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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란 무엇인가》양심 과잉과 양심 부재의 시대 | 마틴 반 크레벨트 지음

by Retireconomist 2020. 10. 4.

양심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는 ‘콘스시엔티아conscientia’이다. 그리스어 동의어와 마찬가지로 문자 그대로의 뜻은 자기 자신을 ‘앎’이다. 이 단어는 법률가이자 정치가인 키케로와 특히 철학자 세네카가 자주 썼다. 세네카의 저작에는 50번 정도 이 단어가 등장한다. 키케로와 세네카는 모두 스토아철학 성향을 가진 스승 아래서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콘스시엔티아는 개인 행위의 길라잡이 혹은 판관이다. 콘스시엔티아는 그가 저지른 일의 결과에 대해 비난하거나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세네카는 이런 말을 했다. “콘스시엔티아는 인간 내면의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다.”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앎과 달리 콘스시엔티아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과 관련해 개인 내면에 숨겨진 앎이다. 신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풀려나 인간은 자연과 합치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런 인생은 무엇보다도 조화로워야 한다고 세네카는 덧붙인다. 앞만 보고 황급히 달리기만 하는 인생은 결코 질서를 세울 수 없다.-〈1장 양심의 근원과 본성을 찾아서〉

ㆍ 요컨대 가톨릭교회는 양심의 자유를 단호히 반대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런 입장을 고수한다. 양심을 중시한 개신교는 달랐다. 개신교는 양심을 교회-이론상으로 종파가 무엇이든 모든 교회-와 사제가 차지했던 자리에 올려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과 대단히 흡사하게 개신교는 몇몇 학자가 이성과 결합하려 했던 양심을 자유롭게 떼어놓았다. 그 대신 개신교는 양심을 은총의 전제조건에서 오히려 은총의 결과로 바꾸었다. 무엇보다도 개신교는 오랜 세월 동안 짓눌러온 미신과 의례의 낡은 잔재에 묻혀 있던 양심을 해방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양심은 도덕적 올바름의 궁극적인 보증으로, 인간이 저마다 자신의 내면에 가지는 것이 되었다. 대소사를 막론하고 양심은 우리 인간이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준다. 사도 바울의 시대 이후 이보다 더 강하게 양심이 주장된 적은 없었다. 양심을 가지면서 치러야 하는 대가는 끊임없는 “불안, 참회, 두려움”이며,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아픔과 가책”이다. 개신교에 반대하는 쪽은, 지금도 여전한데, 그처럼 양심을 강조하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일”이며 인간을 자기 파괴로 이끈다고 주장했다.-〈2장 기독교의 세기들〉

ㆍ 군주의 권력남용과 그에게 노출된 권력의 유혹에 굴복하는 일을 막아줄 유일한 것은 양심이다. 마르티누스 브라카렌시스는 군주야말로 네 가지 가장 중요한 덕목, 즉 신중함과 너그러움과 일관성과 정의감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비야의 이시도루스는 순수함, 겸손함, 온건함, 친절함, 자비로움과 언제라도 악에 선함으로 답하는 자세를 덧붙인다. 무릇 군주는 선하고 도덕적인 삶을 이끌 수 있어야 하며, 신의를 지키고 매사에 친절하고 자비로우며 정의롭고 진실하며 인내심이 많고 너그러우면서 헌신할 줄 알며, 먹고 마시며 옷을 입는 일에 지나침이 없으며 올곧은 예절과 도덕으로 되도록 겸손하며 상냥하고 구호를 베푸는 손길에 아낌이 없어야 한다. 군주는 참을성과 진실함 그리고 배움을 사랑하고 악한 생각을 멀리하는 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갖추는 일은 앞서 열거한 특성을 가진 사람을 주변에 두고 조언을 구할 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군주는 쉽사리 부패한다. 거듭 확인하지만 이런 생각에서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은 구분되지 않는다. -〈3장 마키아벨리에서 니체까지〉

ㆍ 조사와 재판을 받는 동안 대원들은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기 일쑤였다.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범을 상대로 열린 재판과 마찬가지로, 유감이나 후회를 말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학살에 가졌던 거부감은 그게 무엇이든 주로 물리적 혐오 탓에 생겨난 것이지 도덕적 원칙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양심을 끝내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양심을 입에 올리는 것이 선택의 여지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5장 제3제국의 양심〉

ㆍ 헤겔의 국가 개념이야말로 공공의 양심을 지배하는 원리라고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는다. 양심의 근거를 국가보다 더 높은 도덕성에서 찾거나, 혹은 니체처럼 아예 도덕을 넘어서는 차원으로 나아가며 국가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그리고 이런 목소리의 주인공은 흔히 투옥되고 재판을 받아 유죄를 선고받고 처벌되었다. 이와 관련해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다. 그 이유는 바로 국가의 심장을 직접 겨누기 때문이다. 국가는 전쟁 수행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긴다. 또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돈으로 병역 면제를 사면서 국가를 조롱한다. 이런 태도는 양심이 단지 말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과시한다.-〈6장 옛 우상과 새로운 우상〉

ㆍ 인간을 다른 동물과 결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플라톤 철학에 기대어 기독교 신학자들이 1500년 동안 주장한 대로 불멸의 영혼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 곧 이성이다. 이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결과와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인간 심리의 자기보존 능력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인간이 서로 주고받는 호혜의 자세를 가져야 할 필요성을 이해한다. 호혜성은 필요하다면 보상의 약속과 처벌의 위협으로 인간이 되도록 서로에게 좋은 행동을 하며 각자 자기보존을 하는 도덕성의 유일한 기초이다. 이런 도덕성으로 비로소 질서 있는 사회생활이 가능해진다. 이런 관점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홉스의 양심 이해로 직접 이끈다. 양심은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내면의 진실’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그저 이름일 뿐이다. 양심은 “인간이 자신의 새로운 의견에 급속도로 사랑에 빠져, 그것이 아무리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완고하게 옳다고 고집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이 새로운 의견을 부르는 이름이다.-〈7장 기술 시대 양심의 자리〉

ㆍ 지금껏 살펴본 양심으로 미루어볼 때 인간, 어쨌거나 서구인은 아주 오랫동안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인생을 살 수 없는 모양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예를 들어 일본과 중국과 비교해볼 때, 서구는 항상 사회보다 개인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리라. 서구 사회는 개인을 그 사회가 정한 적당한 자리에 머무르게 하기에는 결속력이 충분히 강하지 않다. 그러나 특히 중국에서 선과 악은 사회의 산물이기에 상대적인 가치로 여겨진다. 서구는 다르다. 서구인은 항상 죄책감을 걸어둘 아르키메데스 점을 찾는다. 새로운 우상을 찾아야만 했으며, 새로운 우상은 찾아졌다. 가장 중요한 우상 세 가지는 ‘인권’과 ‘건강’과 ‘환경’이다. 갈수록 쇠퇴하는 종교와 견주어 세 가지 우상은 단호할 정도로 세속적이다. 셋 모두 출발은 미미했다. 특정 개인들이 어떤 특별한 악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아 행동에 나서며 관심을 모으려 시도한 것이 그 출발이다. 이 개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줄 대중을 발견했고, 이 대중의 규모가 커지면서 운동이 조직되었고, 셋 모두 실로 거대해졌다. 이 조직화 과정에서 운동은 힘을 키웠고, 심지어 몇몇 경우에는 대포를 장착하기에 이르렀다.-〈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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