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9년 8월 15일, 일본의 후쿠오카 현 구루메시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아마노 수이치(天野周一)씨가 ‘정주관백(亭主關白, ていしゅかんぱく)협회’ 설립을 결의하게 된다. 설립 이래 월간 <구루메> 홈페이지에 ‘전국정주관백협회’ 코너를 개설하고, 2004년에는 실제로 ‘전국정주관백협회(www.zenteikyou.com)로 발전하게 되었다.
본래 ‘정주관백’이라는 말은 ‘권력이 있다’는 뜻과 함께 ‘뽐내고 있다’는 의미가 있고, 사전적인 의미로는‘폭군’이라는 뜻이다. 가정에서 남편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지극히 가부장적인 남편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지만 협회는 집안의 천황은 아내이고 그 2인자가 바로 ‘정주관백’일 따름이니 남편들은 그에 걸맞은 태도와 생활을 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렇게 비굴해져야 한 이유는 무엇일까? 베이비붐 세대, 단카이(團塊) 세대 남성들이 은퇴를 하고 인생 후반에서 유일한 생활 무대인 가정에서 설 자리가 없어지는 현실을 바탕으로, 남편이 가정에서 2인자로서 역할을 낮추고서라도 가정에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혼 당하지 않는 방법’과 가정 내에서 남편의 지위를 계속 이어가는 방법, 그리고 황혼 이혼에서 벗어나는 실천 과제도 도출했다. 이른바 가정 내에서 현실 인식과 자기 고백을 통해서 가족의 일원으로 평등한 자리라도 찾자는 것이다. 이 ‘정주관백협회’에서는 총 10단위 인정 기준을 정해놓고 스스로의 아내 사랑하는 정도를 측정하도록 하고 있다. 초단은 결혼한 지 3년 이상이 경과했어도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다. 2단이 되려면 가사 도우미처럼 집안일을 잘하는 남편, 3단은 바람피운 적이 없는 남편, 4단은 항상 ‘레이디 퍼스트(Lday First)’를 실천하는 남편, 5단은 사랑하는 아내와 손을 잡고 산책하는 남편, 6단은 사랑하는 아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남편, 7단은 고부 간의 문제를 하룻밤 사이에 해결할 수 있는 남편, 8단은 “고마워요”를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남편, 9단은 “미안해요”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남편이고, 10단은 “사랑해”를 수줍어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남편이면 인정한다고 한다. 가족관계 회복을 위해 10단이 되도록 노력하자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또 사랑의 3원칙으로는 ‘ “고맙다”는 말을 주저 없이 하자!’, ‘두려워 말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자!’, ‘부끄러워 말고 “사랑한다”고 말하자’로 정하고 있다. 이런 문구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모습을 보여온 단카이 세대의 직전 세대인 화상 세대(火傷 : 전쟁에 휘말린 세대)는 물론이고 단카이 세대 아버지들에게도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여성에게 남성과 평등한 교육 기회가 주어지고, 고도 성장기에 과중한 업무 탓에 가정을 돌보지 못한 단카이 세대 가장들은 퇴직할 때에야 가정을 돌아보게 된 것이고, 동시에 이혼의 위기에 내몰리고 나서야 아내와 가정을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더구나 협회 출범 무렵 일본 법원은 ‘아내의 가사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2007년 4월부터 ‘후생연금;부부분할제’가 시행되면서 후생연금에 대한 50%의 권리를 배우자에게 부여하는 파격적인 법안을 통과시켜, 남편들은 뒤늦은 후회와 반성으로 이혼 당하지 않으려고 이런 협회까지 만들어 집단으로 머리를 짜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황혼 이혼의 80%가 아내가 청원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 세대의 이혼율 증가세는 멈추지 않았다. 이런 일본의 가족 해체 과정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직접적이고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은퇴 후, 가장 먼저 부부 관계를 회복하자
가부장적인 문화가 지배적이던 시대를 뒤로하고 은퇴 가족이 빠르게 증가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시급하고 절실하게 가족 관계 회복 프로그램을 고려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은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울타리가 바로 가족이라면,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부부간의 관계가 견실하고 따듯해야 하지 않겠는가. 은퇴하기까지 아내의 도움과 남편의 노고가 상호 작용했음에도 부부가 함께하는 놀이 문화에 익숙지 않고, 부부가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인색할 정도로 방법과 실천에 있어 미숙하고 부족한 것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은퇴 후 사회적 관계가 풍부한 아내에 비해 남편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피하려는 경향마저 상당히 강한데, 이를 극복하는 것부터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함께하면 즐거운 일을 찾아서 실천하는 것이 부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특히 생활 공간에서 분업보다는 협업을 하는 팀워크를 잘 짜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문제에 다가서는 접근 방식과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해결했을 때 성과에 대해 서로 만족하는 공통의 경험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친지나 친구들을 초대하는 일이 생기면, 메뉴를 함께 정하고 재료를 함께 구입하고 조리와 요리 과정을 함께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토록 사랑했던 배우자에게 은퇴를 통해서 주어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값지게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아내의 원할한 사회적 교류를 위해 남편 스스로 음식을 준비하고 혼자서 식사하는 것 등을 부담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새로운 경험을 함께하는 것도 중요하다. 단순하게 여행이라는 수동적인 활동을 통해 관계를 확인하는 것보다, 텃밭이라도 함께 가꾸는 것이 더 생산적이고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주말농장의 농지를 선택하고 작물을 고르고 밭을 메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수확하는 일련의 과정을 함께한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도 부부의 대화를 늘리는 일이다. 손자 손녀를 함께 돌보는 일도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또 부부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독립성을 인정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따라서 서로의 시간과 사생활을 일정 부분 인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은퇴 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가정이고, 가장 오랫동안 얼굴을 대하고 살아야 할 이들이 가족이다. 가족 관계 회복이야말로 정년을 눈앞에 둔 50대에게 가장 중요한 노후 준비 방법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울타리가 가족이고 기쁨과 슬픔을 제한 없이 나눌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힘을 주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음식 준비가 아내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곤란하다. 나름의 편차가 심한 것이 음식 준비에 대한 아내의 역할로 조사되고 있다. 당연하다고 인정하면서 아내의 일방적인 의무로 생각하는 것은 다시 한 번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남편의 은퇴와 함께 식사 준비하는 데 아내의 업무량이 크게 늘어난다면 그런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남편도 반드시 노력할 부분이 있다. 남편이 요리 학원에 다니면서 가정에서 아내의 음식 만들기 부담을 줄여준다면 더없이 사랑받을 것이다. 또 직장 생활을 통해서 경험한 넓은 세상의 여러 모습을 함께 보고 설명하며 눈높이를 맞추는 노력도 필요하다. 아내의 사회 활동은 남편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이기 십상이므로 이에 대한 경험을 과시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하다.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아닌 정감을 교류하는 아내의 전화 통화는 절대로 방해하지 않는다. 아내의 정년은 남편이 사망할 때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는 한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남편에게도 힘이 필요하다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직장 생활에 쏟느라 가정을 멀리하다가 어느 날 모든 짐을 싸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을 자기 생활에 갑자기 끼어든 방해 요소라 생각하지 않고 받아주는 아내의 절대적 지지가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걸음마’ 가르치듯 실수를 격려로 보듬고 함께 걸어가는 배려가 필요하다. 남편이 평생 하고 싶어 하던 취미 활동을 지원하고, 휴식과 혼자 있을 수 있는 여유 시간도 보장해주되 방치하지 않는 관심이 필요하다. 화분에 물 주기, 쓰레기 분리 수거 등 작은 집안일부터 할 수 있다. 이런 작은 노력이 은퇴 후 가정의 행복을 꾸리는 데 큰 힘이 된다. 강제로 시키기보다는 함께하자고 이끌고 결과를 칭찬하는 방법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자녀에게 소통의 문을 열어보자
자녀에게는 아버지가 소통과 이해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 스스로 자녀와 대화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이제는 일상화된 소통 수단인 SNS나 스마트폰으로 소통하는 카카오톡도 배울 필요가 있다. 가족과 함께 즐길 TV 프로그램도 찾고, 예전에 함께 듣고 본 음악이나 영화 등 가족의 추억이 살아날 수 있는 주제를 찾아 대화의 폭도 넓혀야 할 것이다. 시니어파트너즈의 ‘시니어 행태 조사’에 따르면 60대가 자녀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으로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기’가 1%도 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50대는 겨우 2.3%만 ‘대면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마주 보며 대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가족 전체가 함께 식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고객과의 약속처럼 자녀와의 약속도 미루지 않고, 차선으로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사전에 서로의 사랑과 신뢰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예의도 갖춰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아버지의 정체성과 위상을 되찾고, 건강한 가정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사회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한 종교 단체에서 ‘아버지 학교(www.father.or.kr)’라는 이름으로 1999년부터 수많은 아버지를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의 ‘정주관백협회’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직장과 사회에서 정직하고 성실한 일꾼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로서 살아가며, 무엇보다 가정의 지도자로서 자녀에게 올바른 가치관과 정신적 유산을 남겨줄 수 있도록 하는 남성의 회복 학교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5시에서 10시 반까지 선배가 살아온 이야기도 듣고, 강의도 듣고, 만남마다 아버지에게, 아내에게, 자녀에게 쓰는 편지와 사랑스러운 20가지 이유 쓰기, 그리고 가족과 일대일로 데이트하기 숙제를 한다. 만남마다 독특한 예식이 준비되어 있다. 수료식 때는 아내도 함께 참석하는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행복한 가정에 대한 아내들의 소망과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자녀들의 바람이 담긴 학교로 단순히 이론과 지식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곳이 아니라, 여러 숙제와 나눔을 통해 배운 것, 즉 사랑의 4요소인 관심(care), 앎(knowledge), 존경(respect), 책임감(responsibility)을 중심으로 남편의 권위 있는 사랑, 먼저 표현하는 사랑, 배려하는 사랑, 성숙 & 성장시키는 사랑을 삶 속에서 바로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물론 ‘어머니 학교(www.mother.or.kr)’도 있다. 가정에 올바른 여성성을 회복해 건강한 가정, 깨끗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목표 아래 출범했다. 가족의 관계 회복은 그 어떤 관계의 회복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모두 공감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글 김형래(시니어 칼럼니스트·시니어 파트너즈 상무, <나는 치사(致仕)하게 은퇴하고 싶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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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김형래가 작성한 것으로
국민은행 VIP 고객을 위해 만들어진 Gold and Wise 5월호에 게재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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