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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성찰하다》

by Retireconomist 2020. 9. 16.

 

“1964년에 밥 딜런은 ‘시대가 변했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시대는 변했다.’ 하지만 시대는 예상했던 방향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_ 서문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는 경제학자 다니엘 코엔이 『유럽을 성찰하다』를 펴냈다. 원제가 ‘세상이 변했다고 말해야 한다Il Faut Dire Que Les Temps Ont Chang?’인 이 책은 68혁명 이후 이 세계의 변화에 대해 총체적으로 성찰한 진중한 인문에세이다. 특히 오랜 시간 세계 질서를 주도했던 유럽적 이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 변질되고 쇠락했는지, 바뀐 세계 속에서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길 찾기 질문을 여러 방면으로 담아놓았다. 유럽에 대한 총체적 반성이자, 포퓰리즘과 극우주의 등 극단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글로벌한 합리성을 만들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모색이라고 할 만하다.

첫 번째 트라우마: 68혁명 세대의 좌절

서문에 나오는 코엔의 시대 진단은 좌파와 우파라는 두 이념세력의 공통된 실패를 주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한 세상에서 앞선 시대와도 완전히 낯선 다른 세상으로 건너왔다. 눈부신 미래를 향한 희망이 있던 자리에 화려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자리를 잡았다. 과거의 좌파가 행하던 비판의 메가폰 역할을 포퓰리즘이 이어받았다. 영원한 현재의 공간에 갇혀서 앞날을 생각하기가 너무나 어렵게 된 오늘날 청년 세대의 상황이야말로 지난 반세기 동안 쌓여온 정신적 외상의 증상이라 할 수 있다.(서문)

코엔이 보기에 50년 전 1968년 5월 혁명은,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처럼 사람들의 상상력에 불을 붙였다. 당시 대학가인 라탱 구를 행진하던 젊은 세대들에게는 부르주아를 무너뜨리는 것만이 문제였다. 하지만 68년 5월 혁명에서는 어떤 이도 처형되지 않았으며 마치 즐거운 파티와 같았다. 프랑스 대혁명에서는 빵을 요구했지만, 이제는 부를 차별없이 ‘거리낌 없이 즐기는 것’이 문제였다. 샌프란시스코, 파리, 베를린의 신세대들은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노동과 물질의 문제에서 벗어나 사랑과 로큰롤로 이뤄진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70년대 중반부터 경제성장이 중단되고 기나긴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1960년대의 열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준비하며 공장에 잠입했던 좌파 청년들에게는 경악스럽게도, 당시 산업은 섬유, 야금, 조선소의 위기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일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이 세대의 열정은 이렇게 무너졌는데, 이것이 지난 50년 동안에 있었던 첫 번째 트라우마일 것이다.

두 번째 트라우마: 보수혁명의 배신

경제 위기는 68혁명의 반대자들에게 역습의 기회를 제공했다. 아일랜드의 토머스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이 ‘무절제와 악덕’의 사슬을 풀어놓아 젊은 세대들이 ‘지혜와 미덕’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19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신보수주의자들도 같은 실수를 범했다. 68혁명 세대들이 ‘금지를 금하기를’ 원했지만, 잘못 생각한 게 있었다. 모든 사회는 규칙과 금지를 통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불가능을 요구하기’를 원했지만, 인간 조건이 비극적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68혁명에 대한 비판은 ‘무력감과 쾌락주의와 도덕적 혼란에 빠지는 것’을 한시바삐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은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쾌락 원칙에대한 현실 원칙의 설욕으로 보였다. 레이건은 경제가 아닌 도덕적 혁명의 기수였다. 하지만 레이건은 68혁명 세대만큼이나 순진한 환상을 통해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도덕성 회복을 통해서 자본주의는 자동 조절되리라는 게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당선 이후 실제로 실현된 것은, 아무런 절제도 없는 가운데 터져나온 부의 불평등과 탐욕의 승리였을 뿐이다. 보수주의 혁명의 이 배반은 우리 시대가 겪은 두 번째로 큰 헛된 기대와 착각이었다.

포퓰리즘, 이 시대의 또다른 환상

1960년대에서 1980년대로 이처럼 급격하게 변화한 것은 인간 욕망의 양극단 사이에서 이뤄진 진부한 왕복운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 욕망의 양극단은 보들레르가 ‘이 세상 밖 어디든지’라고 불렀던, ‘스스로에게서 해방되어 멀리 떠나고자 하는 마음’과, 이 역시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되어 있다.2 지난 반세기 동안의 변화는 이처럼 깊이 왜곡된 대립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전통에 대한 찬사는 타인 기피와 외국인 혐오증으로 변했고, 기존 질서에 대한 즐거운 이의 제기는 경쟁적인 개인주의 속에 쓰러져 있다. 해방과 전통이 대립하는 이 현장에서 우리는 승자와 패자의 커다란 분열을 목격했다. 관습에서 해방되어 자율적인 존재가 된 승자와, 전통이 제공해주지 않는 보호책을 전통에서 찾고 있는 패자가 그것이다.


지금의 포퓰리즘은 바로 이런 위기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산업사회가 제공해주던 지표를 잃어버리고 끝없는 모험을 펼친 끝에 민중은, 지나친 도덕적 관용주의라며 좌파를 비난하는 한편, 부자가 될 생각만 한다고 우파를 비난하면서 저항하고 있다. “좌파는 서민을 받아들인다는 인상을 주었지만 위기에서 서민을 보호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도덕 회복 정책으로 선출된 우파는 서민들을 탐욕의 제단에 갖다 바쳤다.”(104쪽) 마침내 민중은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자유주의의 종말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노동계급이 포퓰리즘 정당으로 넘어간 것은 68세대의 희망에 조종을 울리고 있다.


유럽 포퓰리즘은 그들이 사회적 혼란의 원인이라 주장하는 두 계층, 즉 위로는 사회 엘리트와 아래로는 이민자 집단에 대한 증오를 응집시킨다. 이탈리아 포퓰리즘 운동에는 엘리트 혐오라는 위를 향한 증오, 즉 첫 번째 요구를 만족시키는 급진 좌파 성향은 있었지만, 외국인 혐오라는 두 번째 아이템이 없었기 때문에 실제 선거 결과는 우파에 뒤졌다. 스웨덴의 ‘민주당’, 덴마크의 ‘인민당’, 핀란드의 ‘진짜 핀란드당’, 오스트리아 ‘자유당FPO’, 그리스의 ‘금빛 새벽당’, 이탈리아의 ‘북부 리그당’은 모두 외국인 혐오에 기반을 두고 있다.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의 ‘민족전선’도 마찬가지다. 좌파보다 더 급진적인 경제 정책과 우파보다 더 급진적인 도덕 정책으로 세계화에서 낙오되고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서민들로부터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그러한 지지가 파국 이외에 무엇을 이뤄낼 것인가. 코엔은 “포퓰리즘 부상이 빚은 두 번째로 끔찍한 사건은 2016년 10월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이다”(110쪽)라고 한탄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 번째 환상”이다.

후기산업사회의 마지막 모색도 결국 실패

그렇다면 연속으로 나타나는 이런 위기와 단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시대가 소리 없이 보여주는 현상들은 과연 어떤 병일까? 그 대답은 산업세계라는 문명의 붕괴와 더 이상 후계자를 찾기 힘든 진보 사회의 커다란 어려움과 관련되어 있다. 오늘날의 시대를 부르는 ‘후기산업사회’라는 명칭이 많은 오해를 낳는 것 같다. 후기산업사회를 두고 좌파는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것으로, 우파는 노동 가치라는 기본 가치로 복귀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 두 시각 모두 틀렸다. 후기산업사회의 참된 의미를 가리고 있던 장막이 최근 들어 걷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코엔은 산업사회를 지나오면서 생겨났던 환상, 거기서 벗어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9년에 발간된 장 푸라스티에의 중요한 저서 『20세기의 큰 희망』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경제학자에 따르면, 농경사회에서는 땅을, 산업사회에서는 물질을 가공했다. 그런데 이제 많은 시간을 물건보다는 건강이나 교육, 여가와 같이 사람에게 쏟는 이 새로운 사회의 희망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이었다. 인간화의 길을 걷던 경제학의 이런 염원은 그러나 배반당하고 만다.

푸라스티에는 오늘날 사회의 불굴의 성장 욕구를 과소평가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서비스 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이 있을 수 없다. 전자의 소득이 후자의 소득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이다. 유치원 교사나 간병인 같은 인적 서비스는 새로운 세상의 깃발이라기보다는 아주 낮은 임금의 영역에 맡겨져 있던 것들일 뿐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선동했듯이 ‘더 많이 일하면 더 많이 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는 1950~1960년대 산업사회에서처럼 더 이상 15년마다 소득이 2배로 오를 수는 없게 되었다. 구매력 상승이 가능하려면 연극 무대에서 텔레비전으로 옮겨감으로써 관객의 숫자를 대폭 증가시키는 연극배우처럼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규모의 효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디지털 사회는 산업사회 상처의 치료약인가?

탈산업사회는 숱한 시행착오 끝에 적절한 명칭인 ‘디지털 사회’라는 제대로 된 길을 이제는 찾은 것 같다. 규모의 효율성을 갖기 위해서는 다른 정보가 취급할 수 있는 정보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이 강제로 거대한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야 한다. 사전에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있으면 소프트웨어와 인공지능은 무한대의 고객을 돌보고 배려하고 충고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미래를 예고하는 영화 「그녀Her」에는 ‘감정 소프트웨어’가 등장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한꺼번에 수백만 명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이런 것이 바로 인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세상, 즉 호모 디지털리스가 예고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이때 우리의 의문은 치료약이 병보다 나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하냐는 것이다. 로봇이 인간을 대신하면서 근심거리가 늘어나지 않을까? 페이스북과 넷플릭스를 거치면서 새로운 플랫폼 위에서 이뤄지는 컨베이어벨트 식의 연쇄노동이 사람에 대한 테일러주의 시스템 관리로 변하지는 않을까? 산업사회의 해묵은 문제가 이를 대체한 사회 한가운데에서 시간의 엄청난 굴절로 인해 다시 제기되는 중이다. 도덕 붕괴나 금융 위기와 같은 그 모든 단계를 다시 밟아야 할까? 우리는 그때보다 잘 할 수 있을까? 그 의미를 잘못 알지 않았다면 역사는 지금 쓰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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