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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Lifestyle/책Book

《중국과 협상하기》핸리 폴슨 주니어 지음

by Retireconomist 2020. 10. 6.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 (1999~2006)와 미국 재무장관(2006~ 2009)을 역임한 헨리 폴슨(74)은 자타 공 인 미국 내 중국통이다. 골드만삭스 재직 시절, 중국 정부와 협력해 국유 회사의 기 업공개와 주식시장 상장 등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장쩌민₩후진타오₩시진핑 등 역 대 주석과 안면을 텄고, 주룽지 전 총리, 훗날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는 왕 치산 저우융캉 등과 일했다.

 

폴슨은 이 책에서 중국 최고위층과 함께 차이나텔 레콤 기업 공개와 석유 회사 페트로차이 나의 홍콩 주식시장 상장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체득한 협상법을 공개한다. 저자는 특히 중국 기업 환경의 특수성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른바‘관시’(關係)가 좌우하는 인허가와 대출 관행, 관치금융의 폐해, 정실 인사, 하루아침에 기업 문을 닫게 하는 관의 횡포, 일관된 규칙 부재로 인해 불법과 합법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기업인의 애로 등이 나열된다.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려면 인맥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덩샤오핑 시진핑 등 주요 인물을 언급할 때마다 그들의 성장 배경과 정치적 부침은 물론이고 문화대혁명 등 중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도 함께 전달한다.

 

저자는 중국에서 자신의 역할을 인류에 불을 선물한 프로메테우스로 규정했다. 자신을 포함한 서방 은행가들이 낙후된 중국 자본주의 시장에 불을 붙여줘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미 중 상호 이익에 부합하고, 중국에 자본 주의 시장이 뿌리내리면 장기적으로 국민의 정치 경제적 자유가 확대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인권도 개선된다고 봤다.

 

저자는 중국의 비즈니스 환경에 낯선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썼다. 그러나 그가 공들여 설명하는 중국인의 기이한 행태는 반만년 중국 문화권에서 살아 온 한국인에겐 대체로 낯익다. 그럼에도 이 책은 독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중국 지도부가 왜 폴슨을 시장 개방과 기업 혁신의 파트너로 택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읽었을 때다. 책에서도 지적하듯, 폴슨이 골드만삭스 대표로 재직하던 1990년대 초 중국은 덩샤오핑식 개혁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업 투명성과 외부 감시가 부재한 상태에서 자본주의의 고삐만 푼 결과였다.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기업 생산성과 경쟁력은 떨어졌으며 국민은 철밥통을 끌어안고 안주했다.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앞두고 다시 한번 도약하려면 관리의 부패를 척결하고, 경쟁력 잃은 기업을 도태시켜야 했다. 잉여 노동력을 생산성 있는 분야로 재배치하려면 실업도 감수해야 했다. 기업의 덩치를 키우기 위해 외자 도입도 시급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폴슨으로 상징되는 월가 시스템이다.

 

“25년간 중국 관료들을 상대해보니 중국인은 전략적으로 행동하더라”고 저자는 썼다. 실제로 책 곳곳에서 폴슨을 전략적으로 응대하는 중국인의 방식을 확인하게 된다. 중국발 사스(중증급성호흡 기증후군) 사태가 사그라들 무렵, 폴슨은 서방 최고경영자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그런 폴슨을 중국은 욕조가 수영장만큼 큰 댜오위타이 국빈관 초호화 숙박시설에 묵게 했고, 저녁 TV 톱 뉴스와 다음 날 조간 1면에 그의 방문 소식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중국은 이제 방문해도 안전한 나라’라는 사실을 세계에 선전할 목적으로 그를 활용했다. 폴슨이 재무장관이 되자 대접은 더 극진해졌다. 그가 미중전략경제대화 참석차 베이징을 방문할 때마다 자금성 앞 호텔에 투숙시키고 밤이면 자금성의 모든 야간 조명을 켰다. 불꽃놀이로 그의 눈도 즐겁게 해줬다. 한국 대통령에게 혼밥을 하게 하고 수행한 기자들을 폭행한 사건이 겹쳐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폴슨을 자국 정치에도 활용했다. 2006년재무장관에 임명된 폴슨은 중국 내 첫 방문지로 차기 국가 지도자 시진핑이 당서기로 재직하던 저장성을 택했다. 저장성의 경제적 잠재력을 확인하기 위해 방문한 그를 시진핑은1972년 미 중 국교정상화 때 닉슨과 저우언라이가 회동했던 시후(西湖)로 데려갔다. 함께 산책하며 사진도 찍었다. 중국인들 보라고 한 행동이다.

 

책은 미국에서 2015년 출간됐다. 유능한 기업인이지만 국제정치의 본질을 모르는 저자의 순진한 사고가 곳곳에서 엿보인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안보 이익을 미 중 관계의 본질로 보는 것은‘냉전 시대 정치학이 낳은 부작용’이라 단언하며 “중국과 제대로 된 경제 관계만 구축되면 중국과 관련된 나머지 다른 사안도 자연스럽게 그뒤를 따를것”이라고 전망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를 되뇌며 국정에 임하는 중국 지도자들의 태도는 읽는 내내 인상 깊었다. 덩샤오핑의 개혁 노선을 이어받은 장쩌민은 폴슨 앞에서“중체서용 (中體西用 중국의 몸으로 서양을 배운 다)하겠다”다짐했고, 실용주의자 주룽지는 냉기가 도는 겨울 집무실에서 양복 밑에 내복을 받쳐 입은 차림으로 폴슨에 게 도움의 악수를 청했다. 한때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현실의 고통을 인내했다는 사실을 떠올리 면 씁쓸해진다. 

 

중국으로 간 프로메테우스

덩샤오핑 사후인 1997년, 중국 통신 사업체의 주식 상장을 논의하기 위해 주룽지(중국 국무원 부총리)를 만난 폴슨은 중국의 지도자들이 대담한 실용주의자들임을 깨닫는다.

 

〈뼛속까지 실리주의자〉였던 덩샤오핑은 1978년 권력을 잡은 뒤 개혁개방 노선에 따라 중국의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시장 원리를 도입했고, 이념적인 틀에서 벗어나 중국식 사회주의라는 독자적인 브랜드를 고안했다〉. 농업을 시작으로 산업과 금융 분야로 확대하면서 경제 전반에 개인 기업을 육성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의 정수는 〈중국인의 몸에 외국인의 기술을 접목〉하기면 하면 중국이 다시 한번 대국으로 올라설 거라는 믿음이다. 그렇게 20년간 중국은 〈대륙의 거대한 창고에서 인적 자원과 억센 근육, 두뇌를 꺼내 서방 세계로부터 구걸하거나 빌리거나 구매하거나, 도둑질한 지식과 혁신과 우수한 사례들과 결합시켰다〉.

 

1990년대 중반, 이제 장쩌민 지도 체제에서 중국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정부 보조금으로 부채를 메우며 공룡처럼 커져 버린 국유 기업을 손볼 계획이었다. 공산당 지도부를 중심으로 국유 기업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국제무대 수준으로 올리기 위한 매서운 개혁이 시작되었고, 외국 기업들을 끌어들인 기업공개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자 서방 세계의 기업들이 중국 국유 기업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앞 다투어 이 경쟁에 뛰어들었고, 골드만 삭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제 폴슨을 비롯한 서방의 은행가들이 〈프로메테우스〉가 되어,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들어가서 현지인들에게 자본주의 시장에 불을 붙이는 법을 경쟁적으로 전수했다〉.

 

서방 세계에서 온 프로메테우스들이 지핀 불꽃은 주룽지가 주도한 경제 개혁과 맞물려 활활 타올랐다. 그 불길은 양날의 검과 같았다. 국유 기업의 철밥통이 깨지면서 10만 개가 넘는 국유 기업이 문을 닫거나 합병되었고, 수천만 명의 노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 희생 위에서 국유 기업들은 군살을 빼고 흑자를 기록했다. 특히 세계무역기구에 가입(2011년)한 뒤부터는 생산성이 폭증했고, 이제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환 보유고를 갖게 되었다.

당이 지배하는 나라

중국과 거래한다는 것은 중국 공산당을 상대로 거래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폴슨에 따르면, 〈중국에서 공산당은 정치와 경제와 사회생활의 처음이자 끝이다〉. 공산당은 정부를 지배하고, 정부 지도자를 임명하고, 국가 운영에 관한 모든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군대, 경찰, 국가 안보 조직과 공안 조직, 지방의 감시 단체까지 관리한다. 국유 기업은 물론이고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사회단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직에 당원을 배치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일부 자본주의적 특징을 받아들였다곤 하지만, 여전히 레닌주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고 8700만 명(2014년을 기준)에 육박하는 열성 당원들을 거느리고 있다.

 

중국 공산당에게 〈경제적 번영은 정통성을 부여하는 원천〉이었다. 일당 지배 체제라지만, 중국 공산당도 인민의 신임을 잃으면 그 지도부는 언제든 밀려날 수 있었다. 폴슨에 따르면, 공산당 지도부가 경제 성장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그들이 당의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대가로 인민들과 거래를 맺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기회와 일자리 창출, 생활수준의 끝없는 향상〉이 그 거래 조건이다. 폴슨은 〈부시 대통령이 후진타오 주석에게 가장 악몽과도 같은 걱정거리가 무엇인지 묻자 매년 250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던 일을 떠올린다. 시진핑 역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00주년인 2049년까지는 〈부유하고 번영한〉 국가라고 중국의 목표를 밝힌 바 있다. 특히 2000년대 초반 경제 개혁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 공산당의 핵심 사업이었고, 폴슨의 골드만 삭스는 차이나 텔레콤, 중국은행, 페트로차이나 등 중국 국유 기업들의 일련의 성공적인 기업공개를 통해 그 일의 적임자임을 증명했다.

사업의 성패는 인맥

그럼 골드만 삭스는 어떻게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을까? 폴슨은 골드만 삭스의 대중국 사업 초기에 중국 실무자 몇몇의 승인만 믿고 일을 진행시키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임을 깨달았다. 〈법률이 아닌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나라〉에서 요직에 있는 한 명의 관료가 거래 자체를 무효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는 사업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특히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중국 정재계 최고위 인사들과 만남을 가졌다. 고위층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보증이었다.

 

또한 폴슨은 정말로 중요한 고객이라면 〈어렵기만 하고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부탁할 때도〉 기꺼이 예스라고 말했다. 희한하게도 〈광둥 엔터프라이즈 구조조정〉 건처럼 전혀 사업성 없어 보였던 일들이 나중에는 더 큰 보상(돈, 기회, 인맥)으로 돌아오곤 했다. 칭화 대학교 경제관리학원의 개혁 건도 마찬가지였다. 폴슨은 주룽지로부터 칭화대(90년간 중국 엘리트의 산실이었고, 주룽지, 후진타오, 시진핑이 이 대학 출신이다)의 경제관리학원을 개혁에 힘을 보태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중국 기업들은 이제 세계적인 기준에 걸맞는 전문 관리자를 필요로 했고, 중국 정부는 중국 최고의 명문 칭화대의 경제관리학원을 개혁해서 그 역할을 맡길 참이었다. 폴슨은 그 일이 금융이나 구조조정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음에도 상당한 열정을 쏟았다. 그는 〈중국에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 이론가가 아니라 기업을 경영할 인재〉라는 판단하에 사례 연구와 실무 중심으로 경제관리학원의 MBA 프로그램을 개편했다. 또한 하버드 경영대학원과의 자매결연을 주도했고, 개혁을 주도할 강력한 자문 위원회를 준비하여 요르마 올릴라, 손정의 같은 세계적인 최고 경영자들을 다수 끌어 모아 위원으로 참여시켰다. 그 결과 칭화대 경제관리학원은 명실상부 세계적인 경영대학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비록 의도하진 않았지만, 폴슨은 이 일을 통해 후진타오를 비롯해 칭화 대학교에 헌신적이라고 소문난 졸업생들과도 인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신호와 상징을 중시하는 문화

중국처럼 〈신호와 상징을 중시하는 문화에서는 크고 작은 모든 행동과 사건에 의미를 부여한다〉. 폴슨은 영리하게도 이 점을 잘 이용했다. 2003년 중국에서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발병해 국제 사회가 중국 여행을 꺼려할 때, 폴슨은 주변의 만류를 물리치고 〈거의 텅 빈 유나이티드 항공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사업 미팅이 목적이었지만, 사스 이후 중국을 방문한 서방 최초의 최고 경영자로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중국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덕분에 중국은 자국이 정상을 되찾은 안전한 나라임을 홍보할 수 있었고, 폴슨은 〈국빈관의 스위트룸〉에 더해, 중국 정부로부터 후한 점수를 딸 수 있었다.

 

그가 미중 전략경제대화의 일원(재무 장관)으로 후진타오 주석과 면담하기에 앞서 칭하이성(靑海省)을 방문한 것도 상징적인 제스처였다. 칭하이성의 메말라가는 칭하이호는 폴슨 자신이 관심을 쏟는 환경 문제를 잘 보여 주는 곳이었고, 동시에 후진타오 주석이 과거에 당 서기로 지내며 애착을 보였던 지역이었다. 그는 호수 주변의 중 맥주 캔을 납작하게 만들어 수습했는데, 8개월 뒤 폴슨을 만난 원자바오 총리는 돌연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폴슨 장관이 버려진 맥주 캔을 주웠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중국을 걱정하는 진심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좀 더 극적인 일화도 있다. 3차 미중 전략경제대화를 위해 베이징에 머물 당시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자고 있던 로버트 게이츠 국방 장관을 깨워 타이완 해협을 통과하려는 미국 항공모함의 기수를 돌렸다. 그 무렵 중국은 미국이 타이완에 무기를 팔려는 계획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폴슨은 〈중국이 절대로 이런 사건을 우연으로 여기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떤 명분을 내세우든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모욕당했다고 느낄 터였고, 향후 미중 전략경제대화가 지장을 받고 폴슨 자신의 위신도 깎일 터였다. 「로버트 게이츠가 여기에 와 있었다면 (……) 콘돌리자 라이스가 여기에 와 있었다면 해군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여기에 와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중국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중국의 기적 같은 경제 도약을 길게 서술한 서문에서 폴슨은 〈40년 전에는 대다수 미국인이 중국에 땡전 한 푼이라도 빚을 질 날이 올 거라고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쓴다. 〈이제 중국은 미국의 가장 큰 채권자가 되었으며, 미국 정부는 중국에 1조 3000억 달러에 가까운 부채를 안고 있다〉. 중국은 〈새로 발견한 근육을 이용해 세계 시장이나 주변국과의 격렬한 영토 분쟁에서 힘을 과시하고 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고착된 미국 주도의 아시아 질서와 세계 지배 구도에 도전하면서 우리와 부딪치고 있다.〉

 

이쯤 되면 중국의 부흥에 일조한 폴슨이 모국 미국에는 어리석은 짓을 한 셈이 아닐까? 잠자는 거인을 잘못 깨운 혹독한 대가를 미국이 치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비판에 대해 폴슨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는 중국의 번영이 거꾸로 미국의 이익에도, 세계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믿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경제 강국이 상호 보완적으로 움직일 경우 국제 사회에서 직면한 거의 모든 중대한 문제들을 더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서로 반목하는 경우에는 이런 문제들을 처리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중국은 우리나라와 체제와 이념이 다르지만 지정학적·경제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특히 미중 무역 갈등, 코로나 사태 등 최악의 시기에 한중 정상회담이 예고되고 있다. 어쩌면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체제와 이념은 테이블 옆으로 치우고 〈공동의 전략적 이해관계〉에만 집중했던 폴슨식 실용주의가 중국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상대하는 중국 지도자는 〈압록강을 건너 물밀듯이 밀려온 중국군〉의 후예라기보다, 〈쥐를 잡기만 한다면 그 고양이가 검든 희든 중요하지 않다〉던 덩샤오핑의 후예들에 가까울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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