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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Column

[금융주의보-355] 새치기가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

by Retireconomist 2016. 1. 21.

간혹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체되고 긴장이 풀릴 무렵 느닷없이 끼어드는 사람의 눈총이 관대하지 못한 나의 눈길이 오히려 미안하게 합니다. 새치기가 어쩌면 노약자나 눈치 빠른 사람에게 부여된 특권 같기는 한데, 단지 도덕적인 판단의 근거로만 치부되어 관용을 통해서는 용서할 거리도 안 되는 단순 우발 사건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 새치기는 용납되어도 무방한 것일까요? 이참에 새치기를 경로우대권 소유자에게 허용하자고 공론화할까요? 맞지 않습니다. 새치기는 옳지 않습니다. 단지 도덕적인 관점을 넘어서 사회학적으로 특히 경제학적 관점에서 옳지 않습니다.


새치기는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에 따라 잘못된 행위입니다.


새치기하게 되면 순서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한 명이지만, 그 외 기다리는 모든 사람의 순서가 미뤄지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예를 들어봅니다. 전국 노래자랑 공개방송에서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도 키 작은 진행자 송해 선생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을 때 수 많은 관람객은 동시에 다 같이 일어서야 하고, 결국에는 모두 일어서서 공개방송을 지켜봐야 한다는 얘기가 됩니다. 모든 사람이 공개방송을 잘 보기 위해서 다 같이 일어서서 보게 되면 앉아서 관람하는 것과 똑같은 조건임에도 서서 보는 피로감만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드물지만 이런 예도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이 경험 하셨을 것입니다. 영화관입니다. 은막에서는 아주 심각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들립니다. 그냥 끊어버리면 조금 용서가 될 텐데 굳이 친절한 답변을 하면, 순간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릅니다. “나... 영. 화. 관. 에서 영. 화. 보. 고. 있. 어. 끝. 나. 면 ... 전. 화. 할. 께.” 거기에 더해서 통화가 끝나지 않습니다. “나... 영. 화. 보. 고. 있. 다. 니. 까... 영... 화.... 이. 따. 가. 전. 화. 할. 께.... 나. 중. 에...” 친절한 이웃 한 사람으로 같은 영화를 관람하는 다른 관객의 분노는 용서의 한계를 넘나들게 됩니다.


경제학자 케인즈 (J.M. Keynes)는 ‘절약의 역설(Paradox of Thrift)’을 통해서 개인이 절약하는 행위는 미래 예상 소득이 증가하여 바람직할지는 몰라도, 이것이 확산하여 사회 전체가 저축을 늘리면 상대적으로 소비가 감소하게 되고 판매가 되지 않아 재고가 늘어나게 되어 연쇄적으로 기업은 생산을 줄여야 하고, 생산이 줄게 되면 직원의 필요가 줄어 실업이 늘게 되고 국민 총생산이 감소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도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불황을 감지한 가계들이 저축을 늘리면서 심리적 위안을 찾을 수 있으나, 국가 전체로 보아서는 경기를 더욱 악화시키게 됩니다. 소비해야 공장이 돌아가고 고용이 창출되는데 말입니다.


경기가 좋지 않아 취업도 포기하고 연애도 포기하고 결혼도 포기하고 자녀도 포기한다고 합니다. ‘포기’가 무슨 식당 메뉴처럼 흔하디 흔하게 언급되는 어려운 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여건이 되어 보이는데 무슨 신 조류니 시대정신이니 하면서 출산을 선택적 장신구처럼 가볍게 여기는 젊은 부부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출산을 포기하는 것은 ‘새치기’를 하는 것과 같은 ‘구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 부부에게는 양육의 부담 (정신적, 육체적, 시간적 등등)에서 벗어남으로 덤으로 얻는 이익은 많지만, 인류 전체로 보아서는 유효 수요를 줄이는 악덕을 하는 것입니다.


출산을 늘려야 하는 정부가 내놓은 졸속정책을 두고 출산을 하지 않는 빌미로 삼는 것은 단순 경제적 사고 측면에서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더구나 많이 낳았던 시니어는 육아의 어려움을 알기에 주니어에게 자녀 없는 결혼도 용인하는 분위기입니다. 사회적 통념은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다수를 바라보는 시야의 확대가 필요합니다. 자녀를 낳지 않으면 물건을 살 사람이 줄고, 판매가 줄고, 그러면 기업이 고용을 줄여야 하고, 그러면 경제는 더욱더 악화의 일로를 걷게 됩니다. 자녀가 없는 부부에게는 자녀를 위해 쓰지 않은 자산이 쌓여 상대적으로 위안이 되겠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침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결론입니다. 의도적 출산 포기는 새치기와 마찬가지로 ‘구성의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정치인들이 선거용과 실행용 공약이 달라지는 것은 새치기와 마찬가지로 다수를 위해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경제학적인 시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 김형래


[새치기가 성가실 때 막힌 길이 차라리 반갑다 /사진.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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