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movist.com/focus/read.asp?type=24&type2=2&id=9030
본 필자, ‘다운로드족’이다. 지난 수년간 웹 하드나 P2P 서비스를 통해 수많은 영화를 수집하였고 그 결과 방대한 라이브러리를 소장하게 되었다. 이건 ‘자랑’이 아니라 ‘자백’이다. 영상업계가 작년 하반기부터 온라인상 불법 영상물 유통에 대해 법적 대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더욱 강력한 처벌과 효율적 감시를 위해 ‘친고죄’ 조항을 삭제한 저작권법 개정법률안이 국회에 계류중인 흉흉한 시점에서, 본인이 ‘다운로드족’임을 밝히는 것은 범죄 사실을 털어놓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2
필자는 그동안 지은 죄를 인정한다. 혐의 사실로 제시된 증거자료들이 발뼘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고 결정적이어서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필자는 <태극기 휘날리며>를 불법 동영상으로 관람한 4백만 명의 ‘범죄자’ 중 한 명이고, 온라인 불법 영상물을 받기 시작한 이후 극장에 덜 가게 되었다는 33% 중 한 명이다. 극장뿐이랴. 비디오테입을 마지막으로 대여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것으로 보아, 90년대 말 약 3만5천 개였던 비디오 대여점이 7천여 개로 급감하는 데에도 일조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필자는 혐의 사실을 상당 부분 인정하면서도 속으론 조금 억울하다. ‘불법 다운로드족’은 동일한 영화적 기호와 영화 소비 행태를 가진 하나의 통계집단으로 분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온라인상에서 <월드 오브 투모로우>를 찾아 헤매는 일반적인 다운로드족과 오즈 야스지로의 <피안화>를 찾아헤매는 ‘영화 매니아’가 동일한 영화적 취향을 가졌으며 그들의 불법행위의 동기 역시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 필자는 저 두 부류 사이에 큰 간극이 있으며, 때문에 두 부류의 다운로드족에게 동일한 죄질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매니아’가 처한 ‘불리한 상황’과 영화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애정’이 정상참작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를 비롯한 많은 ‘영화 매니아’들이 영화 다운로드에 목을 매는 건, 최신작들을 남들보다 먼저 보겠다거나 몇 푼 하지도 않는 관람료도 아끼고 편안하게 집에서 영화를 보겠다는 얍삽한 계산 때문이 아니다. 관객의 다양한 취향을 반영하지 못하는 영상업계의 상업논리와 우리 영상 문화계의 척박한 물적 토대, 그리고 근본적으론 개개인의 경제자본의 한도로는 커버할 수 없는 ‘영화에 대한 애정’이, ‘영화 매니아’들을 ‘불법 다운로드족’으로 만든 것이다. 필자는 ‘영화 매니아 다운로드족’들이 ‘희생자’라거나 ‘무죄’라고 우기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의 저조한 저작권 의식이나 비양심만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불법행위를 지속적으로 행하게 된 외부적 원인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 영화 매니아들은 왜 불법 다운로드족이 되었나?
영화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매체가 오직 ‘비디오’뿐이던 8,90년대를 살아온 영화 매니아라면, 희귀 비디오를 소장하고 있다는 비디오 대여점을 찾아 발품을 팔아본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경주의 모 비디오 대여점에서 켄 로치의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류블레프>, 베르히만의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등을 한꺼번에 발견하고 환희에 젖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잡지나 서적을 통해 소문만 들던 영화사의 걸작들을 직접 관람할 기회를 갖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시네마테크에서 조악한 화질으로나마 감상하는 것도 감지덕지였고, 필자처럼 지방에 거주하는 경우엔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출시되는 비디오는 헐리우드나 홍콩 영화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간혹 출시되던 소위 ‘아트 무비’들은 비디오숍에서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당시와 비교하면 오늘날 영화 매니아들은 훨씬 풍요로운 환경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5년쯤 전에 장 비고나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DVD로 출시될 거라고 상상한 매니아들이 몇 명이나 있었겠는가? 인터넷 쇼핑이 일반화되고 해외에서 출시된 타이틀도 금전적 여유만 있다면 비교적 용이하게 구할 수 있으니, 오늘날 영화 매니아들에게 입수가능한 영상 소스의 질과 양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확대되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외양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화 매니아들은 우리 영상문화의 현실이 90년대 비디오 세대의 그것과 비교하여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답보 상태가 그들로 하여금 ‘불법 다운로드’로 영화를 감상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명백한 풍요의 징후에도 불구하여 영화 매니아들이 여전히 새로운 영화에 목말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영상 소스의 질과 양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돈’에 관한 문제인데, 영상 소스를 해외에서 구하려는 경우, 언어적 장벽은 차치하더라도 금전적 부담이 너무 크다. amazon.com을 통해 크라이테리언 판 <7인의 사무라이>를 구입할 경우, 배송에 몇 개월이 소요되기도 하는 가장 싼 운송방법를 선택해도 4만원 이상 소요된다. 물론 많은 영화 매니아들이 정말 소장하고 싶은 영화라면 그 정도 출혈을 감수하겠지만, 보기 원하는 영화마다 저 정도의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영화 매니아들이 경제적 부담을 덜며 적법한 방법으로 자신의 영화적 욕구를 채울 수 있으려면, 다양한 영화들이 국내에 출시되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영상 소스를 구입거나 대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국내에 출시되는 DVD 타이틀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어, 해외에서 출시된 소스에 군침만 흘려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내의 DVD 시장은 영화 매니아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영화 매니아들이 불법 다운로드족이 된 두 번 째 이유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의 몇몇 출시사들이 양질의 퀄리티를 갖춘 고전 영화들을 의욕적으로 출시하고 있지만, 영화 매니아들의 질적 변화/발전에 영상업계가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각종 영화제와 ‘불법 다운로드’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영상 소스를 접한 영화 매니아들은 기대 수준 자체가 높아졌고 기호도 다양해진 반면, 출시되는 타이틀은 여전히 흥행성 높은 최신작이나 기껏해야 헐리웃 고전이 주류를 이룬다. 가령 국내에 DVD로 단 세 편 출시된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보고 브레송의 다른 영화가 보고 싶어진 영화 매니아가 있다면 그는 어디에서 그 영화들을 구해야 할까? 또, 지알로나 고어같은 다양한 호러 영화 하위 장르의 심취자들은 ‘피’에 대한 갈증을 어디서 채워야 할까? 해답은 ‘인터넷’에 있다. 세계 어디에선가 출시된 적이 있는 영화라면 분명 P2P 등을 통해 구할 수 있을만큼,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는 영상 소스의 양은 무궁무진하다. 영화 매니아라면 저 압도적인 매력을 떨치기 힘들 것이다.
국내 영상물 시장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가장 심각한 병폐는 바로 사전검열이나 다를 바 없는 심의제도다. 최근 카트린느 브레이야의 <섹스 이즈 코미디>가 무삭제로 출시되는 등 심의 위원회가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일반 정서에 어긋난다’는 등의 애매한 기준 때문에 출시가 요원한 영화들은 아직도 수없이 많다. 미이케 다카시의 <비지터 Q>나 <이치 더 킬러> 같은 영화가 무삭제판으로 국내에 출시되는 것은 앞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섹스 이즈 코미디>처럼 소위 예술성 높은 해외 영화제 수상작들은 운좋게 구제받을 수도 있겠지만, ‘트로마 스튜디오’의 영화처럼 피와 내장, 대소변과 성기가 등장하는 영화들이나 발레리안 보로브칙의 <야수>처럼 우아하지 않은 방식으로 성욕을 묘사하는 자극적인 영화들을 한국어 자막이 실린 DVD로 볼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가까운 시일내에 국내에서 출시가 안 될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들의 목록은 끝이 없고, 그런 영화들마다 해외 출시 타이틀을 입수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 매니아들이 P2P 등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콜렉션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은, 법적 하자 여부를 떠나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응일 것이다.
대여시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DVD 대여점에서 소위 ‘예술 영화’를 발견하기란 과거 비디오 대여점에서 ‘분도시청각’이 출시한 러시아 영화를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물론 출시사나 대여점이 흥행성 강한 화제작을 중심으로 DVD를 출시하거나 대여하는 것을 비난할 수도 없다. 장사인 이상, 그들에게 수지타산을 초월한 예술적 사명감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 매니아들의 ‘불법 다운로드’는 일종의 자구책이라 볼 수 있다. 여건이 안 되니 스스로 찾아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불법 다운로드와 소장문화
불법 다운로드의 폐해로 자주 말하여지는 것이 DVD 대여업 등 ‘2차 판권시장’의 붕괴다. 불법 다운로드가 만연한 것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영상업계가 그동안 자본의 논리에 따라 영화 매니아의 다양한 취향을 배제한 채 시장을 운영하였다면, 2차 판권 시장 붕괴의 직접적인 책임이 영화 매니아들에게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 매니아를 타겟으로 한 출시작들이 원체 적었기 때문에,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영화 매니아들이 대여 시장을 이탈하였다 하더라고 전체 시장에 있어 그 파급력은 미미할 것이라는 얘기다.
오히려 영화 매니아들은 2차 판권 시장에 새로운 구매력을 제공하였다. DVD의 본격적인 보급과 함께 형성된 ‘셀스루(판매)’ 시장을 통해서다. 영화 매니아 특유의 충성도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DVD로 소장하려는 욕구로 나타났고, 그동안 국내에서 부족하나마 꾸준히 소위 ‘예술 영화’나 그 밖의 소수 취향의 영화들이 DVD로 출시되어 온 것도 바로 영화 매니아들의 구매력 덕분이다. 물론 ‘예술 영화 다운로드족’이 모두 ‘예술 영화 DVD 구매자’인가, 하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필자의 경우, 소장하고 있는 DVD 타이틀은 전부 구매 전에 다른 매체-비디오 테입이나 동영상-를 통해 미리 본 것들이고, 영화가 마음에 들어 DVD를 구매한 것이다. 개인적인 사례일 뿐이지만 다른 영화 매니아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클수록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더 좋은 화질과 음질로 오랫동안 보관하고 싶은 욕구 또한 클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 매니아가 DVD를 구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 영화가 ‘충분히’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지, ‘불법 다운로드’로 구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물론 ‘불법 다운로드 영화 매니아’들이 때때로 DVD를 사기도 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영화 매니아’들의 ‘불법 다운로드’가 비난받을 소지는 여전히 많다. 가령 국내에 DVD로 출시되었거나 곧 출시될 영화를 ‘불법 다운로드’로 미리 본 영화 매니아가 그 타이틀의 구매를 포기했다면, 출시사가 입은 잠재적인 손실이 누구의 책임일까? 작년에 모 레이블이 출시한 장철의 무협영화들의 경우, 출시 후 인터넷을 통해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출시사가 입은 피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불법 다운로드’로 그 영화를 보고 DVD를 구매하지 않은 사람의 책임이다. 영화 자체의 만족도와는 별개로, ‘불법 다운로드족’은 정당한 댓가 없이 영상 콘텐츠를 소비한 것이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출시사가 떠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출시사가 저작권상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대처와 강력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최근 극장 개봉작 혹은 개봉 예정작이 동영상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급사들이 들이는 노력처럼 말이다.
하지만, 출시사의 법적 권리를 지켜줘야한다는 원칙에 공감하면서도, 그런 소수 취향의 영화를 다운로드하는 행위에 대해 치졸한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떤 출시작의 관람이 소장을 위한 구매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영화 매니아’들이 감수해야하는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이유 때문이다. DVD 대여점 등을 통해 쉽게 대여할 수 있는 최신작들은 그런 대여 행위를 통해 그 영화의 소장가치를 검증할 수 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대여점에 거의 비치되어 있지 않은 소수 취향의 영화들은 그런 검증의 기회를 확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매니악한 취향을 배제하는 대여 시장의 상업 논리를 비난할 수 없는 거라면, 영화 매니아의 다운로드 행위를 관대하게 받아들여달라는 요구도 발생학적인 근거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3. 다만 보여주지 않는 영화를 보고 싶을 따름이다
필자는 모든 종류의 영상 소스가 인터넷을 통해 자유롭게 공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불법 다운로드’가 우리의 영화 산업의 발전에 큰 저해요인이 되고 있으며, ‘다운로드족’들의 자기절제를 기대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악화되었다는 점도 인정한다. DVD 출시사나 배급사들의 저작권상의 권리와 상업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 ‘적극적인 대책’이, 가령 모든 종류의 영화에 대한 다운로드를 금지한다거나, 현행 저작권법의 '친고죄' 조항을 삭제 또는 '반의사 불벌죄'로 바꾸어 저작권자의 고소없이도 저작권 침해자를 형사적 처벌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부당한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않길 바란다.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기 때문에 ‘불법 다운로드’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영화 매니아들이 ‘불법 다운로드’를 하는 이유는 단지 그들 개개인의 저조한 저작권 의식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영상 산업이 영화 매니아들의 다양한 취향을 수용하려는 시도 대신 지나치게 상업 논리에만 집착하는 풍토에도 ‘불법 다운로드’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적어도 영화 매니아들의 ‘불법 다운로드’는 가시적인 저작권자의 권리를 직접 침해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 국내에 출시되지 않았고 출시되지도 않을 것 같은 영화들을 주로 찾는 탓에, 저작권법이 개정된다 하더라도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적을 것이다. 다만 저작권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 때문에 혹시나 영화 매니아들의 ‘무해한’ 취미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는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조바심이 난다.
영상 산업계에 종사하시는 분들, 영화로 돈을 버시려거든 버시라. 대신 당신들의 이해관계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영화 매니아들의 ‘다운로드’는 방해하지 말라. 영화 매니아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켜줄 의지도 능력도 없지 않은가?
본 필자, ‘다운로드족’이다. 지난 수년간 웹 하드나 P2P 서비스를 통해 수많은 영화를 수집하였고 그 결과 방대한 라이브러리를 소장하게 되었다. 이건 ‘자랑’이 아니라 ‘자백’이다. 영상업계가 작년 하반기부터 온라인상 불법 영상물 유통에 대해 법적 대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더욱 강력한 처벌과 효율적 감시를 위해 ‘친고죄’ 조항을 삭제한 저작권법 개정법률안이 국회에 계류중인 흉흉한 시점에서, 본인이 ‘다운로드족’임을 밝히는 것은 범죄 사실을 털어놓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2
필자는 그동안 지은 죄를 인정한다. 혐의 사실로 제시된 증거자료들이 발뼘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고 결정적이어서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필자는 <태극기 휘날리며>를 불법 동영상으로 관람한 4백만 명의 ‘범죄자’ 중 한 명이고, 온라인 불법 영상물을 받기 시작한 이후 극장에 덜 가게 되었다는 33% 중 한 명이다. 극장뿐이랴. 비디오테입을 마지막으로 대여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것으로 보아, 90년대 말 약 3만5천 개였던 비디오 대여점이 7천여 개로 급감하는 데에도 일조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필자는 혐의 사실을 상당 부분 인정하면서도 속으론 조금 억울하다. ‘불법 다운로드족’은 동일한 영화적 기호와 영화 소비 행태를 가진 하나의 통계집단으로 분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온라인상에서 <월드 오브 투모로우>를 찾아 헤매는 일반적인 다운로드족과 오즈 야스지로의 <피안화>를 찾아헤매는 ‘영화 매니아’가 동일한 영화적 취향을 가졌으며 그들의 불법행위의 동기 역시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 필자는 저 두 부류 사이에 큰 간극이 있으며, 때문에 두 부류의 다운로드족에게 동일한 죄질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매니아’가 처한 ‘불리한 상황’과 영화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애정’이 정상참작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를 비롯한 많은 ‘영화 매니아’들이 영화 다운로드에 목을 매는 건, 최신작들을 남들보다 먼저 보겠다거나 몇 푼 하지도 않는 관람료도 아끼고 편안하게 집에서 영화를 보겠다는 얍삽한 계산 때문이 아니다. 관객의 다양한 취향을 반영하지 못하는 영상업계의 상업논리와 우리 영상 문화계의 척박한 물적 토대, 그리고 근본적으론 개개인의 경제자본의 한도로는 커버할 수 없는 ‘영화에 대한 애정’이, ‘영화 매니아’들을 ‘불법 다운로드족’으로 만든 것이다. 필자는 ‘영화 매니아 다운로드족’들이 ‘희생자’라거나 ‘무죄’라고 우기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의 저조한 저작권 의식이나 비양심만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불법행위를 지속적으로 행하게 된 외부적 원인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 영화 매니아들은 왜 불법 다운로드족이 되었나?
영화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매체가 오직 ‘비디오’뿐이던 8,90년대를 살아온 영화 매니아라면, 희귀 비디오를 소장하고 있다는 비디오 대여점을 찾아 발품을 팔아본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도 경주의 모 비디오 대여점에서 켄 로치의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류블레프>, 베르히만의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등을 한꺼번에 발견하고 환희에 젖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 잡지나 서적을 통해 소문만 들던 영화사의 걸작들을 직접 관람할 기회를 갖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시네마테크에서 조악한 화질으로나마 감상하는 것도 감지덕지였고, 필자처럼 지방에 거주하는 경우엔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출시되는 비디오는 헐리우드나 홍콩 영화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간혹 출시되던 소위 ‘아트 무비’들은 비디오숍에서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당시와 비교하면 오늘날 영화 매니아들은 훨씬 풍요로운 환경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5년쯤 전에 장 비고나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DVD로 출시될 거라고 상상한 매니아들이 몇 명이나 있었겠는가? 인터넷 쇼핑이 일반화되고 해외에서 출시된 타이틀도 금전적 여유만 있다면 비교적 용이하게 구할 수 있으니, 오늘날 영화 매니아들에게 입수가능한 영상 소스의 질과 양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확대되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외양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화 매니아들은 우리 영상문화의 현실이 90년대 비디오 세대의 그것과 비교하여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답보 상태가 그들로 하여금 ‘불법 다운로드’로 영화를 감상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명백한 풍요의 징후에도 불구하여 영화 매니아들이 여전히 새로운 영화에 목말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영상 소스의 질과 양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돈’에 관한 문제인데, 영상 소스를 해외에서 구하려는 경우, 언어적 장벽은 차치하더라도 금전적 부담이 너무 크다. amazon.com을 통해 크라이테리언 판 <7인의 사무라이>를 구입할 경우, 배송에 몇 개월이 소요되기도 하는 가장 싼 운송방법를 선택해도 4만원 이상 소요된다. 물론 많은 영화 매니아들이 정말 소장하고 싶은 영화라면 그 정도 출혈을 감수하겠지만, 보기 원하는 영화마다 저 정도의 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영화 매니아들이 경제적 부담을 덜며 적법한 방법으로 자신의 영화적 욕구를 채울 수 있으려면, 다양한 영화들이 국내에 출시되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영상 소스를 구입거나 대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국내에 출시되는 DVD 타이틀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어, 해외에서 출시된 소스에 군침만 흘려야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내의 DVD 시장은 영화 매니아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이 영화 매니아들이 불법 다운로드족이 된 두 번 째 이유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의 몇몇 출시사들이 양질의 퀄리티를 갖춘 고전 영화들을 의욕적으로 출시하고 있지만, 영화 매니아들의 질적 변화/발전에 영상업계가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각종 영화제와 ‘불법 다운로드’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영상 소스를 접한 영화 매니아들은 기대 수준 자체가 높아졌고 기호도 다양해진 반면, 출시되는 타이틀은 여전히 흥행성 높은 최신작이나 기껏해야 헐리웃 고전이 주류를 이룬다. 가령 국내에 DVD로 단 세 편 출시된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보고 브레송의 다른 영화가 보고 싶어진 영화 매니아가 있다면 그는 어디에서 그 영화들을 구해야 할까? 또, 지알로나 고어같은 다양한 호러 영화 하위 장르의 심취자들은 ‘피’에 대한 갈증을 어디서 채워야 할까? 해답은 ‘인터넷’에 있다. 세계 어디에선가 출시된 적이 있는 영화라면 분명 P2P 등을 통해 구할 수 있을만큼,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는 영상 소스의 양은 무궁무진하다. 영화 매니아라면 저 압도적인 매력을 떨치기 힘들 것이다.
국내 영상물 시장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가장 심각한 병폐는 바로 사전검열이나 다를 바 없는 심의제도다. 최근 카트린느 브레이야의 <섹스 이즈 코미디>가 무삭제로 출시되는 등 심의 위원회가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일반 정서에 어긋난다’는 등의 애매한 기준 때문에 출시가 요원한 영화들은 아직도 수없이 많다. 미이케 다카시의 <비지터 Q>나 <이치 더 킬러> 같은 영화가 무삭제판으로 국내에 출시되는 것은 앞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섹스 이즈 코미디>처럼 소위 예술성 높은 해외 영화제 수상작들은 운좋게 구제받을 수도 있겠지만, ‘트로마 스튜디오’의 영화처럼 피와 내장, 대소변과 성기가 등장하는 영화들이나 발레리안 보로브칙의 <야수>처럼 우아하지 않은 방식으로 성욕을 묘사하는 자극적인 영화들을 한국어 자막이 실린 DVD로 볼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가까운 시일내에 국내에서 출시가 안 될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들의 목록은 끝이 없고, 그런 영화들마다 해외 출시 타이틀을 입수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 매니아들이 P2P 등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콜렉션을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은, 법적 하자 여부를 떠나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응일 것이다.
대여시장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DVD 대여점에서 소위 ‘예술 영화’를 발견하기란 과거 비디오 대여점에서 ‘분도시청각’이 출시한 러시아 영화를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물론 출시사나 대여점이 흥행성 강한 화제작을 중심으로 DVD를 출시하거나 대여하는 것을 비난할 수도 없다. 장사인 이상, 그들에게 수지타산을 초월한 예술적 사명감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 매니아들의 ‘불법 다운로드’는 일종의 자구책이라 볼 수 있다. 여건이 안 되니 스스로 찾아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 불법 다운로드와 소장문화
불법 다운로드의 폐해로 자주 말하여지는 것이 DVD 대여업 등 ‘2차 판권시장’의 붕괴다. 불법 다운로드가 만연한 것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영상업계가 그동안 자본의 논리에 따라 영화 매니아의 다양한 취향을 배제한 채 시장을 운영하였다면, 2차 판권 시장 붕괴의 직접적인 책임이 영화 매니아들에게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 매니아를 타겟으로 한 출시작들이 원체 적었기 때문에,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영화 매니아들이 대여 시장을 이탈하였다 하더라고 전체 시장에 있어 그 파급력은 미미할 것이라는 얘기다.
오히려 영화 매니아들은 2차 판권 시장에 새로운 구매력을 제공하였다. DVD의 본격적인 보급과 함께 형성된 ‘셀스루(판매)’ 시장을 통해서다. 영화 매니아 특유의 충성도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DVD로 소장하려는 욕구로 나타났고, 그동안 국내에서 부족하나마 꾸준히 소위 ‘예술 영화’나 그 밖의 소수 취향의 영화들이 DVD로 출시되어 온 것도 바로 영화 매니아들의 구매력 덕분이다. 물론 ‘예술 영화 다운로드족’이 모두 ‘예술 영화 DVD 구매자’인가, 하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필자의 경우, 소장하고 있는 DVD 타이틀은 전부 구매 전에 다른 매체-비디오 테입이나 동영상-를 통해 미리 본 것들이고, 영화가 마음에 들어 DVD를 구매한 것이다. 개인적인 사례일 뿐이지만 다른 영화 매니아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클수록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더 좋은 화질과 음질로 오랫동안 보관하고 싶은 욕구 또한 클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 매니아가 DVD를 구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 영화가 ‘충분히’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지, ‘불법 다운로드’로 구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물론 ‘불법 다운로드 영화 매니아’들이 때때로 DVD를 사기도 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영화 매니아’들의 ‘불법 다운로드’가 비난받을 소지는 여전히 많다. 가령 국내에 DVD로 출시되었거나 곧 출시될 영화를 ‘불법 다운로드’로 미리 본 영화 매니아가 그 타이틀의 구매를 포기했다면, 출시사가 입은 잠재적인 손실이 누구의 책임일까? 작년에 모 레이블이 출시한 장철의 무협영화들의 경우, 출시 후 인터넷을 통해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출시사가 입은 피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불법 다운로드’로 그 영화를 보고 DVD를 구매하지 않은 사람의 책임이다. 영화 자체의 만족도와는 별개로, ‘불법 다운로드족’은 정당한 댓가 없이 영상 콘텐츠를 소비한 것이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출시사가 떠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출시사가 저작권상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인 대처와 강력한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최근 극장 개봉작 혹은 개봉 예정작이 동영상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급사들이 들이는 노력처럼 말이다.
하지만, 출시사의 법적 권리를 지켜줘야한다는 원칙에 공감하면서도, 그런 소수 취향의 영화를 다운로드하는 행위에 대해 치졸한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떤 출시작의 관람이 소장을 위한 구매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영화 매니아’들이 감수해야하는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이유 때문이다. DVD 대여점 등을 통해 쉽게 대여할 수 있는 최신작들은 그런 대여 행위를 통해 그 영화의 소장가치를 검증할 수 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대여점에 거의 비치되어 있지 않은 소수 취향의 영화들은 그런 검증의 기회를 확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매니악한 취향을 배제하는 대여 시장의 상업 논리를 비난할 수 없는 거라면, 영화 매니아의 다운로드 행위를 관대하게 받아들여달라는 요구도 발생학적인 근거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3. 다만 보여주지 않는 영화를 보고 싶을 따름이다
필자는 모든 종류의 영상 소스가 인터넷을 통해 자유롭게 공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불법 다운로드’가 우리의 영화 산업의 발전에 큰 저해요인이 되고 있으며, ‘다운로드족’들의 자기절제를 기대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악화되었다는 점도 인정한다. DVD 출시사나 배급사들의 저작권상의 권리와 상업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그 ‘적극적인 대책’이, 가령 모든 종류의 영화에 대한 다운로드를 금지한다거나, 현행 저작권법의 '친고죄' 조항을 삭제 또는 '반의사 불벌죄'로 바꾸어 저작권자의 고소없이도 저작권 침해자를 형사적 처벌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부당한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않길 바란다.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기 때문에 ‘불법 다운로드’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영화 매니아들이 ‘불법 다운로드’를 하는 이유는 단지 그들 개개인의 저조한 저작권 의식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영상 산업이 영화 매니아들의 다양한 취향을 수용하려는 시도 대신 지나치게 상업 논리에만 집착하는 풍토에도 ‘불법 다운로드’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적어도 영화 매니아들의 ‘불법 다운로드’는 가시적인 저작권자의 권리를 직접 침해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다. 국내에 출시되지 않았고 출시되지도 않을 것 같은 영화들을 주로 찾는 탓에, 저작권법이 개정된다 하더라도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적을 것이다. 다만 저작권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 때문에 혹시나 영화 매니아들의 ‘무해한’ 취미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는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조바심이 난다.
영상 산업계에 종사하시는 분들, 영화로 돈을 버시려거든 버시라. 대신 당신들의 이해관계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영화 매니아들의 ‘다운로드’는 방해하지 말라. 영화 매니아들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켜줄 의지도 능력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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