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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의 취약성》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by Retireconomist 2020. 12. 10.

White Fragility: Why It's So Hard for White People to Talk About Racism

 

서론 “우리는 여기서 저기로 갈 수 없다”, 24쪽
북미의 백인은 인종 분리와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 그에 따른 혜택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 결과 우리는 인종 스트레스로부터 차단되는 동시에 우리에게 이점을 누릴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종으로 인한 불편함을 거의 겪지 않기에 이제까지 우리는 인종 체력을 기를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거나 결코 인정하지 않는 우월의식을 내면화하게 되고, 결국 인종에 관한 대화에 매우 취약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인종적 세계관에 대한 도전을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인종주의 체제와 우리를 연관짓는 모든 시도를 마음을 어지럽히는 부당한 도덕적 모욕으로 여긴다. 아무리 적은 인종 스트레스라도 우리는 견디지 못한다. 이 사회에서 백인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암시하기만 해도 대개 일군의 방어적 반응을 보인다. 그런 반응에는 분노, 두려움, 죄책감 같은 감정과 논쟁하기, 침묵하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같은 행동이 포함된다. 우리 백인은 이런 반응으로 도전을 물리쳐 균형을 회복하고, 인종적 편안함을 되찾고, 인종 위계에서의 우위를 유지한다. 나는 이 과정을 백인의 취약성으로 개념화한다.

제1장 “백인에게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부딪히는 난제들”, 32~33쪽
나는 인종주의에 대한 의견이 없는 백인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 또는 서구 문명의 역사를 가진 다른 어떤 문화에서든─ 성장하거나 상당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인종주의에 대한 자기 의견을 갖지 않기란 정말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인종주의에 대한 백인의 의견은 대체로 확고하다. 그러나 인종 관계는 몹시 복잡하다. 의식적으로 꾸준히 공부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의견이 정보에 근거하지 않는 의견, 더 나아가 무지한 의견이 될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당신이 백인이라면 나는 당신을 모르더라도 인종주의에 대한 당신의 의견이 십중팔구 무지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지난 수백 년을 통틀어 가장 복잡하고도 지속적인 사회적역학이라고 하는 인종주의를 섬세하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미국의 주류 문화에서 우리에게 전혀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2장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48쪽
인종은 인종 간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백인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화하고 있는 사회적 관념이다. ‘백인’이라는 용어는 1600년대 말에 식민지법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미국은 1790년경 인구조사에서 사람들에게 각자의 인종을 말할 것을 요구했고, 1825년경 이른바 혈통의 등급에 따라 누구를 인디언으로 분류할지 결정했다. 1800년대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민자들이 물밀 듯이 들어옴에 따라 미국에서 백인 인종 개념은 더욱 공고해졌다.

제3장 “시민권 운동 이후의 인종주의”, 96~97쪽
다수의 백인 청소년이 인종주의는 과거의 일이며 자신들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여기도록 배웠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연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2014년 MTV가 후원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출생한 세대─옮긴이)는 자신들이 이전 세대들보다 더 관용적이며 평등과 공정에도 더 헌신한다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밀레니얼 세대는 인종 색맹이라는 이상에 더 헌신하면서 인종 문제를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로 남겨두고, 인종 간 불평등을 줄이는 조치에 반대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백인 밀레니얼 세대의 41퍼센트가 정부가 소수집단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고, 48퍼센트가 백인에 대한 차별이 유색인에 대한 차별만큼이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제4장 “인종은 백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126쪽
미국에서의 삶은 인종 분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전체 인종 집단 가운데 백인은 인종 분리를 선택할 가능성이 가장 높고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경제적 위치에 있을 가능성도 가장 높은 집단이다. 백인을 길러내는 인종 분리 환경(우리의 학교, 직장, 동네, 상점가, 예배당, 오락시설, 사교 모임 등)은 우리의 경험과 시각만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강화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유색인을 보지 못하며, 인종 다양성의 부족을 문제로 인정하는 백인 성인은 거의 없다. 사실 좋은 동네와 나쁜 동네를 분류하는 기준은 언제나 인종이다. 이런 평가는 백인 내부의 경제력 격차에 근거하기도 하지만, 어떤 학교에 흑인과 라틴계 학생이 (백인이 보기에) 상당수 다닐 경우 백인은 그 학교를 나쁜 학교로 인식할 것이다. 설령 주변에 유색인이 있더라도 우리에게 인종 간 우정을 쌓으라고 장려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제5장 “좋은/나쁜 이분법”, 135쪽
인종주의를 나쁘게 만드는 것이 긍정적인 변화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이 변화가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 패러다임 안에서는 나에게 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곧 심한 도덕적 타격─ 일종의 인신공격─ 을 가하는 것이다. 이 타격을 받을 경우 나는 나의 인격을 변호해야 하고, 나의 행위를 반성하는 일보다 인종주의자 혐의를 벗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좋은/나쁜 이분법은 백인이 인종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인종주의가 무엇이고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어떤 방식으로 인종주의에 가담할 수밖에 없도록 길들이는지에 대해 말할 수 없게 한다. 이런 역학을 논의하지 못하거나 우리 안에서 발견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인종주의에 계속 가담할 수밖에 없다. 좋은/나쁜 이분법은 평균적인 백인이 인종주의를 이해하는 것─저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제6장 “반反흑인성”, 164쪽
우리는 백인이 우월하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유포하는 문화 안에서 살고 있다. 이와 동시에 흑인이 열등하다는 메시지도 끊임없이 유포된다. 그러나 반흑인성은 우리 모두가 흡수하는 부정적인 고정관념 그 이상이다. 반흑인성은 우리의 백인 정체성의 근간을 이룬다. 백인성은 언제나 흑인성에 기반해왔다. 제2장에서 논한 대로, 아프리카인 노예화를 정당화할 필요성이 생기기 전까지는 인종이나 백인종 개념이 없었다. 열등한 흑인종을 따로 만들어내는 것은 동시에 ‘우월한’ 백인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백인종 개념은 흑인종 개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백인은 흑인을 필요로 한다. 흑인성은 백인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제8장 “그 결과: 백인의 취약성”, 198쪽
백인의 취약성은 괴롭힘의 한 형태로서 기능한다. 당신이 아무리 정중한 방식으로 시도할지라도, 나는 당신이 그냥 물러나 포기하고 다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도록 면전에서 당신을 아주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백인의 취약성은 유색인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그들의 자리에’ 묶어놓는다. 이런 측면에서 백인의 취약성은 인종 통제의 강력한 형태다. 사회권력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제7장에서 논한 백인의 취약성을 촉발하는 원인들을 백인의 권력과 통제력에 대한 도전으로, 그리고 백인의 취약성을 도전을 단념시키고 권력과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제10장 “백인의 취약성과 관여의 규칙”, 215쪽
인종주의를 개개인의 잔인한 행위로 개념화하는 이 우세한 견해에서 보면, 유색인을 의식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지독한 사람들만이 인종주의를 자행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그릇된 개념이긴 하지만, 좋은 조짐은 아니다. 사실 이 개념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꼭 필요한 대화와 자기반성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한다. 이 개념을 가진 백인은 인종주의를 암시하기만 해도 분노할 뿐 아니라 대개 인종주의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방식에도 울분을 터뜨리곤 한다. 백인을 오랫동안 상대한 뒤 나는 우리의 불가피하고 대개 무의식적인 인종주의적 전제와 패턴에 대해 피드백을 주는 데 필요한 일군의 암묵적인 규칙을 발견했다(틀림없이 수많은 유색인도 발견했을 것이다).

제11장 “백인 여성의 눈물”, 228쪽
경찰이 비무장 흑인 남성을 사살하는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을 때, 내 직장에서는 연대와 지원을 구하는 사람들의 비공식 점심 모임을 갖기로 했다. 모임 직전에 한 유색인 여성이 나를 한쪽으로 불러 참석하고 싶지만 “오늘은 백인 여성들의 눈물을 지켜볼 기분이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대처하겠다는 말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모임을 시작하면서 나는 백인 참가자들에게 눈물을 흘릴 것 같으면 부디 방에서 나가달라고 말했다. 여러분과 함께 지원을 구하겠지만 다인종 집단에서 울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토론이 끝난 뒤 나는 잔뜩 성이 난 한 백인 여성에게 유색인 앞에서 울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이유를 한 시간 동안 설명해야 했다.

제12장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261쪽
어느 유색인으로부터 내가 생각하기에 부당한 피드백을 받을 때, 나는 다른 유색인에게 가서 내가 좋은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은 기분이 든다. 이 행동은 내가 부당한 공격을 받았다는 데 동의하도록 그 유색인을 압박하여 다른 유색인이 아닌 나의 편에 서게 하는 것이다.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공감하는 마음은 그를 위로하고픈 강한 충동을 낳으며, 나는 위로를 구함으로써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이 충동을 이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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