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이었던 높이에서 내려와야 한다.
은퇴할 시점이 되면 비록 ‘을’이나 ‘병’과 같은 계약 당사자의 생태계 먹이 사슬 하단에 위치했던 곳에서 근무했을지라도 조직 내에서는 ‘갑’의 위치에 있던 경우가 많다. 직위가 높지 않았어도 ‘선임’의 위치에 있었기에 그 그룹에서는 ‘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은퇴 후에도 이러한 우월적 지위에 따른 습관적 행동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익숙한 것과의 이별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은퇴의 길에서는 상하 관계와 그에 따른 명령과 수행의 체계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리고 누구의 위나 아래가 아닌 누구나 같은 높이의 ‘평등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래서 처음 맞게 되는 은퇴 이후의 세상이 그 이전에 누리거나 생활했던 곳에서 본인에게 대해 주었던 높이가 완연히 다르기 때문에 겪게 되는 당혹스러움과 서운한 감정으로 인해서 오랜 시간 힘들어하는 시니어를 흔히 만날 수 있다. 물론 스스로는 ‘갑’이 아니라고 분명히 현실을 읽고 있지만 몸과 행동이 수 십 년 간 몸에 배인 익숙해짐과 이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갑’의 높이에서 빨리 내려오는 은퇴자일수록 잘 적응하고 불편 없는 은퇴 생활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이를 경험한 시니어들이가 가르쳐주는 미덕인 것이다. 은퇴 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점점 더 위로 올라가는 생활이 아니라, 서로 같다는 것을 느껴가는 평등 생활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누구에서 명령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위하고 존중하는 높이로 내려와야 한다. 그것을 깨닫고 수긍하기 전까지는 부대 끼고 갈등 하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지출에 있어서는 한 단계 낮아지는 것이 좋다.
세상은 그래도 은퇴라는 것을 통해서 현직 시절과의 변화나 지출 수준이 낮아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더 높은 사회적 또는 경제적 지위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무리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특히 경조금에 있어서는 조금 더 내려오자. 체면이란 것이 주는 심리적 포만감은 무시할 수 없는 크기로 작용하고 현재 상황을 좀 더 과장되게 보일 수 있는 단 한방의 처방 중 하나가 경조금이어서 피하려고 하기 보다는 체면을 세우는 절호의 기호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누구도 인정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나 정기적인 수입이 없어지거나 다른 형태로 바뀌거나 줄어든 상태에서는 더더욱 이러한 현실을 과장되게 포장해서 경제적 위축을 상대적으로 위로 받으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경조사에 적용되는 부조금은 준뇌물이나 상납 또는 사회생활이라는 측면에서 피할 수 없는 고지서와 같은 반강제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은퇴 이후에는 강제성에서 벗어나 수주에 영향을 미치거나 진급에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은퇴자가 가진 또 하나의 자유로움이다. 은퇴자에게 누구도 경조금을 적게 넣었다고 추가 지출을 요청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쩨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체면을 조금 내려 놓으면 장생 위험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위안을 받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서로 괴로운 일을 돌아가면서 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과시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험과 실력을 조금 낮추어서 보여도 좋다.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도 하고, 세계 최초의 서비스를 만들기도 한 것이 바로 은퇴 세대의 경험이고 경륜이다. 어쩌면 젊은 세대나 동년배에게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아니어서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하나, 그야말로 단독으로 처리했던 일이 결코 아니었다는 겸손함을 잃어버리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설령 혼자서 무엇을 해낼 수 있어도 그것을 조금 작게 보일 필요가 있다. 현역 시절에는 보이지 않는 조직과 그 조직에서 실제로 힘을 나누고 협력했던 협력자가 이를 뒷받침했기에 능히 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거와 같은 수준의 일을 지금도 해낼 수 있을까? 뼈 마디도 약해지고 근육도 약해지고 신경의 반응 속도도 늦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모한 도전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현장의 섬세한 경험을 접하지 못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거나 수련하지 않았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무리하게 과거 실력을 꼭 보여주겠다고 자신하지 않는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다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이다.
과거의 지위는 가슴 속에 담고 자연인으로 내려와야 한다.
은퇴 기간 계속 따라다니는 직위나 계급은 현직에서 최고로 높았던 직위가 계속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사장님, 전무님... 그것이 주는 허세 심정은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사회적 영향력이 남아있을 때 가치가 있는 지위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실속 없는 향수일 뿐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반장의 지위가 성년이 되어서는 하나의 추억일 뿐 영원한 호칭이 되지 않는다. 명예를 존중하는 몇몇 직위에는 맞는 것일지 모르나, 스스로 높은 지위를 타인에게 강요하듯 고집하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로 보이게 마련이다. 직을 떠나면 명함도 사라진다는 것이고 과거의 직위도 사라진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자연인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월이 만들어준 소중한 경험은 그 누구보다도 소중히 갈고 닦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경험은 내려 놓아서는 안될 자산이고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을 나누어줄 수 있는 노력과 아량이 있다면 그 어떤 지위나 경험보다 소중하고 존경할 대상이 될 수 있다. 경험을 필요한 이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은 최고의 겸양과 겸손함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것만은 내려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김형래
본 칼럼은 교보생명에서 매월 발행하는 잡지 'Health & Life' 2012년 6월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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