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행 GOLD&WISE 2월호 게재 칼럼 ⓒ 김형래
직원들이 가장 읽지 않는 책이 바로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사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어제 바로 이러한 '어두운 등잔 밑' 원리 때문에 미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가 칼럼을 쓴지는 오래되었지만, 내 칼럼을 두고 감탄하는 이는 처음 만난 것 같다. 솔직히 이런 맛은 아무나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충분히 노력했다는 것이고 그 결과를 정당하게 인정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제 맛이다.
어깨가 떨어져나가는 듯 피로가 엄습하지만, 종이 종된 모습을 포기한다면 아무런 의미없는 수고일게다. 참고 견디어 가야할 길이 있고, 그 길을 가야하는 목적이 아직 살아있다. 멈추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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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遺産), 아름답게 남기는 지혜
외국 속담에 ‘끝이 좋으면 모두 좋다’는 말이 있다. 은퇴 후 노후에 준비해야 할 많은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마무리는 자녀에게 가치 있는 유산 남기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부익부 빈익빈이 당연시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자손에게 남길 위대한 유산은 과연 무엇일까. 물질적 풍요로움도, 지식을 갖춰 여유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도 모두 소중한 유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오랜 삶의 여정을 통해 얻은 지혜와 생각을 자녀에게 남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유산일 것이다. 노후에 준비해야 할 아름다운 숙제, 지혜롭게 유산 물려주는 법을 알아본다.
명문가에서 배우는 현명한 유산 남기기
다산 정약용은 3대에 걸친 의원이라야 약에 효험이 있다고 했고, 또 3대에 걸쳐 글을 읽어야 다음에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온다고 했다. 그만큼 명문가를 만들고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명문가는 무엇을 유산으로 물려주었을까?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논어>를 가르치며 역사와 후세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자긍심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을 가풍으로 하는 한 명문가가 있다. 1910년 온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나선 할아버지는 자기의 며느리에게 <논어>와 <맹자> 등에서 여성에게 꼭 필요한 덕목을 뽑아 ‘맞춤식 과외’를 했는데, 평소에는 시간이 없어 산후 조리하는 때를 이용했다고 한다. <논어>를 배운 며느리는 아들에게 <맹자>를 가르치고, 그 아들은 대학을 나와 교사가 되어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그의 자녀도 아버지를 이어 교사의 길을 걷고 있다. 여기서 할아버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아들 이준형이고, 아버지는 석주의 손자 이병화이며, 며느리는 그의 부인 허은이다. 또 그 아들은 중앙중학교 이범증 교장이고, 자녀는 이범증의 딸인 풍문여고 교사인 이윤명 선생이다. 이범증의 부인과 두 딸은 모두 고려대 동문이며 3명이 교사로 재직 중이다. 집안의 내력을 볼 때 석주 이상룡은 이범증 교장의 증조부로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에 있는 500년 된 고택 임청각을 지키던 고성 이씨 종손이다. 이상룡 선생은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자 서간도로 가족 50여 명을 이끌고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이가 가까운 친족만 9명에 달하고 처가까지 합치면 47명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 집안이 500년 동안 명문가를 유지해온 노하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범증 교장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노하우라는 것이 “명문가로서의 당당한 자긍심이었습니다”라며, “바로 역사와 후세 앞에서 당당할 수 있도록 자긍심을 키워주는 것이 유산입니다”라고 답했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자녀 교육만은 결코 소홀하지 않았으며, 자녀 교육은 단지 지식(경쟁에서 남보다 앞서고 이기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범증 교장의 말처럼 고성 이씨 사람들은 늘 당당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그들은 먼저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다. 그런 그들에게 가문에 대한 열등감이 있을 리 없다. 오히려 그들은 선조가 몸소 실천했던 고귀한 정신을 계승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명문가의 정신은 유산 상속 따위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잊히는 가훈 잇는 것도 숭고한 유산 중 하나
부피도 무게도 없는 것이 수천 년 동안 남겨지고, 나누기 위해 분쟁이 생길 염려 없고 남이 가져가도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유산이 무엇일까? 유산 중에서 모든 세상 욕심으로부터 자유롭고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가훈이다. 가훈이란 집안 어른이 그 자손에게 주는 가르침, 가정의 윤리적인 지침으로서 가족이 지켜야 할 도덕적인 덕목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신라 장군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충효(忠孝)라는 주제의 가훈을 남겼다. ‘남자지신, 시시비비중, 시시비비분, 시시비비중, 시시비비지(男子之身, 是是非非中, 是是非非分,是是非非中, 是是非非知).’ 이를 해석하면 ‘남자의 몸가짐은 옳고 그른 가운데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옳고 그른 가운데서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이다’라는 가훈을 남겼다. 김유신 장군의 후손 중에서 가훈의 소유를 가지고 다툼이 있거나 빼앗긴 것이 있었을까? 전혀 문제될 수 없는 소재다. 고려 말의 충신 최영(崔瑩) 장군은 그 유명한 황금즉석(黃金卽石), 즉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가훈을 남겼다. 두산그룹 창업자인 박두병(朴斗秉, 1910~1973)은 1932년 경성고등상업학교 졸업과 동시에 조선은행(지금의 한국은행)에 들어가서 기업 실무와 경험을 쌓았다. 4년 후인 1936년 은행 생활을 그만두고 아버지가 창설, 경영하던 ‘박승직상점’의 전무이사로 취임했다.상점을 관리하는 데서 근대적인 경영 방식의 하나인 출근부 제도와 보너스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실무를 경험하고 사업을 경영하면서 경험한 것을 가훈으로 남겼다. ‘빚 보증 서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가훈은 가정에선 평범할 수도 있지만 기업에는 큰 유산이 된다.소설가 김동리(金東里, 1913〜1995)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집 사람들은 혈통적으로 풍류를 즐기며 술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이에 대비한 듯한 다음의 3가지 가훈이 전해 내려온다. 1. 도박을 가까이하지 마라. 2. 주색을 삼가라. 3. 남을 이기려고 하지 마라이다.” 또 언론인 김동현(金東顯, 1932〜 )은 “바르게 보고, 생각하고, 일하고, 명하고, 따르고, 결정하고, 정진하라”를 가훈으로 삼고 있다. 이론화학자로는 이례적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태규(李泰圭, 1902〜 1992) 박사는 “1. 실력은 충실하기를 기하되 몸가짐은 겸손히 할 일 2. 장래의 처신 문제를 너무 걱정하지 말고 현재 맡은 일에 충실할 일”이라는 가훈을 남겼다.<코리아 헤럴드> 발행인 홍정욱이 유산으로 받은 가훈은 “세상에 진정 값진 것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이다. 뺑코라는 별명을 가진 개그맨이며 MC로 활동 중인 이홍렬의 가훈은 “신용과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자”이다. “웃으며 살다가 웃으며 죽자”라는 가훈을 남긴 분도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음악가이며 교수를 지낸 박경호(朴慶浩)집안의 가훈이다. 유산으로 물질을 남기는 것에 국한하지 말고 맑고 청명한 정신을 남겨주는 ‘가훈’을 택하는 것이 또 다른 큰 교훈이 될 것이다.
현명한 상속은 ‘돈’이 아닌 ‘건강한 가치관’
세금을 정상적으로 내더라도 덜 내는 방법은 상속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메뉴다. 과연 그 방법이 가장 훌륭한 유산을 남겨주는 현명한 방법일까? 아니면 소인배 행동일까? 돈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그야말로 ‘물고기’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보다 이상적인 유산 상속은 ‘물고기 잡는 법’인‘삶에 대한 건강한 가치관’을 남겨주는 것이다. 부자가 3대를 넘기기 힘들다는 말이 있지만, 무려 12대에 걸쳐 만석꾼 집안의 명예를 누린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부자가 있다. 바로 경주 최 부잣집이다. 최 부잣집이 오래도록 부를 쌓고 존경받은 까닭은 ‘상생의 지혜와 사회적 책임’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이 집안은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마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를 가훈으로 삼았고, 남이 잘돼야 나도 잘된다는 생각을 꾸준히 실천한 덕분에 300여 년 동안 넘게 부를 누릴 수 있었다. 나눠 줄 수 있는 부자라야 좋은 부자라 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 사회에 부의 일정 부분을 환원해야 응원받을 수 있다는 건강한 가치관이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눔의 미학이 최고의 유산이다
아메리카 북서부 해안, 멜라네시아, 뉴질랜드 등지에서 성행하던 놀이가 있다. 바로 포틀래치(potlatch) 경쟁이다. 이 즐거운 경쟁을 보면 선물을 받는 사람은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선물을 되갚고,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서로 배운다는 걸 알 수 있다.
레인메이커(rain maker)라는 말이 있다. 단비를 만들어주는 사람, 메마른 세상에 단비를 뿌려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엄청난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 없이 가느다란 보슬비를 떠올릴 수도 있고, 잠깐 내리는 소나기가 될 수도 있지만, 부담감 없이 즐겁게 나누고 돕는 존재를 생각하면 된다. 대체로 레인메이커가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항상 남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이타주의자거나, 현재 갖고 있는 재산에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한 사람이거나, 종교적 박애주의가 넘치는 경우이거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명사가 되기 위해서거나, 평소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서거나, 부모 또는 사랑하는 자녀, 가족을 기념하기 위해서거나, 가족 간에 건전한 가훈을 지키고 연대를 보존하기 위한 매개로 삼기 위해서거나 등 사연은 다양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생존 경쟁이 가장 심하다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현대 미술·음악·오페라의 중심지가 된 이유는 뉴욕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레인메이커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뉴욕시티 발레단이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공연에 가보면 팸플릿에 어김없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기부자 명단이다. 누가 얼마를 기부했는지 자세히 밝히고 그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한 걸 볼 수 있다.상생의 교감 아래 나눔으로써 존경받고 나눔으로써 기쁨을 얻는 과정에서 나눔이라는 유산이 굳거하게 뿌리내려 뉴욕은 탐욕의 도시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실제 미국의 백만장자 2세 등, 이른바 돈이 많아 세상의 이목을 받는 이들 대부분은 자선활동을 통해 명예를 찾는 문화에 대단히 긍정적이고, 기업의 CEO라는 명함보다 자선 단체 이사의 명함을 건넬 때 자긍심을 갖는다고 한다.
현재 돈을 가장 많이 벌었다는 사업가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는 자선 사업을 통해 자신의 부를 나누는 그 모습이 바로 물려줄 유산이다. 미국 자선운동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브라이언 오코넬은 자선 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서 2가지 사회운동을 시작했다.첫째는 ‘손빌려주기 운동(Lend a Hand)’이고, 둘째는 ‘5% 기부 운동(Give Five)’이다.손빌려주기 운동은 자발적 봉사 운동을 더 확산시키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자는 캠페인이고, 5% 기부 운동은 수입의 5%를 자선 단체에 기부하거나, 1주일에 5시간을 봉사 활동에 쓰자는 것이다.
이런 문화가 우리네 유산 남겨주기 운동에 포함되었으면 한다. 나누면 더 채워진다는 것을 자신 있게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면, 크게 안겨주는 것 이상으로 물려줄 귀한유산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글 김형래(시니어 칼럼니스트·시니어 파트너즈 상무, <나는 치사(致仕)하게 은퇴하고 싶다>의 저자)
유산, 300년 이상유효 기간을 갖는 법
유산을 잘 남겨주고 싶다면 받는 사람이 원하는 소통 방법을 택해야 한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3대가 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말로 할 것이 아니라, 녹음이나 글로 남겨야 하며, 디지털로 저장해서 물려주어야 한다. 마야의 문명을 해석하고 있고, 피라미드의 지혜도 아직 묻혀있다. 어렵게 쌓은 경험과 지혜를 고스란히 자손에게만 넘겨주더라도 돈보다 귀한 시간을 절약시켜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직도 현대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뇌를 두고 어떻게 그 지식과 정보를 뽑아낼지 고민하는 모습이 바로 거기에 있다. 같이 있던 이들에게 말로 남겨주는 것은 유효 기간이 있지만, 글로 남겨주는 것은 300년이 넘는다. 수천 년 역사를 가진 가문이라도 후세에게 족보 이상의 유훈을 남긴 가문이 없는 이유는 글로 남기지 않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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