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은 홍콩독감이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퍼져 400만에 가까운 목숨을 앗아간 해이기도 했다. 2020년처럼 1968년에도 감염병의 최대 피해자는 가난한 흑인이었다. 이런 공통점은 우연의 일치일까? 이 책을 읽기 전이라면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마지막 장을 덮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은 필연”이라는 말을 하게 될 거라 장담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책을 통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로버트 케네디의 말인데, 그의 연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제가 미국의 흑인들이 당면한 어려움과 차별이다.
_8쪽(1968년과 2020년의 공통점)
“저는 오늘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합니다.”
그리고는 출마 이유를 “현재 흑인과 백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청년과 노년층 사이에 존재하는 틈”을 메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뒤 형 케네디의 말처럼 들리는 구절로 연설을 마쳤다. 어쩌면 형의 연설보좌관이었던 테드 소렌슨이 연설문을 작성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_45쪽(대선 출마 연설)
바비 케네디로서도 케네디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죽은 형이 쓴 책에 사인했고, 형의 이미지가 그려진 퀼트와 그림을 선물로 받았다. 1960년 자신의 지역구에서 형을 맞이한 정치인들은 형이 선물로 준 PT109 넥타이핀을 착용하고 형이 방문한 강당과 법원 청사 광장에서 바비를 맞이했다. 바비 케네디는 형이 1960년 선거운동을 시작한 장소인 디트로이트의 존 F. 케네디 광장에서 유세했고, 존 F. 케네디라는 이름이 붙은 거리와 고속도로를 이용해 이동했다. 오픈카의 뒷좌석에 앉아있을 때면 항상 (형이 암살당한) 댈러스에서의 환영인파를 떠올렸다.
_104쪽(형 케네디의 그늘)
존 바틀로우 마틴은 JFK가 때로는 자신이 한 공개적인 발언을 두고 사적인 놀림감으로 삼았지만, 자신이 한 말을 진짜로 믿었던 RFK(로버트 F. 케네디)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잭은 결단력이 있는 리더라는 인상을 주었지만, 바비는 자기가 옳은지에 대해 (형보다) 덜 확신했고, 더 주저했으며, 더 의심하고, 그런 사실에 대해 아주 솔직해 보였다”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 밑에서 언론보좌관으로 일한 피어 샐린저는 “존 케네디는 사람들에게 아주 친근하게 대했지만 속으로는 아주 냉정했다면, 바비 케네디는 겉으로 냉정했어도 속마음은 부드러웠다”라고 했다. 그는 JFK가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RFK는 “미국에서 삶의 근본을 바꾸고 싶어 했던 혁명가”였다고 했다.
_109쪽(로버트 케네디와 존 케네디)
로버트 케네디는 3월 25일 저녁 포틀랜드에서 실시한 영국 방송인 데이비드 프로스트와의 인터뷰에서도 뉴프론티어 정책과 거리를 두는 발언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라며 자신은 “1963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1968년에 일어날 일”에 대해 걱정한다고 한 것이다. 뉴프론티어가 “지나간 삶의 일부”라고 하면서 “1963년 11월까지 모든 삶이 케네디 대통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인정하면서도, 댈러스에서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후에는 “다른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 제게 있던 것이 이제는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_110쪽(홀로서기)
케네디가 탄 비행기가 착륙한 후 리처드 하우드는 비행기에 올라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사망 소식을 전달했다. 케네디는 멍한 표정을 짓고는 마치 자신이 총탄에 맞은 것처럼 머리를 뒤로 획 제쳤다. 그러고는 손으로 얼굴을 덮고는 중얼거렸다.
“아, 이 폭력은 언제 끝날까.”
_141쪽(마틴 루서 킹 목사 사망 소식)
처음에 케네디는 머뭇거리고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가장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는 듯 단어와 구절을 반복했고, 한마디를 하고는 다음 할 말을 생각하며 잠시 멈추기도 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어 갈라지려 했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고, 조명등에 비친 얼굴은 창백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청중들은 처음에는 시끄러웠고 조바심을 냈지만 케네디가 연설을 시작하자 조용해졌고, 연단 쪽으로 가깝게 다가갔다
_149-150쪽(킹 목사 추도 연설)
케네디는 시티클럽 연설문을 읽고 승인했을 뿐 아니라 클리블랜드로 가는 항공기에서 직접 수정까지 했다. 따라서 미국의 기업과 기관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을 폭도들의 총격이나 화염병과 동일시한 것은 궁극적으로 케네디의 결정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 롱워스가 “바비는 혁명의 전도사가 될 수도 있었다”라고 한 것은 케네디의 그런 말 때문이었다. 〈룩〉의 사진기자인 스탠리 테트릭이 “의원님의 실체는 혁명가입니다.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와 함께 숲을 누비는 게 더 어울리세요”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_172쪽(시티클럽 연설문)
“케네디 상원의원이 총에 맞았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정말로 총에 맞았습니다. 케네디 상원의원만이 아닙니다. 오, 맙소사.”
_420쪽(로버트 케네디 암살 상황)
“여기 계신 흑인분들과, 킹 목사 암살 이라는 부당함에서 모든 백인에 대해 불 신과 증오를 품고 싶은 유혹을 느끼시는 분들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말씀은, 저 또한 비슷한 감정이 든다는 겁니다. 저 역시 가족 중 한 명이 암살당했고, 그때 암살범도 백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는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힘든 시기를 이해하고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3000여 청중이 고요해졌다. 분노의 술렁임이 가라앉았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당한 1968년 4월 4일 밤,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의 흑인 밀집 거주지. 민주당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유세 중이던 로버 트 케네디(1925~1968 이하 RFK)는 폭 동 우려에도 예정된 연설을 취소하지 않았다. 보좌관이 준비한 원고를 무시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약 7분간 즉흥 연설했 다. 좀처럼 형 존 F 케네디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선 달랐다. 청중 대부분이 울었고, 연설이 끝나자 조용 히 흩어졌다. 킹 목사가 숨진 후 24시간 동안 미국 119개 도시에서 폭동이 벌어져 46명이 사망하고 2500명이 다쳤다. 하지만 인종 간 긴장이 팽팽하기로 악명 높은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총격이나 화염병 투척이 없었다. 유세 현장의 한 주민은“ 소란을 일으키러 갔는데 연설을 듣고 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저자는 1968년 3 월 16일 대선에 출마한 RFK가 6월 5일 로스앤젤레스 유세중 팔레스타인계 남성에게 총을 맞아 숨지기까지 82일간의 여정을 추적한다. 그가 어떻게 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미국인의 정신에 깊이 새겨지고, 조 바이든이“내 평생의 정치적 우상은 단 한 명”이라 꼽을 정도의 거물로 성장했는지를 분석한다.
비결은, 도덕성과 품위였다.
미국이 베트남전을 지속하면서 여성과 아이들까지 난민으로 만들었다는 자성이 일던 시기였다. RFK는 캔자스주립대에서 열린 첫 유세에서 “나는 베트남 문제에 관해 케네디 행정부가 초기에 내렸던 여러 의사결정 과정에 관여했다”며“ 과거의 오류라고 할지라도 그런 오류가 지속되는 상황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역사와 국민 앞에서 내가 져야 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리스 시인) 소포클레스가 쓴 ‘안티고네’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누구나 실수를 저 지르지만 훌륭한 사람만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친다. 유일한 죄는 자만이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향한 맹목적 질주를 경계했다. “GNP에는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은 포함되지 않는다. 시(詩) 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국민의 결혼생활은 얼마나 건강한지, 토론은 얼마나 지적인지, 그리고 공직자가 얼마나 청렴한지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연설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반전(反戰), 인종 문제, 빈부격차에 대한 미국인 개개인의 책임을 이야기했다. 이상주의자였지만 성인군자는 아니었다. 욱하는 성격이었고, 싫어하는 사람에게 잔인하게 행동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대중은 “내 선거운동의 핵심은 ‘품위’”라는 그에게 어떤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항상 네가 두려워하는 일을 하라.”
RFK가 수첩에 적어 다니던 랠프 월도에 머슨의 말이다. 저자는 암살을 우려한 측근들 만류에도 거리낌없이 군중에 자신 을 노출시킨 RFK의 영웅적 측면을 부각하면서도 “내가 백악관으로 가는 길에 총이 기다리고 있다”며 생일 폭죽 소리에도 머리를 감싸쥐고 고통스러워하는 약한 모습도 빼놓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매력적인 인물로 완성된다. 저자는 평한다. “로버트 케네디가 좋은 대통령이 되었을지 아니었을 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선거 운동 중 수백만 명의 미국인에게 자신이 좋은 사람, 어쩌면 위대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심어줬다는 사실뿐이다.” 홍콩독감이라는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대혼란에 빠지고, 킹 목사 암살로 흑백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미국 대선이있 었던 1968년은 올해와 판박이로 닮았다. 책을 덮으며 묻게 된다.
혼돈과 고통의 시기, 우리에겐 이렇게 위안과 감동을 주는 정치인이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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