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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Column

신뢰는 확인을 통해 강화됩니다.

by Retireconomist 2017. 7. 6.

하바드(Harvard) 교정에 들어선 순간,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학업의 장소인데, 한갓 여행객이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다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나마 실력이 없으니 관광으로나마 발을 디딜 수 있다는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관광객은 당연 첫 번째로 인증샷을 날리는 것이고, 행운을 얻어오는 것이고 좀 더 깊이 들어가자면 ‘하바드대학 도서관에 붙어 있는 명문 30훈’을 사진기에 담는 것입니다. 아이들 학업이 돌이킬 수 없는 학령에 이르렀기에 손자손녀에게 영감을 불어넣자는 심사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제 여행 수첩에는 삐뚤빼뚤 급하게 적은 주옥같은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옮겨적은 것을 현장에서 확인하자는 심사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마치 어려운 숙제를 밤새 해서 막 수업이 시작하면서 ‘숙제 책상에 올려 놓으세요!’하시는 선생님의 지시를 받는 순간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마 익숙한 문장일 것입니다.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이가 갈망하던 내일이다.” “공부는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지 몰라도, 성공은 성적순이다.” 등등 무려 30개나 됩니다.


인증샷 장소를 향해 모두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고, 저는 우선 순위를 바꾸어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저는 중앙도서관 하나가 무지하게 큰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급히 핸드폰을 들고 도서관을 찾는 구글링을 시도했습니다. 하버드(Harvard)에는 모두 73개의 도서관이 있답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은 1638년에 설립되었다네요. 우리나라 역사의 같은 시간으로 비추어보면 조선의 인조왕이 청나라 홍타이지에게 남한산성에서 항복하고, ‘세번 절 하며 때마다 머리를 땅에 찧도록 하는 굴욕적인 의식’을 했던 바로 다음해로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에게는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을 주었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시기와 맞물립니다.


마침 누군가 젊은 엄마 여행객이 제가 가진 같은 궁금증을 가이드에게 물었습니다. “도서관 명훈이 있는 곳이 어디죠?” 그러자 산만하던 여행객들 시선이 모두 가이드에게 꽂혔습니다. 일심동체로 행동을 단결시키기는 처음인 듯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버드 대학에 재학 중인 유학생 가이드는 아주 난감한 표정을 보였습니다. “저는 그런 것 못봤는데요?” 이 대답이 나오는 순간, 그간의 존경과 부러움의 시선이 의심과 실망의 눈빛으로 급선회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실망했습니다. 그날 현지 교환학생이던 딸과 명문사학의 경제학도 아들 그리고 경력 30년의 베테랑 은행원 아내 그리고 교직 30년 경력의 팔순모친의 지력으로도 명훈 찾기에 실패하고 하바드를 떠났습니다.


몇 달이 지난 뒤 우연히 월스트리트 저널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Enjoy the Unavoidable Suffering)’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하바드 대학교의 사서이자 교수인 로버트 단트(Robert Darnton)이 지난 2012년 11월 15일 쓴 것입니다. 시간으로 보면 오래전에 실렸던  철지난 기사죠. 그 기사에는 발원지는 중국이고 중국 작가 대니펑(Danny Fung)은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 장벽《哈佛图书馆墙上的训言 (Allocutions on the Harvard University Library)》’이라는 제목의 책을 2008년에 출간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답니다. 이 책의 출판사는 북경이공대학출판사(北京理工大學出版社)라는 신인도를 업고 시장에 나갔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하버드대학 도서관 벽에는 없는 명훈을 가지고 초등학교, 영어과정 시험, 베이징 대학의 입학 면접에 널리 사용되었고, 중국 웨이보를 비롯한 인터넷에 6,700만 건이 등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상무부(商務部, Ministry of Commerce)에도 읽어보아야 할 글로 추천이 되었답니다. 이 얘기를 다시 돌려보면 지난 2012년 기사입니다. 중국에서 출발한 20훈이 한국에서 30훈으로 증폭되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하버드 학생들에게 괜히 더 미안해 집니다. 사실도 아닌 것을 가지고 뭐 그리 중요하다고 물어봤는지요.


오늘 또 ‘하버드 30훈’을 SNS로 받았습니다. 이젠 지긋지긋합니다. 새벽 4시에 날리셨더군요. SNS와 시니어를 결합하면 ‘퍼날르기’로 귀결되기 십상입니다. 이젠 그냥 퍼나르지 말고, 좀 더 깊이 파고 들었으면 합니다. 신뢰는 확인을 통해 강화됩니다. ⓒ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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