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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의 철학》당신은 그저 태어났다, 그 자체가 위대할 뿐이다.

by Retireconomist 2019. 3. 20.



정규직은 어쩌면 제일 위험하고 불안정하다. 10년 다닌 직장을 한순간에 집어치우는 걸 바로 옆에서 목도했다. 뭐가 안전하다는 걸까.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각자의 품안에 장착한 침묵의 시위 현장이 안전하다고? 어차피 삶 자체가 비정규직 아닌가. -본문 67쪽 〈자기 검열에 길들여진 우리〉 


동양철학에서는 삶과 우울을 분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유리되지 않고 공명한다. 《동의보감》 은 더 단순하게 말한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존재 자체가 질병이라고, 삶은 누구나 아픈 채로 가는 거라고. ‘생로병사’가 한 단어인 것처럼 말이다. 특정 인간관을 설정하는 게 싫었다. 각종 설문지로 분석이라는 과정을 거쳐 마치 정답인 양 나를 대하는 게 싫었다. 몇 가지 항목 이상이면 당신은 우울증 초기 증상이니 말기 증상이니 하는 것들이 답답했다. 감정을 과학으로 대하는 게 어색했다. 그래서 더욱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본문 97쪽 〈헷갈리면 나를 가까이 읽자〉 


“이 사람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낙타처럼 살아도 견딜 수 있어”라고. 기꺼이 부양할 가족을 만드는 비범함이 거기에 있다. 내가 가난해지더라도, 내 것을 기꺼이 주고 싶을 때 하는 게 사랑이고 결혼이니까. 그런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결혼은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무언가 바라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환상적인 결혼은 없다. 남들 다 하는 것이니 하는 행위는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 말대로 “타자의 욕망을 따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본문 121쪽 〈그는 왜 숲으로 갔나〉 


우리는 마트에서 ‘당근 천 원’, ‘수박 만 원’이라고 쓰인 것을 보며 당근은 1천 원의 가치밖에 없고 수박은 1만 원의 가치가 있으니 수박이 더 귀한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 당근과 수박 모두 어떤 이의 땀이 들어간 노동의 결과물이다. 우리의 교육은 왜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가. 마르크스 말처럼 노동과 생산의 직접적인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안에 있는 가치를 철저히 은폐한 것이다. -본문 139쪽 〈나는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한 건가〉 


한때는 노예 근성이 있는 내가 미치도록 싫었다. 싫어도 좋은 척 웃는 피에로 가면을 쓴 채 하루 종일 가식을 떨어대는 내가 미웠다. 제발 좀 그만하라고 내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며 매일을 살았다. 니체는 수동적이고 약한 인격체를 ‘반응적 인간’이라 불렀다. 나는 누구보다 반응적 인간이었다. 불편한 것을 잘 참는 내 자신이 진짜 불편했다. 그런 내가 권력을 쥔 자에게 보인 반항 아닌 반항은 웃고 싶을 때만 웃는 거였다. ‘웃어야 할 때’ 가 있고 ‘웃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마음은 절규하는데 겉으로 웃고 있으면 사람들은, 특히 권위로 나를 통제하려는 자들은 진짜 웃고 싶어서 웃는 걸로 판단하고는 했다. -본문 175~175쪽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 


아침 7시 신도림역. 사람들이 모여든다. 오늘도 우리 모두는 손발을 잘리러 간다. 회사 문 앞에 서면 심호흡을 해야 한다. 잘리기 직전이니까. 늘 그랬다. 한 번도 좋은 감정으로 회사 문을 연 적이 없었다. 일단 들어가면 순간의 우울함과 계속 만나야 한다. 내 시간도, 내 육체도 그들의 것이다. 자료 좀 찾아줘, 몇 시까지 서류 정리해서 넘겨 등등 명령의 향연 속에서 내 머리는 그 모든 것을 겨우겨우 해낸다. 화장실 가는 것도 참고 그 시간 안에 해내야 한다. 그리고 또다시 반복이다. 그 반복 속에서 무수히 잘려나간 내 머리를 위해 두통약을 집어삼킨다. 그러다 보면 점심시간이다. 그 시간만이라도 혼자 가만히 앉아서 생각 좀 하고 싶지만 이내 동료가 찾는다. “밥 먹어요, 수진 씨.” -본문 230쪽 〈당신의 손발은 무사한가〉 


뉴스에서 직업적 자살을 접한다. 어떤 간호사는 ‘태움’이라는 악습 때문에, 어떤 상담사는 고객의 ‘갑질’ 때문에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이런 기사를 접하면 심장 끄트머리에 밀어넣었던 선명한 생채기가 다시 나온다. 그들은 왜 살려고 들어간 직장에서 살기를 포기 했을까. 5개월째 야근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같은 양말을 3일째 신고 있었다는 걸 출근하면서 알았다. 오늘이 수요일인 건 알겠는데 며칠인지는 모른다. 기억해야 할 건 많은데 정작 기억나는 건 없다. 하늘 한번 올려다볼 기력도 없다. 그래도 이런 건 지나가게 할 수 있다. 다시 기억하면 되니까. 하늘 한번 보면 되니까. 이 정도까지는 스님이 든 몽둥이 너머로 날아가는 새를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다. -본문 252쪽 〈저 새가 날아간다〉 


아무리 기를 쓰고 잘하려 해도 처음부터 작정하고 나라는 존재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당해본 사람은 안다. 영업할 때 우리 팀에 여직원은 나 혼자였다. 나의 실적은 그들에게 그저 들러리여야 했다. 감히 내 실적 따위가 그들 위로 올라가는 현실이 펼쳐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맘대로 되는가. 내가 간 지역에서 하필 운이 좋았고, 그곳에서 나의 실적은 그들을 넘고 말았다. 이게 문제였다. 한동안 해명할 필요도 없는 수많은 소문과 억측들이 손님처럼 나를 찾아왔다. 그래, 손님이다. 곧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갈 손님. -본문 253쪽 〈저 새가 날아간다〉 


우울이 나를 사로잡았을 때 성산대교에 갔다가 이내 마음을 바꾼 적이 있다. 그런 사람이 있다. 이 사람 없으면 나는 별 수 없이 죽겠구나 싶은 사람, 살아갈 의미이자 전부인 사람. 사람이든 동물이든 못다 이룬 꿈이든, 이런 대상이 있으면 쉽게 떠날 수 없다. 진짜 두려운 건 나의 죽음이 아니다. 내 죽음으로 인해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갈 ‘너’의 삶이 두렵다. 그래서 만일 죽을 때가 온다면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세상에 태어나 당신을 만나서 정말 좋았노라고, 같이 숨 쉬고 밥 먹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살아 있음을 느꼈노라고,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나는 나로서 충분히 살다 가니 아쉬울 게 없노라고, 그러니 당신도 온전히 당신의 남은 삶을 살아가라고, 우리는 그거면 된 거라고 전하고 싶다. -본문 261쪽 〈남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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