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차는 언제나 향과 맛으로 가을을 만나게 하는 타임머신
국화 우러난 물을 마시고/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나는 앞으로도 도저히
이런 맛과 향기의/꽃처럼은 아니 될 것 같고/또 동구 밖 젖어드는 어둠 향해/
저리 컴컴히 짖는 개도 아니 될 것 같고/
나는 그저/ 꽃잎이 물에 불어서 우러난
해를 마시고/새를 마시고/나비를 모시는 사람이니
-문성해 ‘국화차를 달이며’ 中
시니어 S는 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명성과 장수를 자랑한다.
주변 사람들은 성씨가 같다는 것만으로 추가 검증 절차 없이 그의 얘기를 귀담아듣는다. 17세기를 풍미한 우암은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 그리고 노론의 우두머리였다. 또 혹자는 송시열의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등장하는 점을 빗대 조선을 ‘송시열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그의 위상은 대단했다.
‘우암이 사약을 받았기에 83세로 세상을 떠났을 뿐’이라는 시니어 S는 우암의 장수(長壽) 요인을 즐겨 마시던 국화차에서 찾으며, 나름의 주장을 지인들에게 강조하곤 한다.
시니어 S는 검거나 붉은 서양차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국화차만 즐긴다. 그리고 가끔 문성해 시인의 ‘국화 우러난 물을 마시고/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라는 시구를 암송한다. 그에게는 국화차를 마주하는 때가 바로 ‘가을’이고, ‘건강 장수’의 이벤트 시간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꽃, 국화
국화는 동양에서 재배하는 관상식물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꽃이다.
중국이 원산지라고는 하나, 그 기원은 현재 우리나라 전역에 자생하는 감국(甘菊)이라는 설과 산국(山菊)이나 뇌향국화와의 교잡설, 감국과 산구절초와의 교잡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신라 시대 이전에 백국(白菊)이 개량되었다는 것과 4세기 백제 16대 진사왕 때 일본에 귀화한 학자 왕인(王仁)이 가져간 국화 종자 5가지(靑·黃·白·赤·黑)가 일본 국화의 시초라는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중 가장 으뜸으로 친 국화는 황국(黃菊)이었는데, 지금은 이를 금국(金菊)이라고도 한다. 일본 천황의 상징이기도 하며, 일본 경찰의 패치와 옛 일본군 무기에도 국화 문양을 사용했다. 이처럼 국화가 벚꽃보다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면이 더 강한데도, 우리나라 역시 오래전부터 국화를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의 하나로 여겨왔기에 국화에 대한 거부감이 벚꽃보다는 크지 않은 듯싶다.
15세기 조선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우리나라 원예 기술서의 효시인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고려 충숙왕 당시 중국의 천자(天子)가 국화를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책의 부록인 ‘화목구등품제(花木九等品第)’에도
“국화(菊)는 매화(梅), 연꽃(蓮), 대나무(竹)와 더불어 운치가 높고 뛰어난 것 중 으뜸으로 쳤다”고 적혀 있다.
군자의 모습을 닮아 선비가 사랑한 꽃
국화를 일컬어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고도 한다. 여러 꽃이 서로 뽐내며 앞다퉈 피는 때는 숨죽이고 있다가 날이 쌀쌀해지는 가을에 서리를 맞으면서 고고히 꽃을 피운다. 이런 국화에서 우리 선조는 고상한 기품과 절개를 지키는 군자의
모습을 발견했으리라.
우리나라뿐 아니라 4세기 중국 동진 사람으로 은일(隱逸)의 선비로 알려진 도연명(陶淵明)의 국화 사랑 또한 유명하다. 11세기 북송 시대에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주돈이( )는 <애련설(愛蓮說)>에서 “국화야말로 은둔하는 사람의 꽃이다(菊花之隱逸者也)”라고 했다. 이는 군자 가운데서도 ‘은둔하는 선비’와 국화의 이미지가 잘 들어맞는다는 의미인 듯하다.
국화, 향과 맛과 건강을 전하다
국화주를 담가 마시거나, 국화전과 국화만두를 즐겨 먹는 시기가 있다.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重陽節)로, 중구(重九)라고도 한다. 중구는 9가 겹쳤다는 뜻이고, 중양은 양이 겹쳤다는 뜻이다. 중양절에 국화주를 마시면 무병장수한다고 한다. 중국 6세기 양(梁)나라의 문학가 오균(吳均)의 <속제해기(續齊諧記)>에는 불로장생의 의미가 담긴 국화로 담근 국화주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에 장방이라는 현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근항경이라는 사람에게 예언을 하나 했다. “올 9월 9일 자네의 집에 반드시 재앙이 닥칠 것이네. 이 재앙을 막으려면 집안사람 각자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산수유를 넣어 팔에 걸고 높은 곳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면 화를 면할 걸세.” 근항경은 장방의 말에 따라 그날 집을 비우고 가족과 함께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장방이 말한 대로 국화주를 마셨다. 집에 돌아와 보니 닭이며 개, 소, 양, 돼지 등 집에서 키우던 짐승이 모두 죽어 있었다. 장방은 이 소문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짐승들은 사람 대신 죽은 것이라네. 국화주가 아니었다면 자네 식구는 모두 죽었을 걸세.” 그 후부터 중국에서는 중양절인 9월 9일에는 상서롭지 못한 것을 떨쳐버리고 장수를 비는 마음에서 국화주를 마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술은 국화주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맛과 향이 그윽한 술로 여긴다. <동의보감>에는 “국화주는 약 1,500년 전부터 빚기 시작했다. 담근 지 20일이 지나면 마실 수 있어 ‘스무주’라고도 한다”고 쓰여 있다. 국화는 <동의보감> 외에 <임원십육지>, <증보산림경제>에도 “예부터 불로장수 및 상서로운 영초(靈草)로 숭상되어왔다. 국화주는 우리나라 재래 술 가운데 하나로, 국화에 생지황, 구기자, 나무껍질을 넣고 찹쌀로 빚은 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국화주를 마시고 장수했다는 많은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이것이 국화주를 연명주(延命酒) 또는 불로장생주(不老長生酒)라고 하는 이유다.
삶의 여유를 만끽하는 이들이 주로 찾는 국화는 은은한 향기를 품은 데다, 그 색 또한 다양해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 많은 꽃 가운데 특히 깊고 오래가는 향기와 품격 있는 모습을 갖춰 꽃 중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으뜸으로 여겼다. 그뿐 아니라 국화에는 혈압을 낮추고 중풍을 예방하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한약재로도 쓰인다. 국화의 효능은 <본초강목>에 “혈기에 좋고 몸을 가볍게 하며 위장을 평안케 한다. 향기에는 영험한 품격이 있어서인지 감기, 두통, 현기증에 유효하다”고 적혀 있다. 국화는 민간요법으로도 다양하게 쓰인다. 두통에는 황국화를 쓰는데, 특히 말린 꽃을 베갯속으로 넣으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또 눈이 침침할 때는 백국화를 달여 마신다.
시니어 S는 “인터넷에서 국화차의 효능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한의학에서는 분노와 불안, 수면 장애는 열이 너무 올라 생기는 증상인데, 화가 날 때 국화차를 마시면 열이 내리고 들뜬 상태를 가라앉히는 데 좋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라고 했다. 탈도 많고 말도 많던 올해를 마감하면서 국화를 딸 때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부터 내년 가을까지 분노도 다스리고 향과 맛으로 사시사철 가을을 만나게 해주는 타임머신 같은 국화차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듯 진정 국화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인가 보다.
가을 향기 그윽한 국화차 만들기
꽃은 언제 따는 게 좋을까?
국화는 피고 질 때까지 보통 60일이 걸린다. 그 사이에 찬 서리를 보름가량 맞아야 약으로서 효과가 있다. 무서리가 내리거나 열흘 이하로 찬 서리가 내리는 지역의 국화는 약효가 없다니 유념한다.
어떤 꽃을 딸까?
국화차에 쓸 식용 국화는 소국 중에서도 열매를 맺게 하는 심이 없고 솜털처럼 부드러워 씨가 맺히지 않는 것으로, 농약 등에 오염되지 않은 노란 감국(甘菊)이 좋다.
어떻게 가공할까?
감국에는 독성이 있으니 그냥 말려 먹으면 안 된다. 산이나 들에서 핀 국화(甘菊, 山菊)를 채취한다. 그다음 소금(죽염이 더 좋고, 양은 물맛이 약간 간간할 정도)을 물에 풀어 끓인다. 소금물이 끓기 시작하면 국화를 넣고 1, 2분간 데친다. 데친 국화를 흐르는 찬물에 소금기가 다 빠질 때까지 충분히 헹군다. 그런 다음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충분히 뺀다. 물기를 뺀 국화를 한지나 냄새가 나지 않는 종이에 널어 말리는데, 온돌방을 이용하면 더 좋다. 완전히 말려 밀봉해 보관한다.
어떻게 마실까?
끓는 물이 조금 식은 90℃ 정도의 물을 담은 유리 다관에 말린 국화 서너 송이를 넣고 1분 정도 우려서 마신다. 너덧 번 우려 마실 수 있다. 따끈한 물에서 3분 정도 지나면 예쁜 꽃송이가 활짝 피어나므로 녹차 위에 한 송이씩 띄워 마시면 그윽한 향과 운치를 즐길 수 있다. 말린 국화와 꿀(끓인 꿀)을 고루 버무려 오지그릇에 넣어 3~4주일 밀봉했다가 끓는 물에 타서 마셔도 좋다
글 김형래(시니어 칼럼니스트·시니어파트너즈 상무, <어느 날 갑자기 포스트부머가 되었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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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김형래가 작성한 것으로 국민은행에서 발행하는 GOLD&WISE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omoney.kbstar.com/quics?page=C017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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