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 연주는 나의 두 번째 목소리를 갖는 것
1970년대 프랑스 제5공화국 2대 대통령이자 실용주의 대통령으로 알려진 조르주 퐁피두는 ‘삶의 질(Qualite de Vie)’을 제창하면서 국민에게 중산층의 기준을 제시했다. 그중 하나가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시니어가 생애에 꼭 하고 싶은 일 중 자주 꼽는 소원 가운데 하나다. 이미 우리는 ‘전인교육’을 통해 악기를 다뤄본 학습 경험이 있다. 악기 연주, 다시 시작하기에 아주 좋은 취미다.
K(58세) 시니어는 요즘 수요일마다 ‘욕쟁이 학원’에 출석하고 있다. 이미 2개월 치 교습비를 냈다. 선불로 내야 하는 음악 학원의 관행도, 본인이 출석하지 않는 사유로는 환불되지 않는다는 세속적 거래 원칙도 이제는 슬슬 익숙해진다. 지난 3월 중순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던 회사에서 더는 업무적 압박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사표를 내고, 클래식 기타를 잡았다. 가끔 회사에서 회식할 때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더니, 직원들이 알아서 퇴직 기념으로 클래식 기타를 선물한 것이다. 대학생 시절에는 통기타를 쳤고, 미끈하고 투명한 물감으로 울림 나무통을 만든 기타를 감싸 안으면 왠지 모를 편안함이 좋아 ‘퇴직하면 기타나 쳐야겠다’라는 말을 내뱉곤 했는데, 이제 그때가 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악기를 배우는 과정은 일대일 도제식 훈련 방식이고, 한 페이지씩 능숙하게 쳐내야만 다음 페이지로 진도를 나간다. 스승의 능력은 전혀 상관없고 오로지 내 연습만 이를 증명할 뿐이니, 싫어도 가는 곳이라 마치 욕하는 할머니 식당이 생각나 스스로 욕쟁이 학원이라 이름을 붙였다. 클래식 기타를 배우면서 생활 방식이 바뀌었다. 학원 가기 전날은 비상이 걸리는 것이다. 꽁지머리 젊은 선생님의 개인 지도를 통과하려면 몇 시간이고 연습에 매달려야 다음 페이지의 신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K 시니어의 악기 연주에 대한 꿈이 서서히 현실이 되고 있다.
‘세시봉 통기타’ 그리고 베이비붐 세대
통기타 하면 가수 조영남, 양희은, 김세환, 송창식, 윤형주가 연달아 떠오른다. 이들이 대중음악의 선두에 서 있던 1980년대는 통기타뿐 아니라 피아노를 중심으로 국내 악기 업체가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노래방과 컴퓨터의 보급 등으로 통기타의 인기도 크게 낮아졌다. 그런데 고사 위기에 몰린 악기 업체에 구원 투수가 등장했다. 바로 ‘세시봉 열풍’이다.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50대의 감정선인 대학생 시절의 통기타 추억을 되살린 것이다. 시위 현장에서 부르던 ‘아침 이슬’을 비롯해 떠난 애인을 슬퍼하며 부르던 ‘하얀 손수건’, 세속적 마음을 비우고 외쳐 부르던 ‘고래 사냥’이며 리듬과 가사가 새록새록 생각나고 몸마저 율동을 기억하니, 구매와 학습의 열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기타는 배우기도 쉽고, 지도할 학원이나 선생님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악기 유통 시장도 음악 학원의 기악 강좌도 큰 인기를 구가하게 된 것이다. 중·장년층의 악기 연주에 대한 관심은 가장 먼저 기타에서 시작됐고, 이런 열풍이 다른 악기와 연령층에도 확산되면서 색소폰 같은 관악기와 키보드나 피아노 같은 건반 악기 등 다른 악기의 활황에도 도움이 되었다.
악기 연주가 주는 자가 발전 감성은 정신 세계를 풍요롭게 한다
시니어에게 악기 연주는 뇌 기능을 좋아지게 한다는 학술적인 결과도 나와 있다. 미국 캔자스 대학 메디컬 센터의 브렌다 한나 플래디 교수는 ‘음악과 관련된 활동이 일종의 인지 운동 역할을 함으로써 두뇌를 건강하고 튼튼하게 해주며 노화를 막아준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대학의 연구진이 60~83세의 건강한 시니어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아무리 늦은 나이라도 오랜 시간에 걸쳐 악기를 배우면, 두뇌 노화를 상쇄하고 재생 효과가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서적 풍요 외에 신체적 효과까지 있다니 악기 연주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배우기 쉬운 악기 VS 연주하는 모습이 멋진 악기, 어떤 악기를 택할까?
시니어의 여가 생활 중 스스로 악기를 다뤄 즐거운 소리를 내는 악기 연주는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악기를 다루는 과정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예술성을 악기를 통해 표현하는 아주 높은 경지의 정신 활동이다. 그런데 막상 어떤 악기가 자신의 내재된 음악성을 가장 잘 발현해줄 것인지,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배워야 할지 따져보면 막막해진다. 어떤 악기든 잘 연주하면 스스로도 즐겁고, 연주하는 모습만으로도 타인의 호감과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래서 악기를 배우기 전에 내게 맞는 악기를 잘 고르는 지혜가 있다면 즐거움은 배가될 것이다.
첫째, 신체적 특성과 상황을 고려하라. 손이 작은 사람에게는 클래식 기타를 치는 것이 버겁다. 여섯 줄의 코드를 한 음계마다 잡아야 하는데, 손가락 관절이 생각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으면 고생만 하다 포기하기 십상이다. 관악기는 폐활량이 관건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폐활량이 다르긴 하지만,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점차 줄어드는 신체적 특성을 고려할 때 될 수 있으면 일찍 배우는 것이 좋다. 나이 80에 처음으로 색소폰을 시작한다면 30~40대에 배우는 것보다 폐활량 탓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필자의 모친은 음악 선생님이셨고 교회에서 반주를 수십 년 하신 베테랑이다. 환갑 때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고, 칠순에 플루트를 시작했는데 팔순인 지금은 다시 디지털 피아노로 회귀하셨다. 첼로를 관장하기에는 체력이 떨어지고, 플루트를 불기에는 호흡이 가빠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더 크다는 이유를 대셨다.
둘째, 배우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따져봐라. 한동안 타지 않던 자전거는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익숙하게 타는데, 초등학생 시절에 피아노를 배웠는데 지금은 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클래식 피아노가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재즈 피아노는 악보를 보지 못해도 알파벳과 코드만 익히면 클래식 피아노보다 적은 시간과 노력으로 곡을 연주할 수 있다. 힘들게 배울수록 보람이 큰 방법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비교적 쉽게 배우고 효율적으로 즐길 수 있는지 견줘볼 필요가 있다. 클래식 피아노나 클래식 기타는 상대적으로 배우기 어렵지만, 재즈 피아노와 통기타는 비교적 쉬운 악기로 분류된다.
셋째, 악기마다 소리 내는 특성이 다름을 인정하라. 피아노와 같은 악기는 건반을 누르면 소리가 나는데 실력자와 다소 차이가 있지만 거의 같은 소리를 낸다. 하지만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나 색소폰 같은 관악기는 연주자의 숙련도와 감성에 따라 나는 소리가 천지 차이다. 즐기기 위해서 시작했는데 좋은 소리가 나지 않아 고통스럽다면 잘못된 선택을 한 셈이다. 기타의 경우, 왼손으로는 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현을 퉁기는 조화가 관건인데, 사람마다 익숙해지는 데 차이가 크다.
넷째, 악기의 관리나 다루는 방법을 생각하라. 피아노는 무겁고 부피가 커서 휴대할 수 없다. 특히 어쿠스틱 피아노는 정기적으로 조율해 일정한 소리가 나도록 유지해야 하는 관리상 어려움도 있다. 기타는 어떤 장소라도 개의할 필요가 없어 휴대성은 좋지만, 소리를 맞추는 조현 상태에 따라 음색이 달라지기 때문에 음을 맞추지 못하는 초보자에게는 고약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또 줄을 정기적으로 갈아야 제 음색을 오래도록 낼 수 있다.
다섯째, 잘 아는 이의 조언을 받아 적당한 악기를 찾아라. 악기의 가격은 천차만별이고 비싼 악기는 심지어 아파트 몇 채를 호가한다. 처음 구입할 때 좋은 악기를 사고 싶겠지만, 중도에 포기하면 너무 아깝다. 그렇다고 싸구려 악기를 사면 소리의 질이 현저히 낮다는 사실이 드러나 곧 소리가 좋은, 그래서 비싼 악기를 살 수밖에 없다. 중고 악기를 사면 돈은 절약할 수 있지만, 공산품과 달리 외관으로만 성능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연주를 잘하는 분이나 선생의 도움을 받아 악기를 구입하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다른 악기의 대체 방법도 생각해볼 일이다. 예를 들어 그랜드 피아노를 사면 가격과 공간, 이동에 제약이 많은데, 디지털 피아노로 대체하면 건반의 터치감은 떨어지지만 다른 문제가 일시에 해결되기도 하고, 다양한 기능이 있어 악기 연주의 기쁨을 더 쉽게 만끽할 수 있다. 대표적 악기 판매처인 종로 낙원상가를 슬슬 돌아보면서 구경도 하고 상점 주인의 조언도 들어 구입한다.
시니어에게는 대체 악기 연주를 추천한다
우리나라에 연주 바람을 일으킨 이는 연주가가 아닌 연기자 차인표다. 1990년대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에서 그가 색소폰으로 연주한 <흑인 오르페(Black Orpheus)>의 주제곡 ‘카니발의 아침’은 뭇 중년 남성들의 악기 연주 심성을 촉발했다. 그 바람을 타고 케니 G라는 미국 연주가의 소프라노 색소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단순히 멋있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악기를 배운다면 필요한 시간과 노력, 인내심을 채우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기 쉽다. 악기 연주에 쉽게 몰입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대체 악기다. 관악기를 즐기고 싶으면 클래식 악기 플루트보다는 오카리나를 선택하는 것도 좋다. 악기도 싸고 다양한 음색을 고를 수 있으며 배우는 기간도 상대적으로 짧다. 더구나 가르치는 곳이나 동우회도 많아 연주를 함께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현악기로는 클래식 기타보다는 통기타가 쉽고 하와이 태생 우쿨렐레는 그보다 크기도 작고 현도 네 줄로 덜 복잡하다. 초보자는 3개월 연습하면 작은 연주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건반 악기로는 클래식 피아노보다 재즈 피아노가 쉽고, 디지털 피아노는 가격 면에서 저렴하고 기능 면에서는 다양한 합성음과 녹음 기능 그리고 소음도 조절할 수 있어 활용도도 높다. 악기를 연주하는 취미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연주를 통해 나오는 소리를 내 두 번째 목소리라고 표현한 시인도 있다. 정서적 안정과 소리를 내면서 얻는 즐거움과 성취감은 악기 연주가 가진 본질적이면서 진솔한 정신적 대변이 아닐까 싶다. 녹음이 우거지는 이 시기에 악기 연주라는 두 번째 목소리를 가져보자.
글 김형래(시니어 칼럼니스트ㆍ시니어파트너즈 상무, <어느 날 갑자기 포스트부머가 되었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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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칼럼은 KB국민은행에서 발행하는 GOLD&WISE 2014년 6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omoney.kbstar.com/quics?page=C017651'칼럼Colu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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