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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Caravaggio)의 그림

by Retireconomist 2005. 1. 25.
그는 다윗이 골리얏의 머리를 잘라 들고 있는 끔찍한 그림에 자기 얼굴을 넣었다. 골리앗의 죽어가는 얼굴에도, 그를 죽여 머리를 들고 서 있는 다윗의 얼굴에도....내가 내 머리를 베어 들고 있다~~

소설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첫장면. 소니에르가 미지의 남자의 공격을 받으면서 대회랑 아치 밑에 있는 그림에 매달렸던 그림 중 예상되는 그림



카라바조 [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7.18]
이탈리아의 화가.
본명 Michelangelo Merisi
출생지 이탈리아 베르가모 근교 카라바조
주요작품 《바쿠스》 《성모의 죽음》 《그리스도의 죽음》 《나자로의 부활》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1584년 밀라노의 화가 시모네 페테르차노에게 사사하고 그 후 로마로 가서 처음에는 빈곤과 병고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으나, 뒤에 추기경 델 몬테의 후원으로 화가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정물과 초상을 치밀한 사실기법으로 묘사하여 바로크미술양식을 확립하였는데, 우피치미술관의 《바쿠스》, 루브르미술관의 《여자 점쟁이》 《성모의 죽음》, 로마에 있는 산루이지 데이 프란체시성당의 《성마태오의 순교》, 바티칸궁전에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 《로사리오의 성모》 《나자로의 부활》 등 성모와 성자를 모델로 로마에 사는 빈민의 모습을 등장시킨 그림들을 보면 그는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를 기교적으로 구사하고, 형상을 힘차게 조소적(彫塑的)으로 묘사함으로써, 근대사실(近代寫實)의 길을 개척하였다.

금색을 바탕으로 밝은 색의 조화로써 구성된 초기 작품에서 격하게 억제된 빛으로 조명된 만년의 음울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은 언제나 빛과 형상에 대한 근본원칙을 확립하고 있다. 이탈리아적인 조형전통을 부활시킴과 동시에 F.할스와 렘브란트, 그리고 초기의 벨라스케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고, 17세기 유럽회화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화풍은 제자인 에스파냐의 리베라를 통해 살바토르 로자에게 계승되었다.

1571(?) 밀라노(?)-1610. 7. 18 토스카나 포르테르콜레.

이탈리아의 화가. 그가 주로 사용한 혁신적인 명암법은 바로크 회화의 주요특징이 되었다. 그는 종교적 인 주제를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전통을 경멸하고 거리에서 소재를 위해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성 마태오를 주제로 한 3점의 그림(1597경 - 1602, 로마 산루이지데이프란체시 교회)은 센세이션을 일으 켰으며, 뒤이어 <엠마우스에서의 만찬>(1596-98)과 <동정녀의 죽음>(1605-06)과 같은 걸작들을 그렸다. [초기생애]

카라바조는 카라바조 후작의 집사 겸 건축가인 페르모 메르시의 아들이었다. 11세 때 고아가 된 카라바 조는 바로 그해에 화가인 밀라노의 시모네 페테르차노 밑에 도제로 들어갔다. 아미 그림의 기본기를 갖 추고 있었던 그는 1588-92년 로마에 갔다. 그는 이상화된 피렌체 회화를 반대하여 자연과 일상적인 사 건들을 묘사하는 쪽에 더 가까운 양식을 발전시킨 롬바르디아 및 베네치아 회화 양식을 열심히 연구하 여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밀라노에서 로마까지 여행하면서 도중에 파르마, 볼로냐, 피렌체, 아시시 등지에 머물렀던 것이 확실한데, 그 과정에서 볼로냐 출신의 혁신적인 당대 화 가인 카라치가의 작품들 및 마사초와 조토의 초기 걸작들을 보았다. 카라바조는 이것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색채와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 생생한 느낌을 주던 밀라노 시기의 기법은 선을 더욱 뚜렷하게 그림으로써 억제되었으며, 형식적인 구도에서는 가장 평범하고 수수한 주제들에서 볼 수 있는 사실적 표현이 더욱 강화되었다. 1590년대초 로마의 미술계에서는 미켈란젤로가 확고한 위치에 있 었으며, 지적으로는 활기 차고 열정적인 반종교개혁기의 막을 올린 트리엔트가 지배하고 있었다. 로마는 명예와 부를 좇아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가난한 미술가들을 포함해서 온갖 방문객들로 넘치는 활기 찬 도시였다. 카라바조는 외국인들이 모여사는 캄포 마르초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5년은 불안정하고 굴욕스러운 고통의 시기였다. 그의 전기를 쓴 작가들에 따르면, 카라바조는 잡일 을 해서 생활비를 벌었으며 어떤 스튜디오에서도 몇 달 이상 머물지 못했다. 마침내 1595년경 독자적으 로 일을 하기로 결정하고 마에스트로 발렌티노라는 상인을 통해 그의 그림들을 팔기 시작했는데, 그 상 인인 가져간 카라바조의 작품은 교황궁에서 유력한 고위성직자인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의 주목을 끌었다. 카라바조는 곧 델 몬테의 후원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델 몬테의 후원을 받기 전까지 카라바조는 정신적, 물질적으로 곤궁한 상태에서도 40여 점의 작품을 그렸다. 그 가운데에 는 야심작도 상당수 있는데 그것들은 매우 획기적인 회화적 발명으로서 카라바조의 무질서하고 방탕한 일상생활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우아하고 고상한 솜씨와 명확하고 적절한 표현을 보여주고 있으며 개인 수집가들을 위한 작품들이었다. 각각의 구도에는 회화에 대한 카라바조의 철저한 태도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특히 이 초기의 그림들은 '꽃을 그리는 것은 인물을 그리는 것에 못지 않게 매우 어려운 일이며', '뛰어난 화가는 자연의 사물을 잘 그릴 수 있다'라는 그의 신념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과일 바구니>에서는 화려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진 과일들이 밀짚 바구니 안에 균형 있게 배치되어 있으며 시 각적으로 인상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다.

[로마에서의 주요작품]

이 작품들을 계기로 사실적 표현양식이 전통적인 양식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카라바조의 사실적 자연주의가 처음으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콘타렐리 예배당에 있는 성 마태오의 생애를 주제로 한 작품들에서이다. 카라바조는 1597년에 로마의 산루이지데이프란체시 교회에 있는 콘타렐리 예배당의 장식을 의뢰 받았는데, 델 몬테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일로 그는 24세의 나이에 중요한 후원자와 고객들에게 '저명한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 일은 성 마태오의 생애에서 따 온 장면들로 이루어진 3편의 대형 그림들, <성 마태오와 천사>, <성 마태오와 천사>, <성 마태오의 소명>, <성 마태오의 순교>를 포함하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이 3점의 그림에서 카라바조는 성인전기의 전통에 따른 삽화적 방식 대신에 불온한 사회적 태도에 영향을 받은 극적인 사실주의를 채택했는데, 이것들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마 카라바조는 결국 공개적으로 자신의 폭넓은 변화 를 드러낼 수 있는 이러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구도와 주제의 표면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예술성 자체, 즉 시간과 빛의 느낌도 새롭게 시도하고 있다. 카라바조가 회화 적 혁신에서 사용한 수단은 빛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선과 색에 못지 않게 빛이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이 작품의 구도를 결정하고 있다. 20세기의 미술평론가인 로베르 롱기는 카라바조가 빛을 사용한 것의 중요성을 르네상스 시기에 원근법이 발견된 것의 중요성에 비유했다. 그의 빛은 자연의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에서, 거의 언제나 구경꾼들의 어깨지점에서 가득 쏟아지는 신비한 빛이며, 색의 체계를 변화시켜 피부의 변색현상처럼 색의 미묘한 변화를 없애버리고 그리하여 색조를 단순하고 매우 어둡게 만드는, 연극무대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 그런 빛이다. 콘타렐리 예배당의 장식은 1602년경에 완성되었 다. 카라바조는 당시 30세도 채 안 되었지만 당대의 모든 화가들을 능가했다. 개인이나 교회 모두 그에 게 많은 그림을 주문했다. 그가 예술적으로 절정기에 이르렀을때 그려진 그림들의 일부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산아고스티노 교회를 위해 그린 <성모와 순례자들>, <로레토의 성모>는 전경의 무릎 꿇 고 있는 '더러운 발과 남루한 모지'차림의 두 노인으로 말미암아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동정녀 의 죽음>은 동정녀를 모욕했다고 해서 카르멜회 수도사들에게 거절되었다. 이 그림은 루벤스의 권유로 1607년 4월에 만토바의 공작이 구입했으며 만토바로 옮겨지기 전에 1주일 동안 로마에서 화가들에게 전시되었다.

[성숙한 양식의 절정기]

미술가들과 학식 있는 사람들 및 진보적인 고위성직자들은 카라바조의 거칠고 난잡한 미술에 들어 있는 미묘하고 신비한 함축적 의미에 매혹되었지만, 교회의 공직자들은 전통적인 화가들의 자기방어적인 과 민성과 보수적인 성직자 및 많은 대중들의 본능적인 저항을 반영하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카라바조가 받았던 여러가지 비난이 그의 성공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의 명성과 수입은 늘어났으며 그는 다른 화가들의 부러움을 사기 시작했다. 초기 로마 시기의 절망적인 방랑생활이 끝나고 그는 추기 경과 왕자들의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여전히 성급하고 방탕한 성격을 버리지 못했다. 초기 로마 시기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콘타렐리 예배당의 장식 이후 카라바조는 여러 차 례 걸쳐 법을 위반했다. 1600년 한 동료 화가는 폭력 사건으로 그를 고발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한 군인 에게 부상을 입혔다. 1603년 또다른 화가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프랑스 대사의 중재로 가까스로 풀려 났다. 1604년 4월 그는 급사의 얼굴에 아티초크 접시를 던진 사건으로 고발되었으며, 10월에는 로마 수 비대에게 돌을 던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1605년 5월 그는 무기를 잘못 사용해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7월 29일에는 애인을 지키려다가 한 남자를 다치게 하는 바람에 한동안 로마를 떠나 있어야만 했다. 그 뒤 1년도 지나지 않아 1606년 5월 29일에 카라바조는 다시 로마로 돌아왔으나 테니스 경기중 점수 때문 에 심한 다툼을 벌이다가 라누초 톰마소니라는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카라바조는 자신도 부상을 입은 데다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과에 겁을 먹고 초조한 상태에서 그 도시를 피해 카라바조 후작의 한 친척이 소유하고 있는 근처의 영지로 피신했다. 그 뒤 그는 다른 은신처 로 옮겨다니다가 결국 1607년초 나폴리에 도착했다. 그는 한동안 나폴리에 머물면서 플랑드르의 화가인 루이 팽송을 위하여 <로사리오 기도중의 성모>를 몬테델라미세리코르디아 예배당을 위하여 그의 후기 걸작들 중 하나인 <은총을 주제로 한 7편의 작품>을 그렸다. 이 그림의 어둡고 절박한 분위기는 틀림 없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빠져 있었을 그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또한 그의 회화양식 의 변화를 처음으로 나타내고 있다. 1607년말(또는 1608년초)에 카라바조는 몰타섬을 여행하며 그곳에서 유명한 미술가로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열심히 일을 하여 여러 작품을 완성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의 교회를 위해 그린 <세례 요한의 참수>였다. 1608년 7월 14일 카라바조는 몰타 수도회에서 '정의의 기사'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그 뒤 곧 그가 저지른 죄에 관한 소문이 몰타에 퍼지고 다시 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그 수도회에서 쫓겨나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탈출했다.

카라바조는 시칠리아로 피신하여 1608년 10월에 시라쿠사에 도착했으나 추격받을 것이 두려워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명성이 따랐으며, 그리하여 시라쿠사에서 그는 산타루치아 교회 를 위하여 후기의 비극적인 걸작인 <성녀 루치아의 매장>을 그렸다. 1609년초에 그는 메시나로 피신하 여 그곳에서 <나사로의 부활>, <양치기들의 경배>를 그렸으며, 그 뒤에는 팔레르모로 피신하여 그곳의 산로렌초 예배당을 위하여 <성 프란체스코와 성 라우렌티우스의 경배>를 그렸다. 카라바조가 도망을 다니면서 가장 어려운 역경에서 그린 작품들 중에는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뛰어난 구도의 작품들이 몇 점 들어 있다. 구도는 예전보다도 더욱 웅장하지만, 이 작품들은 예전의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직접적 인 묘사보다 미묘한 감정 표현과 부드러운 색조로 훨씬 더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를 괴롭혔을 것임이 틀림없는 산란한 정신상태를 고려할 때 이 차분하고 강렬한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뛰어난 작품성은 특 히 주목할만하다. 그의 필사적인 도주는 오직 교황의 사면으로만 끝날 수 있었는데 카라바조는 1609년 10월 그가 다시 북쪽의 나폴리로 거처를 옮겼을 때 로마에서 그를 위하여 중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불운이 그를 덮쳐 그가 어떤 여관문 앞에서 공격을 받아 심한 부상을 입고 죽었다는 소문이 로마에 퍼졌다. 회복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1610년 7월 배를 타고 교 황령 안의 스페인 속령인 포르테르콜레로 갔으나 잘못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가 감옥에서 풀려났 을 때는 이미 자기를 로마에 데려다줄 배가 자신의 물건을 싣고 이미 떠난 뒤였다. 불행과 극도의 피로가 겹친 데다가 열병이 재발해서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떠나가는 배를 보며 바닷가에 쓰러진 며칠 뒤 37세도 안 된 나이로 죽고 말았다.

[평가]

카라바조는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미술가로 평가된다. 그는 이전 1세기 동안 미술을 이끌어온 인간적, 종교적 경험을 이상적인 형태로 나타내는 플라톤식 이상을 버리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으며, 인생은 언제나 일종의 드라마이고 모든 경험(심지어 신비한 경험조차)은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물리적 현상 속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우 감정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현 상세계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건들의 의미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에서 극적인 순간을 뛰어나게 묘사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그의 그림들은 순간을 포착한 극적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의 인간관은 당시에는 독특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널리 칭찬을 받고 그의 기법이 널리 모방되기는 했지만 그는 외로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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