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Lifestyle/책Book

사실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 지식은 편견에 불과하다.

by Retireconomist 2006. 8. 30.

이렇게 많은 안내판으로 "친절한 뉴욕"이 설명되는가?



초야권이란 무엇인가. 백과사전을 살펴보면 이렇게 씌어있다. “결혼 직전 또는 첫날밤에 신랑이 아닌 남성이 신부와 성관계를 맺는 권리. 유럽 중세나 미개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습으로 그 배경에는 여성의 생식능력에 대한 주술적 신앙이 깔려 있다. 중세 서양에서 대개는 봉건 영주나 성직자가 초야권을 가졌는데, 성직자는 신의 대리자로서 처녀와 동침하여 풍성한 생식능력을 주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 파과(破瓜)로 인한 출혈은 남자에게 재앙을 가져오는데 성직자만이 이 재앙을 이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초야권을 행사하는 성직자에게는 사례금을 주는 예도 있었다.”

과연 이러한 설명을 신뢰할 수 있을까? 특히 가톨릭 성직자가 초야권을 행사했다는 설명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중세나 근대 이후의 사료 가운데 초야권을 언급하는 것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모든 사료는 사람이 작성한 것이고 작성자의 의도가 배어 있기 때문에 콘텍스트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두 사전에는 초야권에 대해 상이한 설명을 내놓고 있다. 로베르 사전은 초야권을 ‘사실’로 보는 반면 라루스 사전은 초야권을 ‘신화’로 설명한다. 그러나 두 사전에는 ‘영주가 결혼 첫날밤에 농노 부인의 침대에 발을 놓을 권리’라는 말이 같이 씌어져 있다.

침대에 다리를 놓는 관습은 성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군을 대신하는 결혼의식의 몸짓일 뿐이었다. 중세에 초야권이라는 권리가 인정된 적은 없다. 그렇다고 영주의 성적인 착취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희롱 내지 성폭력이 제도적으로 인정된 적이 없었을 뿐이다. 중세는 남성중심사회였고 폭력적인 사회였으므로 성적인 폭력도 심했을 것이다. 따라서 영주의 초야권은 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초야권을 행사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그러한 전설은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만들어졌다. 1562년 낭트칙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된 위그노들은 가톨릭에 대한 분노로 생마르탱 성당을 불태웠다. 그들은 성당 파괴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들을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수도사들이 도시의 모든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영주들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바치고, 교구 신부들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바치듯이 당신들은 우리에게 당신들의 남편들과 갖는 성관계 횟수의 10분의 1을 바쳐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십일조는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돈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민중문화 속으로 침투하여 반교권주의 및 초야권 신화를 만드는데 한몫했다.

12세기에 교회는 사제의 주도로 결혼식을 거행했다. 결혼식에서 사제는 신부를 신랑에게 넘겨주었으므로 사제 없이는 결혼식이 성립할 수도 효력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 또한 교회는 금욕을 강조했다. 특히 신혼 초 3일간에는 순결을 지키도록 하여 악마를 물리치라 했는데 신혼부부들에게 이것은 지키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되사기가 가능해졌다. 신혼부부들이 교회에 돈을 내면 금욕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되사기가 ‘초야권 요구’로 유추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초야권은 논쟁의 산물이다. 가톨릭과 세속영주의 싸움, 중세와 근대의 싸움, 교권주의와 반교권주의 싸움 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  김응종/푸른역사
서양사에 관해 대표적으로 잘못 알려진 12가지 이야기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파헤치고 있는 역사 교양서이다. 현재의 우리 입장에서 서양사를 바라보고 문제의 근원을 찾아가는 형식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교...


고등학교 시절, 흥미로운 "초야권"에 대한 글을 읽고는 그때 굳어진 지식은 나이가 들도록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나의 인지범위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얼마전, 한 조간신문의 독서마당을 통해서 소개된 책 제목을 보고 과거의 지식에 무언가 오류가 있지 않을까하는 궁금증에 이 책을 접했다. "설마 그럴까?"하는 의구심에서 출발했었을 그 지식의 의문점에 대한 해제를 읽고 나니 오히려 답답함이 늘어났다. 내가 과거의 지식을 편견으로 쉽게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나는 이 과거의 편견을 올바른 지식으로 바꿀 수 있을까?  편견이 무섭지만 고질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나는 "지구가 돈다"는 지식을 가지고도  "해가 뜬다"로 표현하는 이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편엽함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