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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Lifestyle/책Book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by Retireconomist 2022. 6. 28.

사회파 에세이스트 브래디 미카코의 본격 노동 계급 탐구
『아이들의 계급투쟁』,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 등의 책을 통해 긴축 정책이 장기화된 영국 사회에서 빈곤 계층 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적나라한 차별과 혐오 아래 놓이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 브래디 미카코가 이번에는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생활을 들여다보았다. 한국 사회에 이른바 ‘아저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존재하듯이 영국 사회에는 백인 노동 계급 중장년 남성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만연하다. 한때 영국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자 대중문화의 발원지였던 노동 계급은 어쩌다 여성과 이민자를 차별하고, 세금을 축내며, 청년의 일자리를 빼앗고, EU 탈퇴에 찬성표를 던지는 사회의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을까.
이민자이자 노동자로서 25년 이상 영국에 거주해온 브래디 미카코는 자동차 파견 수리공, 택시 운전기사, 마트 점원, 도장공, 택배 기사 등 자신이 오랜 시간 교류해온 노동 계급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물한 편의 에세이에 담았다. ‘모든 악의 근원은 아저씨’라는 듯 세상은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 비난하지만, 저자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걸어온 삶의 궤적과 노동 현장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며 이해의 발판을 마련한다. 정부가 밑바닥 사회를 더 이상 책임지지 않겠다고 선언한 긴축의 시대에 노동 계급의 긍지와 자부심, 체념과 좌절을 품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세대론이나 계급론이 다 담지 못하는 생활 현장의 복잡다단한 풍경을 보여준다. 특정 세대나 집단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 뒤에 놓인 정치사회적 맥락을 살피면서도 개인의 삶을 지우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을 이해해보려는 저자의 성숙한 시선이 빛을 발하는 책이다.
 

Brady Mikako
1965년 일본 후쿠오카현 출생. 빈곤 가정 출신으로 펑크 음악에 빠져 존 라이든(펑크록 밴드 섹스 피스톨스의 보컬)에게 큰 감화를 받았다. 1996년 영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런던의 일본계 기업에서 일하다 프리랜서로 전향해 번역과 저술 활동을 해왔다. 보육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탁아소와 어린이집에서 일하며 ‘반反긴축’의 입장에 서게 되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의 계급투쟁』을 써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이들의 계급투쟁』으로 2017년 제16회 신초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고, 2018년 오야 소이치 기념 일본 논픽션 대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로 2019년 제73회 마이니치출판문화상 특별상, 제2회 서점 대상 논픽션 부문 대상, 제7회 북로그 대상(에세이·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그 밖에 지은 책으로 『여자들의 테러』,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 『꽃의 생명은 No Future』, 『아나키즘 인 더 UK - 무너진 영국과 펑크 보육사 분투기』 등이 있다

브래디 미카코의 다른 작품

 

역자 : 노수경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여자들의 테러』, 『아이들의 계급투쟁』, 『책의 길을 잇다』,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만년의 집』, ... 더보기

목차

들어가며 - 아저씨들 아직 안 죽었거든?
주요 등장인물

1부 디스 이즈 잉글랜드 2018~2019
1. 문신과 평화
2. 초겨울 찬 바람을 맞으며
3. 브라이턴의 동화
4. 2018년의 워킹 클래스 히어로
5. 원 스텝 비욘드
6. 리얼리티 바이츠
7. 노 서렌더
8. 노 맨, 노 크라이
9. 우버와 블랙캡, 그리고 블레어의 망령
10. 언제나 인생의 밝은 면을 보기를
11. 노를 저어라
12. 타올라라, 사이먼
13. 데어 제너레이션, 베이비
14. 킬링 미 소프틀리 - 우리의 NHS
15. 너는 나를 알아
16. 두근두근 투나잇
17. 나의 포효를 들으라
18. 슬퍼서 견딜 수가 없어
19. 베이비 메이비
20. ?그랜 토리노?를 들으며
21. 프레이즈 유 - 길고 긴 길을 함께

2부 [해설] 현대 영국의 세대, 계급, 술에 관하여
1. 영국의 세대 구분
2. 현재 영국의 계급 구분
3. 마지막은 중요한 술에 관하여

나오며 - 눈보라 속의 UK를 살아가는 일
옮긴이의 말
 

책 속으로

복지 제도의 과실, 동네의 오타쿠 전문가들

영국의 노동 계급 아저씨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다. 단순히 질이 나쁜 아저씨인가 했는데, 실은 은근히 오타쿠 같은 면이 있어서 무언가 하나에 관해 쓸데없이 풍부한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 대처 정권부터 브라운 정권 정도까지는 생각보다 간단하게 실업보험과 생활보호수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노동 계급의 도시에는 일하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지도 못한 풍요로운 과실을 맺은 것이다. 실업보험의 과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동네의 ‘지역사 연구자’ 스티브였다. - 27쪽

계급 재생산의 길을 끊으려 하는 노동 계급 아저씨들
『해머타운의 녀석들』에서 “반항적이고 권위에 저항하면서도 사회 계급의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육체노동’으로 살아가기를 택하여 기존의 계급 제도를 재생산한다”라고 지적된 영국의 노동 계급 아저씨들이 이 계급 재생산의 길을 드디어 끊으려 하고 있다. 나보다 출세하라면서 계급 재생산의 길을 끊어내려 한 아버지들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그들이 하는 말에는 “이제 우리가 하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라는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현실감이 있었다. - 45쪽

긴축 재정이 무너뜨린 노동 계급의 일상
부유한 사람은 이런 공공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으니 긴축 재정이 대규모로 이루어진들 아무런 괴로움도 불편함도 없다. 그들은 사립 병원과 사립 학교를 이용하고 복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정책의 영향을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노동 계급, 즉 우리다. (…)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던 도서관마저 폐쇄되었다. 정말로 정부는 이 빈민가를 버리는구나 싶었다. 설마 저 위에 계신 분들은 어리석은 민중은 책 따위 읽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 68~69쪽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드러난 영국인의 속마음
그때 제마가 감정을 발산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국 사람들이 평소에는 꺼내 보이지 않던,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한 게 아닌가 싶었다. 영국 땅에서 우리가 땀 흘리며 슬픔을 안고 어렵사리 키워온 것들을 이방인이 나타나 휙 하고 수확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쏘냐. 이런 느낌의 분노, 아니 두려움에 가까운 어떤 감정.
증오. 분명 영국에 살고 있는 이민자들은 요즘 이런 것에 과민해졌다. 그것만으로도 브렉시트 찬반 투표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유해한 것이었다. 영국 사람들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바람에
우리 이민자들은 투표 이전처럼 그들을 믿어줄 수 없게 되었다. - 101~102쪽

최후의 저항자들
“그러니까 이건 건강과 돈만의 문제가 아니야. 더 큰 거라고. 나는 대처한테도, 글로벌 자본주의한테도 질 수 없다고. 물론 가담하지도 않아.”
(…) 남편 말처럼 이는 NHS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대처리즘에 반대하는 것도, 글로벌리즘에 반대하는 것도, EU 탈퇴도 전부 이어져 있고 얽혀 있다. 해머타운의 아저씨 세대는 현 사회에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151~153쪽
20대 베트남 여성과 60대 영국 아저씨의 사랑
자본과 노동력이 이동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국경을 닫아두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페이스 타임이니 스카이프니 하는 걸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사랑에 빠지고, 그렇게 되면 베트남이든 아프리카의 통북투든 날아가는 것이다. 사랑은 광기다. 사랑은 배외주의를 관통하는 최종 병기다. - 218~219쪽

오늘의 노동 계급
노동 계급 안에는 상당한 다양성이 존재한다. 이 다양한 사람들이 노동자로서 겪은 공통의 경험이 이들을 같은 계급으로 만든다. 이들이 겪은 같은 경험이란 보수당의 긴축 재정으로 공공 서비스와 복지가 삭감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 노동조합의 약화로 기업의 힘이 비대해진 현 상황에서 악화된 고용 조건과 임금으로 인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점 등일 것이다. (…) 노동 계급의 세력이 약해진 현대에 바람직한 노동 계급의 모습이란 다양한 인종, 젠더, 성적 취향, 종교, 생활습관과 문화를 가진, 그럼에도 ‘돈과 고용’이라는 하나의 점에서 이어지는 집단일 것이다. - 269~271쪽

출판사 서평

“노동 계급의 영웅은 쓰러지지 않아”
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사랑과 긍지

브래디 미카코는 출세작인 『아이들의 계급투쟁』을 비롯해 보수당 정부의 긴축 정책으로 영국의 밑바닥 사회, 노동 계급의 삶이 무너져 내린 모습을 핍진하게 묘사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 자신이 일본의 빈곤 가정 출신으로 고교 시절 교복을 입은 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담임교사에게 “요즘 일본에 그런 가난한 가정이 있을 리 없다. 노는 데 쓸 돈이 필요한 거겠지”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가난한 사람은 일본에 있지 말아야 한다. 가난한 노동자임을 당당하게 노래하는 펑크록의 나라 영국으로 가자’라고 마음먹고 1996년 영국에 정착했다. 영국에서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뼛속까지 노동자의 정체성으로 살아온 그는 “브래디 씨, 아저씨들 이야기를 써주세요”라는 편집자의 제안에 자신의 남편을 비롯한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 남성들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브래디 미카코는 폴 윌리스의 『해머타운의 녀석들』(원제는 Learning to Labour: How Working Class Kids Get Working Class Jobs로 한국에는 『학교와 계급 재생산』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을 언급하며 책의 문을 연다. 1977년에 출간된 이 책은 산업도시 해머타운의 10대 소년들을 참여관찰 방식으로 조사하여 ‘노동 계급의 아이들은 반항적이며 권위에 저항하는데 왜 스스로 육체노동을 선택하여 전형적인 노동 계급의 일원이 되고 마는가’를 밝힌 작업이었다. 4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 소년들은 어떤 어른이 되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마침 남편과 그 친구들이 ‘해머타운의 녀석들’과 또래인지라, 브래디 미카코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직업과 생활환경, 인생의 경로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서술하며 영국 노동 계급의 어제와 오늘을 되짚는다.

리바이스 청바지에 닥터 마틴 부츠를 신고 양껏 맥주를 마시다 젊은 동양 미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 변두리 아저씨들의 에피소드로도 읽히는 이 책은 실은 영국 노동 계급의 삶을 지탱하는 긍지와 자부심,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내는 강인한 생명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뭐, 그래도 죽지는 않겠지. 우리 대처 시대에도 살아남았잖아”(287쪽)라는 저자 남편의 말처럼, 이들은 영국이 전후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사회를 지나 각자도생의 긴축 시대로 접어들고, 글로벌 자본주의의 격랑 속에서 브렉시트를 감행하기까지 택시를 몰고 자동차를 수리하고 도장 일을 하며 생활 세계를 지켰다. 젊은 세대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비난 속에서도 끝끝내 노동조합의 힘을 믿고, 복지국가 시절의 마지막 유산인 NHS(국가보건서비스)를 아끼며, 노숙자나 이민자 등 곤경에 처한 이웃을 보호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영국 사회에 면면히 이어지는 ‘계급의식’의 구체적 얼굴을 엿볼 수 있다. 계급이라는 주제를 잘 꺼내지 않는 한국 사회에 록과 술, 중장년의 서글픔을 더해 부담스럽지 않게 계급 이야기를 건네는 책이다.


세대론과 계급론 사이로 미끄러지는
밑바닥 사회의 생활과 노동, 강인함과 취약함에 관한 이야기

브래디 미카코는 “아저씨들이라고 해서 다 결이 같은 한 덩어리는 아니다. 노동 계급 아저씨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서 대충 하나로 묶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7쪽)라면서 자신이 오래 만나고 겪은 노동 계급 ‘아저씨들(그리고 아줌마들)’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60대의 자동차 파견 수리공 출신 레이는 30대의 수완 좋은 사업가이자 세 아이의 엄마인 레이철과 파트너가 되어 전업주부로 살다가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를 계기로 사이가 틀어진다. 이민자들이 몰려오고 국경과 주권이 흐릿해지는 게 싫었던 레이가 찬성표를 던지자, 이민자들을 고객으로 상대하며 사업 확장의 야망을 불태우던 레이철은 불같이 화를 낸다. 복지국가의 청년이었던 레이와 신자유주의의 적자 레이철은 생활과 노동에 대해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드러내는데, 이는 현재 영국 사회가 겪고 있는 세대 갈등의 일면이기도 하다. 결국 레이철은 떠나고 레이는 잠시 흔들리지만 “절망 같은 낭만적인 것은 위쪽 계급 놈들이나 하는 거야”(132쪽)라며 마음을 잡고 일자리를 구한다. 브래디 미카코는 이를 ‘노동 계급의 합리성’에서 나온 체념이라고 표현한다.

마트에서 일하는 스티브는 이민자의 증가를 우려하며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이미 영국에 들어와 사는 이민자들은 존중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동네의 10대들이 중국인들을 괴롭히자 야간 순찰대를 조직해 그들을 보호한다. 정부가 빈민가를 방치한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를 돌보겠다며 상호 부조의 정신을 실천한다. 스티브는 또한 일하지 않는 시간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이 인생의 낙인 사람인데, 긴축 재정의 여파로 도서관이 폐쇄되고 어린이 놀이방 한구석에 책 상자만 남게 되자 그곳을 지키고 앉아 꿋꿋하게 시의 도서 배송 서비스를 이용한다. 빡빡머리에 매서운 눈빛을 한 아저씨가 스키니 진을 입고 닥터 마틴 부츠를 신은 채 어린이 놀이방 한구석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에 저자는 ‘과연 이것이야말로 긴축 재정에 항거하는 민중의 모습이로군’(72쪽) 하며 감탄한다. 항거하는 와중에 놀이방을 방문한 아이들과 엄마들을 살뜰히 챙기는 스티브는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꼴통 보수 아저씨’라는 말로 단정 지을 수 없는 한 사람의 복잡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EU 이민자의 유입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한 브렉시트파이지만 생애 첫 노동 쟁의에 나서는 조카와 프랑스인 이민자인 그 연인을 위해 플래카드 만드는 법과 노동조합의 힘을 알려주는 사이먼, 싱글 맘으로 온갖 육체노동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가 공영 주택지에서 죽을 수는 없다며 혼자 힘으로 집 전체를 뜯어 고쳐 내놓은 60대 여성 재키, 술고래에 축구광에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하다 말년에는 베트남 여성을 영국에 불러들여 임종까지 지키게 한 ‘전형적인’ 아저씨이지만 다운증후군 조카를 끔찍이 아끼던 대니 등 이 책의 등장인물은 누구 하나 단순하지 않다.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배외주의자, 연금을 받으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퇴직자, 토할 때까지 맥주를 마시다 폭력을 휘두르는 백인 남성 노동자 같은 한 가지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사람도 없다. 브래디 미카코는 이 미워할 수 없는 인물들의 희로애락을 통해 세대나 계급을 규정하는 이론들이 다 담지 못하는 밑바닥 사회의 강인함과 취약함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전작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에서 상세히 고찰한 ‘엠퍼시empathy’를 그 스스로 유감없이 발휘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긴축 재정이란 놈은 죄가 많다”
밑바닥에서 바라본 영국 사회의 어제와 오늘

영국 사회에 세대 갈등, 노동 계급에 대한 혐오, 브렉시트 찬반을 둘러싼 대립이 극심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특정 그룹을 비난하는 것은 사회 전체에 여유가 없기 때문이며, 이는 대처 정부 이래로 보수당 정권이 강화해온 긴축 재정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 책의 1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이 안정적인 궤도를 이탈하여 동요하고 하강하는 데는 어김없이 긴축 재정의 여파가 자리하고 있다.

견디기 힘든 두통이 수개월간 지속되는데도 절대로 민간 의료 시설에는 갈 수 없다며 끝끝내 NHS 진료를 기다리는 저자 남편의 에피소드는 영국 노동 계급의 NHS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보여준다. 재정이 고갈되어 온갖 방법으로 환자를 밀어내는 NHS는 국가 의료제도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그러나 NHS에 대한 영국 서민들의 뜨거운 마음만큼은 계속되어 브렉시트 찬반 투표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EU에서 탈퇴하면 EU로 나가는 분담금을 NHS로 돌릴 수 있다는 탈퇴파의 대대적인 선전에 찬성표를 던지고 만, 우파도 좌파도 아닌 사람들이 많았다. 세간의 인식처럼 배외주의자에 극우 애국주의자라서가 아니라, ‘NHS가 개선된다’라고만 하면 무조건 믿고 싶을 만큼 비참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탈퇴를 택한 것이다. 런던의 명물 블랙캡과 새롭게 등장한 배차 서비스 우버의 대립을 통해서도 인종과 계급, 글로벌리즘과 배외주의가 복잡하게 뒤엉킨 영국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다. 백인 영국인이 주로 운전하는 블랙캡과 운전기사의 다수가 이민자인 우버의 대립에 인종차별적 발언과 영국 국기가 등장하고, 블랙캡 운전기사 대부분이 EU 탈퇴를 지지하면서 블랙캡은 배외주의의 온상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진보를 자처하는 노동당은 국내 노동자의 처우가 악화된다며 우버에 반대한다. 오른쪽과 왼쪽의 구별이 간단치 않게 된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브래디 미카코는 책의 2부에서 이러한 현실을 설명하는 데 동원되는 영국의 세대론과 계급론을 두루 소개한다. 이 책의 주인공들이 속한 베이비부머 세대를 비롯해 X세대, Z세대 등 그 앞뒤에 놓인 여러 세대의 특징을 개괄하면서 이들이 갈등을 빚는 지점과 그것을 부추긴 사회경제적 배경을 지적한다. 아울러 여전히 계급의식이 굳건한 영국 사회에서 계급이 어떻게 세분화하고 있는지 소개하며, 현재 영국에서 가장 문제시되고 있는 백인 노동 계급의 교육 및 문화적 상황을 상세히 다룬다. 지적인 ‘워킹 클래스 히어로’가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던 시대는 저물고 이제 백인 노동 계급은 성적이 가장 낮고 향상심도 없는,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논의가 거듭될수록 백인이 아닌 노동자의 처지는 잊히거나 무시된다는 사실 또한 함께 언급한다. ‘노동 계급’이라는 말에 습관적으로 ‘백인’이 붙게 되면 “노동 계급은 문신을 잔뜩 새긴 인종차별주의자”와 같은 부정적 편견이 강화될 뿐만 아니라, 반대로 노동 계급 안에서 이민자의 존재를 배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노동 계급에 ‘백인’을 붙이고 그들의 부정적 면모를 강조해 악마화하는 것, 그럼으로써 이민자들이 스스로를 노동 계급이 아니라고 여기게 하는 것은 “가난한 계급의 분열을 조장해 서로 싸움을 붙여두면, 정권과 정치인들 쪽으로 분노를 돌리지 않으리라 생각한 위정자들의 지혜”(271쪽)라고 일갈한다. 그러면서 앞으로의 노동 계급은 그 내부의 다양성, 즉 인종, 종교, 문화, 젠더 등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노동자로서 한 공통의 경험에 기초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정자들이 ‘DIVIDE & RULE(분할과 통치)’이라면 노동 계급은 ‘UNITE & FIGHT(연대와 투쟁)’라는 멋진 라임을 선보이며.


존 레넌, 매드니스, 루 리드, 더 후, 밥 말리……
록과 팝의 명곡들로 엮은 노동 계급의 투지와 기백

이 책의 밑바닥에는 시종일관 음악과 술이 흐른다. 브래디 미카코는 영국 음악이 좋아 이민을 결심한 사람답게 각각의 에피소드에 영미권의 록과 팝, 일본의 대중가요를 긴밀하게 엮어 글을 썼다. 영국의 록 음악이 노동 계급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큼 배경 음악과 글이 어우러져 일관된 정서를 만든다. 소개된 곡을 듣고 가사도 함께 살펴본다면,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인생 앞에서 보였던 투지와 기백을 한층 선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국 문화를 이야기할 때 ‘퍼브pub’가 빠질 수 없듯이 이 책의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는 맥주가 등장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영국의 술 이야기가 대미를 장식한다. 저자는 음주 문화의 변화를 통해서도 영국 사회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주인공들인 베이비부머 세대는 이제 60~70대에 접어들어 맥주 대신 그린 스무디를 마시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보다 젊은 세대는 애초에 술을 적게 마시고, 맥주보다는 스파클링 와인을 선호한다. 저자는 어쩌면 술을 마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술을 선호하는지가 세대론, 계급론보다 저변 사회의 변화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며 한 세대와 시대의 황혼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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