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나는 조선의 옻칠쟁이다 : 일본 속에 우뚝 선 한 장인의 외침
전용복 저 | 한림미디어 | 2002년 01월
정가 : 9,800원
ISBN : 8986687623
페이지 : 352 | 668g
책소개
일본에서 더 유명한 옻칠작가의 삶을 담은 자전 에세이. 일본의 대 연회장인 메구로가조엔 복원공사에 참여한 한국 장인들의 3년간의 험난한 과정이 담겨 있다. 전통문화를 버리고 예인을 푸대접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하는 책이다. 또한 책 속의 컬러 사진들을 통해 옻칠의 신비와 아름다운 옻칠예술의 모든 것을 만끽할 수 있다.
저자 : 전용복
항상 조선의 옻칠쟁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전용복은 국내에서 옻칠작가로 활동하다 일본의 유서깊은 연회장 메구로가조엔의 옻칠작품을 3년에 걸쳐 복원해냄으로써 세계적인 칠예작가로 우뚝 섰다. 그는 가난과 슬픔으로 얼룩진 신산스러운 유년시절을 거치고 난 뒤 우연히 마주친 옻칠의 세계에 매혹돼 전 생애를 옻칠에 바치게 된다. 그리고 일본의 메구로가조엔 복원공사에 참여해 3년 동안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처절한 과정을 거쳐 마무리해내 일본인들의 인구에 회자되게 된다.
그의 일대기를 다룬 NHKTV '아빠, 우리는 왜 일본에서 살아요?' 라는 다큐멘터리는 일본 열도를 울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KBS '일요스페셜' '마이 웨이' 'TV특강' 등에 소개되어 주목받은 바 있으며 200여 회가 넘는 강연을 통해 옻칠의 신비를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NHK 문화강좌 등 여러 곳에서 800여 명의 제자를 길러 냈으며 국내에서도 여러 번 개인전을 가져 호평을 받은 바 있다.
현재 전용복 칠예연구소 소장, 메구로가조엔 칠예연구소 소장. 약사도칠공예관 명예관장 등을 맡고 있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로부터 초대 전시회를 준비중이다.
프롤로그 - 옻칠의 신비에 영혼을 뺏기다
제1장 고향
창백한 내 영혼의 뿌리
내 마음의 집을 짓다
갑자기 사라진 우상, 나의 형
형의 죽음이 내게 남긴 것
국화빵에는 국화꽃이 없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
꿈꿀 틈도 없었던 날들
영원한 해병을 꿈꾸며
낯선 경험들
첫 둥지, 예린칠공예사
옻칠의 신비에 빠져들게 한 와태칠
옻칠의 나라, 일본
운명적으로 나를 찾아온 조그만 밥상
제2장 기다림
꿈의 연회장 메구로가조엔
첫 일본전시회
일본어를 위해 피운 만학의 불씨
일본의 옻칠기법을 순례하다
2년간의 치밀한 조사
혼신을 다한 피와 땀의 기록들
구성진 진도아리랑
현장에서 부딪치며 내린 결론들
마지막 승부수
피를 말리는 기다림의 시간
메구로가조엔에 당당하게 입성하다
또 다른 복병, 비자발급
메구로가조엔의 낮과 밤
동경에서 '조금 먼 곳'
천혜의 땅, 가와이무라
가족을 데리고 오지로 가는 길
을씨년스럽던 폐교를 연구소로
대한민국 예린칠예연구소 개소식
제3장 희구
낯선 지역, 낯선 주민들
초등학생들의 한일 교류
밤을 새운 연구의 나날들
일본화, 목판화까지 맡게 되다
선배 장인의 혼을 살려 내다
난파선의 선장 같은 하루하루
직원들과의 망중한
민족 자존심을 건 한판 싸움
가와이무라의 사계
딸의 병실과 연구소를 오가던 시간들
비상벨이 울리면...
자연의 축복으로 태어난 새 생명
세계 최초의 옻칠엘리베이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
동심으로 만든 황홀한 우주공간
세계최대의 옻칠 작품 '사계산수화'
중국음식점 원탁의 원조는 중국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닥친 고비
목숨을 건 처절한 사투
도쿄 하늘에 태극기가 휘날리다
제4장 혼불
문화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
옻칠악기의 신비한 음색
'아빠, 왜 우리는 일본에서 살아요?'
우리 문화의 '혼불'을 만나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옻칠의 신비
옻칠의 영구성, 자연친화성, 아름다움
일본을 넘어 지구인으로
에필로그 - 영혼에 옻을 입혀주고 싶다
=======================================================================
그 무렵 내 작업일지 한 귀퉁이에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있다.
'옻칠은 절대적으로 완벽을 요구한다. 옻칠은 디자인과 장식성 등 표현의 문제뿐만 아니라 옻칠이라는 소재의 완벽한 이해와 인식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편의를 위해 대충 넘어가거나 얕은 술수를 일체 받아들이지 않아야만 옻칠이 가진 다양한 특질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p.195
개관을 앞둔 메구로가조엔은 흡사 전장을 방불케 했다. 직원들은 퀭한 얼굴에 눈빛은 광채를 내뿜으며 자신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고용된 직원으로서가 아니라 광기에 휩싸인 예술가들이었다. 그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고개를 완전히 젖히고 옻칠을 하고 금을 붙이다보니 얼굴에 떨어지는 옻칠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특히 생칠은 직접 피부에 닿으면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독하다. 더구나 아무리 옻에 면역된 사람도 피곤이 쌓이면 견딜 재간이 없다. 우리 모두의 얼굴은 퉁퉁 부어올랐고 벗겨진 살에서는 진물이 흘렀다.
"자네 얼굴이 꼭 문둥이 같네."
"소장님은 어떻고요.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식이네요."
"나야 원래 보리문둥이 아닌가. 하하..."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낄낄거렸다. 허리가 끊어지고 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에다 얼굴은 생채기에 소금을 뿌린 것처럼 쓰렸지만 가끔 여유를 찾던 순간이었다.
어느 날 호소카와 도시로 사장을 비롯한 경영주들이 현장을 방문했다.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직원들을 둘러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비장한 분위기에 압도된 탓인지 '수고한다'는 말조차 섣불리 꺼내지 못했다. 사장이 내 팔을 잡아끌고는 신신당부했다.
"전 선생, 이러다가 사람들 다 죽이겠습니다. 오픈을 미루든가 아니면 부분적으로 오픈할 수도 있으니 제발 잠 좀 자면서 하십시오."
마음 한구석에서 찡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고맙다는 내색을 감추고 일부러 쌀쌀맞게 일축했다.
"그런 말을 하려거든 당장 돌아가십시오. 일에 방해만 될 뿐입니다. 우리가 결정한 일이니 죽든 살든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
사실 메구로가조엔은 오래전부터 오픈 날짜가 잡혀 있었고 이미 수천 쌍의 결혼예약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연기한다는 것은 비용의 손실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쌓아온 명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소카와 도시로 사장은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는 진정 사람을 쓸 줄 아는 경영인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자 더더욱 고삐가 죄어졌다. 그러나 의식은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켜켜이 쌓인 피로가 실핏줄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진 탓에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눈꺼풀은 천근만근으로 내려앉았다. 식사시간에는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어떤 직원은 숟가락을 입에 물고 고개를 떨구기도 했다.
여러 번 옻칠이 묻은 피부는 아예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초읽기에 몰린 긴장감으로 내 마음도 숯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p.291~292
----------------------------------------------------------------------
日 열도 감동시킨 '옻칠장인 전용복' | 문화일보 북리뷰 배문성 기자 | 2002-01-25 |
옻칠장인 전용복씨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지난 91년부터 3년간 진행된 일본 도쿄에 있는 유명 전통연회장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 복원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면서부터다. 메구로가조엔은 건물 내부 전체의 옻칠 장식으로 유명한데, 전씨가 이 복원작업 전체를 이끈 것.
이 과정은 ‘일요스페셜’등의 TV 프로에도 소개된 바 있다.
책은 전씨의 자전기이지만, 우선 놀라게 하는 것은 옻칠이 여느 현대미술 작품을 능가하는 표현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 실려 있는 전씨의 작품 ‘고향’ 시리즈는 나전과 금으로 표현된 갈대의 아름다움을 통해 단순하지만 강렬한 미니멀리즘 미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 밖에 ‘탄생’ ‘욕망’ 등의 시리즈는 칠 작업이 현대미술의 새로운 표현기재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두번째 놀라운 점은 전씨의 글과 사진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일본의 연회장 메구로가조엔의 화려함과 미학적 아름다움이다.
31년 연건평 8000평 규모로 만들어진 메구로가조엔은 일본의 공예미학의 결집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채롭고 화려한 실내장식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특히 정원을 작품의 한 공간으로 받아들인 자개문은 현대 일본공예 미학의 높은 수준을 압축하고 있다.
전씨는 이 메구로가조엔 복원공사를 맡으면서 30년대에 대단위 칠 작업에 투입되었던 한국인 선배 장인의 숨결을 읽는다. 일본화가의 밑그림을 나전으로 옮긴 ‘광신(光信)’이란 작은 이름을 읽고, 또 뚜렷하게 드러나는 한국식 끊음질을 보면서 한국인 장인의 한(恨)을 본 것. 특히 그가 메구로가조엔의 나가노 방에 있는 ‘송학도’를 복원하는 과정은 자못 감동적이다.
그는 각 방을 돌며 많은 나전작품을 ‘수리복원가능, 완전불가능, 검토 후 재현’이라고 정리하고 있었다. 그가 나가노 방에 들어왔을 때는 한참 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단다.
‘송학도’의 한쪽에 ‘광신’이라고 유일하게 흔적을 남긴 곳, 충격과 전율 속에서 ‘광신’이라는 선배 장인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려 눈물을 삼켰던 곳이 나가노 방이다.
결국 전씨는 ‘무조건 전체 복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 방에서 다짐한다. “‘송학도’의 훼손상태는 대단히 심각하지만 기필코 이 작품만은 되살려 놓겠다”고.
부산 동래 복천동 판자동네에서 찢어지는 가난 속에 자란 전씨는 독학으로 옻칠을 배웠다.
옻칠에 현대적 표현기법을 가미하고, 일본의 칠 기술까지 섭렵한 뒤에 나온 전씨의 작품은 한국과 일본이란 지역적 문제를 떠나서 옻칠 자체를 순수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소설가 최명희씨의 대하소설 『혼불』을 읽고나서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표현했다는 『혼불』시리즈는 그 분방한 표현력으로 지역주의가 아닌 다분히 보편적인 해석을 가능케 하는 한국적 미학을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
"상상력 자극하는 은은한 깊이가 우리 멋" | 동아일보 책의향기 유윤종 기자 | 2002-01-26 |
1991년, 창립 60년을 맞은 일본 도쿄의 유서깊은 연회장 메구로가조엔(目黑雅敍園) 복원공사가 3년간의 막을 내렸다. 개관식을 맞아 전 매스컴의 눈길은 한 젊은 한국인에게 쏠렸다. 서른살을 갓 넘긴 칠장이(漆匠) 전용복. 3년전 일본 땅을 처음 밟은 그가 3만평 대지에 펼쳐진 이 대형 공간의 미술품 모두를 도맡아 복원해 낸 것.
그가 자전 에세이 『나는 조선의 칠쟁이다』를 썼다. 352쪽 분량의 책에는 나전에 눈뜨기 시작한 가구공장 근무시절, 자기만의 공방 설립, 밥상 하나를 수리한 인연으로 메구로가조엔의 미술품 복원 책임을 맡기까지의 과정이 낱낱이 담겨있다.
“실무자들이 몇 번이고 ‘과연 할 수 있겠느냐’며 되묻더군요. ‘불가능하다고 말한 사람들은 목숨을 걸지 않았다. 나는 목숨을 걸겠다’고 대답했지요.”
처음 맡은 작업량은 옻칠과 상감(象嵌) 등 전체 미술품의 10% 분량. 그러나 꼼꼼하다는 일본인들도 탄복시킨 작업솜씨 덕에 그는 점차 목판화와 일본화 등 전체 미술품 복원까지 맡게 됐다.
“옻칠작업에서 먼지는 가장 큰 적입니다. 그래서 신칸센으로 도쿄에서 세 시간 넘게 걸리는 이와데현(岩手縣) 산간 오지 폐교에 작업실을 마련했지요”
그곳에 그는 온가족을 데려갔다. 지역의회 의원들의 서울 방문을 성사시키고 초등학생들의 교환방문도 이루어내면서 지역의 ‘귀빈’으로 자리잡았다. 3년의 작업기간은 기술의 한계를 극복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 예로, 미술관 엘리베이터에도 옻칠을 하기로 결정됐죠. 화학 칠을 먼저 하자는 엘리베이터사 관계자들을 실제 도장 실험으로 압도했고, 열처리 과정에서 철판이 굽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끝없이 실험하기도 했어요. 실험도구마저도 스스로 제작해야 했죠.”
3년간 갖은 공을 들인 뒤의 메구로가조엔 재개관식장에는 일장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기술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고, 전날까지 밤을 새운 그는 그만 식장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복원품만 찬사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메구로가조엔의 중심인 대회의장을 그는 자신의 창작품인 ‘일생의 역작’ 사계산수화로 가득히 채웠다.
“일본 칠공예는 정교함과 화려함으로 첫눈에 사람을 압도합니다. 반면 우리 칠공예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은한 깊이가 있습니다. 이 두 세계를 참고, 옛 전통을 계승하면서 우리 시대의 전통을 창조한 진정한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최근 그는 자신이 설립한 도쿄의 메구로가조엔 칠예연구소와 부산의 전용복 칠예연구소를 오가며 창작과 후진 양성에 몰두하고 있다.
-------------------------------------------------------------------------
화려한 옻칠에 묻어나는 감동과 장인들의 끝없는 노력
장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국과 일본을 수없이 넘나들고 끝내 인정받고 자기의 길을 가는 전용복. 이게 뼈대이자만 나는 책 사이사이에 있는 그의 옷칠 작품을 보면서 황홀경에 빠졌다.
옻칠이 무엇인지 몰랐던 내가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어떻게 만들까 어렴풋하게 상상만 했었는데 간간이 드러나는 작품에는 화려한 색감, 한국적 정감이 느껴지는 토속적인 소재. 언제 그의 작품을 내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메구로가조엔을 옮기면서 메구로가조엔에 있는 엄청난 양의 옻칠 작품을 복구하기 위해 그 건축물의 주인과 구 후손들이 엄청난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보존시키려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돈이 안 되기 때문에, 혹은 돈을 벌기 위해 유적,유물이 있는 곳을 개발하려고 안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충대충 복구하여 더 심하게 훼손되어 가는 문화재들을 보면서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는 왜 일본처럼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지. 씁씁한 생각만이 드는 것을 지울 수 없다.
메구로가조엔에는 천장이든 벽이든 엘리베이터든 심지어는 화장실까지 옻칠 장식을 하여 거기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혼을 빼 놓고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그 옻칠, 작은 사진으로만 겨우 만족해야 했다.
일본에 가게되면 메구로가조엔을 찾아 그 방대하고 화려한 옻칠 장식에 빠져들고 싶다. --- 2002/08/27
‘머리를 덮고 있던 얇은 막이 어떤 예리한 칼로 확 그어졌을 때 보인 다른 하늘이었다. 섬광처럼 모습을 드러낸 그 다른 하늘은 그때까지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예고했다.’ 그는 옻칠을 알게 됐을 때의 첫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몸 속으로 뜨거운 열기 하나가 치밀고 들어온 듯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과 닿은 듯한. 그렇게 옻칠은 쉽게 꺼지지 않는 잉걸불이 되어 그의 삶을 지펴왔다.
옻칠장이 전용복(48세). 칠기의 나라 일본에서‘옻칠의 명인’으로 불리며 스스로“내가 최고의 옻칠장이다”라고 주저없이 선언한 사람. 유년 시절 그의 삶은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불행한 시대의 파편을 맞은 아버지와 정신적 지주였던 형의 이른 죽음. 그 그늘 속에서 협소해진 삶의 숨구멍으로 겨우 세상과 소통했던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 그 틈에서 그는 생계를 위해 늘 무엇인가 해야 했다.
과일 장사와 국화빵 장사, 연탄 배달 등. 어린 그가 짊어지기에는 버거운 짐들이 나날이 그를 옥죄던 시기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생계와의 싸움. 하지만 꿈꿀 틈조차 없었던 전용복에게도‘행복’을 발음했던 짧은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미술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통해 만나는 여러 화가의 그림들은 상처투성이인 가슴을 보듬어주는 유일한 보약이었다. 그리고 벌이와 학업에서 놓여나는 아주 짧은 시간, 마을 곳곳에서 거둬온 목재로 마당에 토끼집을 만들고, 어린 동생들의 놀잇감을 만들던 순간에는 생의 답답함에서 잠깐이나마 탈출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이 ‘신기의 손’이라 부를 만큼 그에게는 특별한 손재주가 있었다. 궁핍했던 삶 탓에 예술에 접근하지 못했을 뿐, 감각은 숨은 듯 피어나고 있었던 것.
그런 그가‘옻’과 만난 것은 한 목재회사에서였다. 처음엔 합판을 나르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잠재된 그의 능력이 빛을 보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의 재정이 튼튼해지면서 가구 제작까지 영역을 넓히게 됐어요. 전통가구로는 나전칠기가 주조를 이루던 시기였죠. 그때만 해도 우리의 가구들은 순수한 옻칠을 한 나전가구인 줄로만 알았어요. 하지만 옻칠을 흉내낸 화학용품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죠.”
사납금을 못 낸 운전사처럼 옻에 대한 갈망은 그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회사에서 인정받았던 만큼 나름대로 안정된 생계를 보장받던 시기였다. 그러나‘옻’을 알게 된 후, 그는 안락함을 박차고 그의 집 마당 한켠에 있던 돼지우리를 작업실로 개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그윽한 멋을 뿜어내는 옻칠이 그렇듯 한번 옻칠에 접한 그는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그 피나는 노력에 힘입어 그의 이름 앞에는‘옻칠장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레 정착해갔다. 그리고 80년대 초, 그는 칠 동료들과 함께 옻칠의 나라인 일본으로 견학을 떠났다. 일본을 의미하는 JAPAN을 소문자 japan으로 쓰면‘옻칠을 하다’는 의미가 된다는 사실도 그 즈음 알게 됐다. 그만큼 일본은 옻칠 문화가 성한 곳이었다.
“일본에 갔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죠. 하지만 극도의 장식적인 아름다움이 깃든 일본의 옻칠이 우리네 전통 옻칠에는 못 미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옻칠에는 일본인들이 감히 살려내지 못하는 혼과 삶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일본을 한 번 다녀왔을 뿐이다. 그러나 운명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그에게 손짓했다. 어느 날인가 일본인 한 명이 그의 작업실을 찾은 것이다. 일본인의 손에는 가운데가 두 동강이 난 낡은 밥상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일본의 아서원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사용하는‘오젠’이란 밥상이었어요. 처음엔 문득 중국집 밥상 하나를 수리하자고 바다를 건너 나한테까지 온 그이가 의아하기까지 했죠.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밥상은 하늘로 비상하는 학의 모습을 표현한 자개의 주름질 기법이 완벽한 전통 한국식이었어요. 그제서야 밥상 하나를 고치기 위해 먼 길을 온 그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죠.”
‘오젠’이란 밥상은 훗날 그의 옻칠기법을 승화시킨 매개체가 됐다. 일본의 중국음식점‘아서원’ 은 바로 전영복의 옻칠기술이 만개한‘메구로가조엔’이었던 것.
‘메구로가조엔.’그의 삶을 단어로 나열했을 때‘옻칠’과 더불어 가장 주목해야 할 단어다. ‘메구로가조엔’은 옻칠에 대한 그의 갈망과‘恨’의 조각을 마침내 풀어낸 곳이기에.
‘밥상’하나로 인연을 맺은 메구로가조엔은 1931년에 세워진 일본 최대의 연회장이다. 그리고 밥상을 들고 왔던 일본인은 메구로가조엔 설립자의 후손이었다. 그 일본인은 밥상 하나에 고스란히 녹아난 전용복의 옻칠 솜씨에 탄복해 결국 1,000여 개에 달하는 밥상 복원 작업을 전용복에게 맡긴다. 그에 힘입어 전용복은 일본에서의 첫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전시회를 마친 전용복은 메구로가조엔으로부터 정식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메구로가조엔 복원 공사 참여를 준비해달라는 말을 처음으로 듣게 된다.
“메구로가조엔에 처음 들어섰던 날의 감동과 충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현관에 걸린 거대한 천마도. 그건 자개의 결을 살려 꿈틀대는 듯한 운동감을 드러낸 바로 우리 선조들의 기법이었죠.”
그뿐만 아니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경이로운 옻칠 세계가 펼쳐졌다. 200여 개의 방 하나하나가 모두 옻칠로 장식된 별세계였다. 작품들은 하나같이 우리 선조들의 손길을 거쳐 태어난 흔적이 역력했다. 작품 한쪽에 큼직하게 새겨진 죽파(竹波)라는 일본인의 이름 옆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광신(光信)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순간, 그는 아득함에 그만 정신이 휘황해졌다. 우리 조상들의 이름은 그렇게 메구로가조엔 복원 공사에 그를 불러들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우리 선조들의 작품은 반드시 조선인 전용복 자신이 복원하리라는 결심을 굳히고 또 굳혔다.
“메구로가조엔의 실무자들이 몇 번이고‘과연 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더군요. ‘불가능하다고 말한 사람들은 목숨을 걸지 않았다. 나는 목숨을 걸겠다’고 대답했지요.”
처음 그가 맡은 작업량은 옻칠과 상감(象嵌) 등 전체 미술품의 10퍼센트 분량에 불과했다. 그러나 꼼꼼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인들도 감탄한 작업 솜씨로 그는 점차 목판화와 일본화 등 전체 미술품 복원까지 맡게 됐다. 그의 작업에 대한 감탄은 점차 그 부피를 더해갔다. 마침내 그의 작업량은 메구로가조엔의 중심 대회의장창작으로 확대됐다. 우리나라 전통 옻칠 기법을 적용한 일생의 역작〈사계산수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렇게 일본의 메구로가조엔은 철저히 한국인 전용복의 손길을 거쳐 지난 1991년 재개관을 맞았다. 개관식장에는 일장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렸다.
전용복과 함께 작업에 참여했던 장인들의 눈에서는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3년 동안의 복원 작업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일이었고, 목숨을 건 처절한 사투였다. 연인원 10만 명 분에 해당하는 방대한 작업이었고, 무려 10톤의 옻이 사용됐다.
“화산 폭발음처럼 터져 나온 애국가가 메구로가조엔에 메아리쳤고, 연이은 ‘만세’소리에 사진기자들은 일제히 셔터를 눌렀지요. 그것은 감동이기 전에, 자랑이기 전에, 이국땅에서 우리 문화를 꽃피운 것에 대한 슬프고 분한 느낌이었습니다.”
메구로가조엔의 성공적 복원으로 일본 현지에는 그의 이름을 당당히 붙인 ‘전용복 칠예연구소’가 세워졌다.
요즘 그는 부산에 있는‘전용복 옻칠 연구소’와 일본의‘전용복 옻칠연구소’를 오가며 옻칠 전수에 전념하고 있다. 일 년에 몇 번씩은 옻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개인전을 열기도 한다.
“일본 옻칠공예는 정교함과 화려함으로 첫눈에 사람을 압도합니다. 반면 우리 옻칠공예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은한 깊이가 있지요. 이 두 세계를 결합해, 옛 전통을 계승하면서 우리 시대의 전통을 창조하는 진정한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시간의 침입 앞에서 당당하면서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옻칠기법은 다름 아닌 전용복,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일상Lifestyle > 책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꾸뻬씨의 행복여행] "행복은 복권 30억원에 당첨되는 것이 아니다." (0) | 2004.11.12 |
---|---|
[펑키 비즈니스] (0) | 2004.11.08 |
마케팅 불변의 22가지 법칙 (0) | 2004.11.05 |
7.[디플레이션 속으로] 홍성국 부장과 나는 가깝다. (0) | 2004.10.06 |
MIDS(정보면역결핍증),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0) | 2004.10.04 |
스티븐 코비의 새책_[성공하는 사람들의 8번째 습관] (0) | 2004.09.30 |
[101가지 비타민]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설레고 멋진 일입니다. (0) | 2004.09.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