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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Lifestyle/책Book

홍콩에서의 페미니즘은 안전지대에 있는가?

by Retireconomist 2006. 8. 5.

The Landmark Arcade에서 멋쟁이 홍콩여인들이 걷고 있다.



페미니즘은 그렇게 거창하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잘 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는 것이다. ‘다른 목소리’는 혼란이 아니라 다양성과 창조력의 원천이다. 사람들도 소품종 대량 생산 사회보다 다품종 소량 생산 사회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은가. 초등학교 교실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5학년 남자 어린이가 별뜻 없이, 또래 여자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하느님이 나는 진흙으로 직접 만드시고, 여자는 내 갈비뼈로 만든 거 알아?” 그러자 두 명의 여자 아이들 말이 걸작이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근데, 누가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니?”, “그러니까, 너는 질그릇이고 나는 본차이나(Bone China)네!” 여성주의는 남자 어린이의 말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 어린이들의 재치 있는 대응대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그러한 ‘다른 목소리’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고, 여성도 남성도 성장시킨다고 믿는다.

제주도 사람의 입장에서 남해(南海)는 틀린 말이다. 그들에게는 ‘북해(北海)’다. 왜 박완서는 ‘제3세계’ 문학이고, 괴테는 ‘세계’ 문학인가? ‘유색 인종’은, 흰색은 하나의 색이 아니라 색의 기준이 된다는 백인 우월주의의 표현이다. 왜 한국의 프로야구 최종 결선은 ‘코리안 시리즈’인데, 미국은 아메리카 시리즈가 아니라 ‘월드 시리즈’인가? 한국어나 영어에서 만남(meet)은 본다(see)는 것을 의미하는데(“또 봐요.”), 이는 시각 장애인을 배제한 말이다. 남성에게 성교는 삽입이지만 여성에게는 흡입이다.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말은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서울 사는 사람의 시각에서 구성된 것이다. 중립적인 말,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주의가 중요한 것은 성차별이 가장 중요한 모순이어서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관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말 자체가 여성 혹은 남성에게만 해당하거나 여성 비하적이어서, 성별에 따른 역할 분리(차별)를 규정하고 당연시하는 경우도 많다. 미혼부라는 말은 없다. ‘걸레’는 남성을 의미하지 않으며, ‘영웅’은 여성을 뜻하지 않으며, ‘변태’는 이성애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연상의 여인’이라는 말은 있지만, ‘남성 상위’라는 말은 없다. 남성이 연상이거나 상위인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태아 성감별과 여아 살해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인권 침해 사안인데도, 그 원인이 되는 남아 선호 악습을 ‘남아 선호 사상’이라고 부른다. 살인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폐습을 굳이 ‘사상’이라고 칭할 필요가 있을까?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교양인
페미니스트가 남성과 싸우려고만 하는 과격한 여자라는 식의 페미니즘에 대한 일반적인 고정과념을 깨주는 책이다. 군위안부, 스와핑, 위안부 누드, 박근혜 패러디 등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여러 사건들을...


주변에 워낙 많은 여자들 가운데에서 살다보니, 생존의 방법으로 '페미니즘'을 인정하게 된 듯 싶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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