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코엑스에서 열린 엑스포 행사장 중앙 무대에 70대 시니어가 반짝이 빨강재킷을 입고 화려한 탑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마술을 보여준다는 시각에 맞춰 무대를 향해 관객석에 앉은 이들의 눈빛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니어가 어눌한 손으로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을 듯하다. 그 시니어는 주머니에서 두 자 반 정도 되는 단단한 밧줄을 꺼내더니 가위로 반을 ‘뚝’ 자른다. 그러고는 관객에게 각각 하나씩 나눠주고 잘린 것을 확인시킨다. 관객으로부터 자른 밧줄을 돌려받은 후 두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각각의 밧줄을 양손에 따로 잡고서는 입김을 ‘후’ 불어댄다. 그러곤 한 손을 펴 보인다.
아뿔싸, 밧줄이 붙은 줄 알았는데 역시나 잘린 밧줄 한쪽이 바닥에 툭 떨어진다. 마술사의 당황하는 모습에 관객은 합심해서 비웃는다. 어릿광대처럼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다시 잘린 밧줄 두 개를 맞대고, 관객에게 같이 입김을 불어달라고 청한다. “하나~ 둘~ 셋! 후~.” 관객과 마술사는 하나같이 입김을 불어댄다. 마술사는 머리를 꺄우뚱거리며 좌우로 흔들면서 결과를 의심한다. 그리고 아까와 같이 들고 있던 밧줄의 한 손을 뗀다. 밧줄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다. 밧줄을 공중에 던져본다. 밧줄은 하나가 되었다. “와~, 짝짝짝짝.” 관객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마술사의 오른손 끝에 이어진 두 자 반 길이의 밧줄이 원상태로 들려 있다. 미소를 지으며 묵례를 보내는 마술사는 정정환(71세) 시니어.
시작한 지 7년 된 그가 마술을 한 가지씩 무대에서 펼쳐 보일 때마다 관객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면서 “와~, 와~” 하는 경탄을 토해낸다.
마술 소재 하면 ‘컵과 공’
고대 이집트인의 묘에는 ‘컵과 공(Cups & Balls)’이 자주 등장한다. 이를 마술(Magic)의 시초로 보는 이도 있고, 마술이 아니라 게임 도구였을 거라고 보는 이도 있다. 기원 전 5만 년 전에 그린 동굴 벽화에 그려진 동물의 뼈로 점을 치는 모습에서 마술의 기원을 찾는 이도 있다. 왜냐하면 고대에서는 미래를 보는 능력을 마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역사학자들은 마술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직업이라고들 한다. 믿거나 말거나.
가장 오래된 마술사는 누구일까? 종이의 전신 격인 파피루스에 적힌 인물 정도면 시빗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데디(Dedi). 그는 피라미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예였다고 한다. 그런데 손기술이 탁월해 닭이나 비둘기를 사라지게 하거나, 밀랍으로 만든 악어를 진짜 악어로 살려내거나, 펠리컨이나 소의 머리를 잘랐다가 붙이는 등 다양한 마술을 했다고 파피루스에는 적혀 있다는 것이다. 데디는 신전 공사관에 고용되었다가 완공 시에 공연을 했다고 한다. 그의 공연을 본 파라오는 이런 마술의 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기적을 일으키는 성스러운 힘을 가진 마법사(Sorcerer)로 섬길 정도였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도 ‘컵과 공’을 이용한 마술은 행인의 관심을 끌고, 행사의 흥을 돋우기 위해 멋진 소재로 활용되었다. 중세에는 많은 왕실이 전속 마술사를 두고 재미도 누리고 별을 보면서 미래를 점치는 데 흥미를 느끼고 바라보기도 했다. 고대 중국에서도 마술은 훌륭한 관람 소재로 활용되었고, 현대에는 서커스와 혼합된 형태로까지 발전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마술 중 하나는 금속으로 된 고리를 서로 엮었다 풀었다 하는 ‘고리 연결하기’ 마술이다. 명절이면 TV에서 방영하는 중국 마술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다.
마술은 주술일까? 오락일까?
마술을 고대에 신앙 일부분으로 활용한 기억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없지는 않다. 역사적으로 보면 마술과 마법, 주문을 혼용하던 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마술에는 아무런 신앙적인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종교와 달리 신에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조작을 통해서 눈속임하는 일종의 오락에 불과하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심각하게 논의되었는지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타일러(Sir Edward Burnett Tylor, 1832~1917)는 “종교는 인격적이며 전능한 영적 존재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마술은 비인격적이고 자연적인 힘을 대상으로 삼는다”라고 했고,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 1858~1917)은 “종교에는 신도들이 있으나 마술에는 관객만이 있을 뿐이다”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마술은 그저 신기한 재주라 생각하고 즐기면 그만이다.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마술가로는 탈출 마술로 유명한 헝가리계 미국인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 1874~1926)를 꼽을 수 있다. 이후에는 후디니를 속인 마술사 다이 버논(Dai Vernon, 1894~1992), 그리고 데이비드 카퍼필드(David Copperfield,1956~), TV 프로그램에 등장해 시청자 모두를 마술가로 만들겠다면서 ‘숟가락 구부리기’를 보여준 이스라엘 출신의 영국인 유리 겔라(Uri Geller 1946~) 등이 있다. 1902년에는 미국마술사모임(The Society of American Magicians, SAM, magicsam.com)이 결성되었다.
우리나라의 마술은 조선 시대 유랑 연예인 집단인 남사당패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일반적이다. 남사당패 공연은 일반적으로 사물놀이인 ‘풍물’, 마술인 ‘버나’,재주넘기인 ‘살판’, 만담인 ‘어름’, 탈춤인 ‘덧뵈기’, 인형극을 말하는 ‘덜미’ 등 6가지로 구성된다. ‘버나’가 바로 우리네 마술의 시초라고 보는 것이다. 버나는 쳇바퀴나 대접, 접시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를 말하는데, ‘접시돌리기’를 떠올리면 된다. 그 외에 마술 공연을 뜻하는 다른 하나로 ‘얼른’이라는 환술이 있는데, 어떤 것으로 어떻게 공연되었는지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그렇지만 요즘 최현우, 이은결 등 신예 마술사는 연예인 못지않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시니어에겐 ‘생활 마술’이 제격
마술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먼저 소수의 관객에게 보여주는 데 적합한 마술로 ‘생활 마술(Living Magic)’이 있다.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마술이기에 일반적으로 클로즈업(Close-up) 마술이라고도 한다. 관객과 가까운 거리에서 시연할 수 있고, 컵이나 공, 카드, 동전 같은 작은 소품으로도 가능하므로 매력적이다. 두 번째는 ‘팔러 마술(Palor Magic)’이다. 이벤트 행사 등 무대가 없는 넓은 장소에서 진행하는데, 생활 마술부터 큰 규모의 마술까지 할 수 있다. 나머지 하나는 큰 도전과 전문성이 필요한 ‘팰리스 마술(Palace Magic)’. 무대에서 마술 도구와 세트를 이용하고 음악이나 조명도 활용해 다양한 연출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공중 부양을 하거나 대형 동물을 사라지게 하거나 하는 마술이 이것이다. 시니어가 도전하기에는 주변의 간단한 소품으로 보여주는 ‘생활 마술’이 적당할 것이다.
손자와 유대 관계를 키우는 데 그만! 행사마다 단골 초청 인사가 되다
정정환 시니어가 마술을 배운 때는 7년 전이다. 경기 의왕문화원에서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마술 배우기 프로그램’을 통해서 1주일에 2회, 2시간씩 3개월간 배운 것이 전부다. “손재주가좋아서 정말 잘한다”는 마술 선생님의 평가에 신바람이 나서 책과 인터넷 동영상을 보면서 실력을 키우고 아이템을 늘렸다. 그가 무대에서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마술은 50여 가지. 그가 마술을 선보이기 위해 무대에 설 때는 마술 비밀이 들어 있는 묵직한 아타셰케이스(속칭 007 가방)와 함께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실 중 하나가 “마술에는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대에 수십 번을 서면서 팬이 따랐고 마술을 배우겠다는 제자도 생겼다. 가끔 무대 마술 시연 때 동행하는 마술사는 동갑내기 윤옥석 시니어. 무엇보다 마술을 배우면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은 손자에게 가르쳐주게 된 일. 마술을 통해 스승과 제자라는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고, 늘 할아버지를 기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피를 받은 것이 확실한지 열 살 손자는 벌써 10여 가지 마술을 자유자재로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마술쇼가 열리면 그 자리가 더욱 빛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어서인지 자주 마술 공연을 부탁받는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다짐하는 모임이 잦은 연말이다. 아마추어 마술사 정정환 시니어가 바빠질 시기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정환 마술사는 “트릭은 절대 공개하지 마세요. 그것이 마술사가 장수하는 길입니다”라고 조언한다. 이 겨울에 시니어 여러분,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마술사가 되어보면 어떨까요?
글 김형래(시니어 칼럼니스트ㆍ시니어파트너즈 상무, <어느 날 갑자기 포스트부머가 되었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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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김형래가 작성한 것으로 국민은행 GOLD & WISE 1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omoney.kbstar.com/quics?page=C017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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