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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Column

결국 나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by Retireconomist 2017. 5. 14.


1981년 2월.

가급적 멀리 떠나야 한다는 지령같은 주문을 받은 때다. 원주고등학교 25회 졸업생인 나의 작은 주먹에 꼭 주어진 비밀 문서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내 친구 모두에게 같은 내용이 전달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짧지만 단호하고 숙명같은 그 명령은 '독립'이었을 것이다. 주먹을 꼬옥 쥐었다.

손바닥을 펴 보아도 보이지 않은 아주 긴한 나의 도피는 시작되었다.

각자도생으로 가급적 멀리 높이 깊이 떠나야 했고, 그래서 무언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다른 방위각과 고도와 색깔을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

6년간 일본식 교복을 입고 다녔지만, 단 한 번도 목을 둘러싼 '후크 단추'를 풀어본 적도 없는 나에겐 그깟 지령은 쉬운 식은 죽먹기에 불과했다.

마치 태평양 전쟁이 끝났음에도 항복을 거부하고 산속에서 수 십년을 버틴 일본군 잔당같이 '내 길'을 찾아 헤매는 일은 변함없는 일상이었다.

어쩌면 조용하게 알아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줄 알았는지도 모른다.

변명같이 '동문체육대회'와 '나'의 악연은 길게 이어진 것같다. 꺼려야 할 특별한 불편함도 없었지만, 꼭 참석해야 할 목적성도 별로 찾기 못했다. 한길넘는 물에 빠져 발 디딜 곳 없던 나에겐 그저 허우적거리며 숨통을 공기와 연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세파라는 중력을 감당하지 못해 허둥거리며 친구라는 안전지대조차 가까이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일관했던 것이 분명했다. 허우적거릴 때는 그런 사실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돌아보니 그랬다.

졸업이후 단 한 번도 모교에 들지 않았던 것을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각자도생에 충실했기 때문에, 지령에 충실했기 때문에,' 라면서 위장했는지도 모른다.

촉발이 된 일이 있었다. 양희문이라는 재학시절 섞인 기억조차 없는 동창회 총무 친구의 간절하고 반복적인 참여 종용이었다. 함기철 회장도 있었다. 이병관 재경회장도 있었다.

"저 친구들에게는 무슨 이익이 있길래?"라는 질문이 나올 정도의 뜨거운 열정을 느꼈다. 그 열정이 나의 깊은 양심의 폐부를 찔렀다.

꼭 36년 3개월 전 졸업 때 받은 지령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단 한 번도 펴보지 않은 지령이 적힌 주먹을 살포시 펴 보았다.


당연히 '독립'이라고 쓰여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지령은 '동행'이라는 단어로 선명했다.


2017년 5월 13일.
아주 멀리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친구들 곁으로, '동행'을 완수하기 위해 나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결국 나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너희 친구,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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