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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Lifestyle/책Book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느긋하고 밝다.

by Retireconomist 2015. 6. 19.



본인, 야콥 폰 군텐은 성실한 부모의 아들로 이러이러한 날에 태어나, 

이러이러한 곳에서 자랐으며, 

어느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데 필요한 몇몇 지식들을 습득하기 위해 벤야멘타 학원에 훈련생으로 들어왔다. 

본인은 삶에 아무런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 

본인은 엄히 다스려지기를 희망한다. 

정신을 차리고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하기 위해서다. 

야콥 폰 군텐은 많은 것을 장담하지는 않지만, 착하고 성실하게 행동할 것을 결심한다. _ 본문 56쪽 


이곳 벤야멘타 학원에서는 상실감을 느끼는 법과 견디는 법을 배운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능력,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 


우리 훈련생들은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 삶의 희망들을 가슴속에 품는 것이 우리에게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느긋하고 밝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가지런히 빗질된 머리 위로 수호천사라도 날아다닌다고 느끼는 것일까? 

뭐라 말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우리는 제한받고 있기 때문에 밝고 걱정 없이 지내는지도 모른다. _ 본문 103쪽 


난 내가 밑바닥, 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몰락한 후예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출세를 위해 필요한 특성들이라고는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한 가망 없는 후예이다. 

어쩌면, 그렇다, 모든 게 가능하다. 

하지만 난 찬란한 행복을 그려보는 덧없는 시간들을 믿지 않는다. 

벼락출세한 사람들이 갖는 덕목들이 내겐 전혀 없다. (…) 

몰락한 후예로서, 혹은 내가 그 어떤 존재이든, 나는 그런 신사들, 

어쩌면 다소 잘난 척할지도 모를 그런 신사들의 시중을 들게 될 것이다. 

정직하게, 충실하게, 성실하게, 있는 힘을 다해, 아무 생각 없이, 

사사로운 이익에 전혀 집착하지 않고 시중을 들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오직 그런 식으로만, 그러니까 아주 예의 바른 태도로만, 

누군가의 시중을 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_ 본문 130~131쪽 


나는 추락했다. 

나 자신과 모든 것에 회의가 들었어.

인간은 절망하고 슬픔에 빠지게 되면,너무나 비참할 정도로 작아지는 법이야.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소한 일이 물밀듯이 밀려와 우리를 파묻어버린다. 

마치 우리를 아주 천천히 집어삼키는, 

아주 천천히 우리의 숨통을 죄고, 

우리를 짐승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무서운 식탐을 지닌 해충처럼 말이야. 


- 《베야멘타 하인학교》 로베르트 발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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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태생의 소년이 ‘가장 작은 존재,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인 양성학교에 스스로 찾아간다는 ‘반反 영웅적’ 이야기로, 성장과 발전으로 대변되는 서양 근대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작이다. 꿈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이 무의미한 이야기의 흐름, 깊고 예리한 문장들, ‘부’의 지배에 대한 섬뜩한 통찰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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