전문가가 계산해서도 답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정말로 만일 중에 하나 사고라도 나면 몇 명이 현장에 있었는지 또 계산하지 못해서 두고두고 문제가 회자되는 일을 누가 반복되지 않는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우리의 사람 세는 방법은 이렇게 원시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정말로 안타깝고 답답할 뿐입니다. 


집회 인원은 몇 명인지? 하늘아래 진실은 있는데! 누가 정답이라고 확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진실이 왜곡되는 것을 우려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합이 얼마인지 모르고 대략 계산한 것으로 조금은 더 과장된 수치를 더 좋게 생각하면서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어디 그것 뿐인가요? 좋은 일은 아니지만 화재가 나면 소방서 추산의 피해액은 피해주가 추산한 것보다는 턱도 없이 아주 작은 금액으로 손해금액을 발표합니다. 손해보험회사와의 결탁해서 화재손실을 적게 만들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라는데 공감은 하지만 석연치 않은 것은 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때 위험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할 때 '권력'의 무마 시도가 자리를 잡지 못하기 때문에 자리 보존을 위해 진실을 가장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됩니다. 진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여러모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할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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