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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Lifestyle

〈The Book Thief (책도둑)〉 (2013)

by Retireconomist 2014. 2. 19.







이 영화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바로 '(깨진) 수정의 밤'이다. 


'(깨진) 수정의 밤'(Kristall Nacht, 1938년 11월 9일 ~ 11월 10일)은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3등 서기관이었던 에른스트 폼 라트가 헤르셸 그린슈판(Herschel Grynszpan‏)이라는 17세의 독일계 유태인 청년의 암살로 사망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깨진 수정의 밤’ 또는 ‘깨진 유리의 밤’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이름은 사건 당시 수많은 유리창이 깨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린슈판은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복수하겠다는 생각으로 파리 주재 독일 대사였던 요하네스 폰 벨체크(Johannes von Welczeck, 1878년 9월 2일 - 1972년 10월 11일)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마침 3등 서기관 라트가 용무 차 대사관저를 방문했다가 대신 저격당했던 것이다. 라트로서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라트는 반나치적 행동으로 인해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1938년 11월 7일) 또 특정 인물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대사관에서 독일인 아무나 죽일 생각이었다고도 한다. 더 논란이 되는 설은 그린슈판이 라트를 개인적 원한으로 인해 죽였다는 것이다.


1938년 11월 7일, 헤르셀 그륀슈판(Herschel Grünspan)이란 유태인 청소년이 파리에서 나치독일의 외교관인 에른스트 폼 라트(Ernst vom Rath)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나치로 하여금 유태인 박해를 법적수단이 아닌 물리적 폭력수단으로 수행토록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이 사건이 터지고 난후 나치 선전상인 요셉 괴벨스(Joseph Goebbels)는 외형적으로는 나치당원들과 돌격부대(SA: Strumabteilung)에게 냉정할 것을 주문했지만 실제로는 유태인에 대하여 마음대로 폭력을 행사하라고 조장했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부터 며칠에 걸쳐, 나치에 의한 유태인 집단만행(포그럼)은 독일 전역에서는 물론 오스트리아, 그리고 폴란드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인 주데텐란트(Sudetenland)에서 동시에 발생하였다. 이날 밤의 포그럼을 크리슈탈나하트(Kristallnacht), 또는 ‘11월의 포그럼’이라고 부른다. 크리스탈나하트는 글자그대로 보면 ‘수정과 같은 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깨진 유리의 밤’(Night of Broken Glass)이었다. 


11월 9일 저녁부터 다음날까지 요제프 괴벨스가 라트의 죽음에 항의하는 독일 국민들의 "자연발생적 항위 시위"였다고 선전매체를 동원해 보도한 이 사건의 결과로 대략 점포 815개소, 주택 171동, 유대인 예배당 시나고그 193개소가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다. 유대인 2만명이 체포되었고 하나 정확한 수치는 기록에 없다. 11월 10일 새벽 1시 20분에 제국보안본부의 수령 하이드리히는 전국의 경찰 및 SS보안방첩부(SD)에 시위 운동의 조직을 협의하라는 내용의 지령이 담긴 훈령을 내렸다. 이 훈령에는 유대인 상점 및 집은 파괴할것, 유대인 예배당은 주변에 불이 번질 염려가 없으면 소각할 것, 경찰은 시위를 저지하지 말 것, 가능한 부유한 유대인을 우선 순위로 체포할 수 있는 만큼 체포하라는 등의 명령이 들어 있었다.


유대인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라트가 유대인에게 살해당한 죄값을 치르라는 의미에서 일단 피해 입은 유대인이 보험사로부터 보험금을 수령하자 당시 경제부 장관이었던 괴링이 이들 유대인의 보험금 및 재산을 라트의 암살에 대한 보상을 국가에 한다는 명분으로 모두 몰수해간 것이다. 이 조치를 확립한 것은 11월 12일이었다. 이 사건은 나중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추궁되었고 괴링도 사실을 인정한 바 있다.


유태인들은 길거리에 개처럼 끌려나와 폭행을 당했고 유태인 상점들은 약탈을 당했다. 경찰들을 팔짱을 끼고 웃으면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독일에서만 7천개 이상의 유태인 상점과 1,668개의 유태인 시나고그(회당)가 파괴되었다. 시나고그만 따지면 독일에 있는 유태인 회당이 거의 전부 공격을 받은 셈이었다. 당국은 이날 밤에 91명의 유태인이 살해되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 살해된 유태인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 하루밤 사이에 운명이 바뀐 유태인들은 부지기수였다. 이날 밤과 이튿날 아침에 독일에서만 3만명의 유태인이 체포되어 다하우(Dachau),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부헨발트(Buchenwald), 오라니엔부르크(Oranienburg)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이유도 모른채 강제수용소에 끌려갔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겠다고 약속을 하거나 재산을 모두 독일 당국에 헌납한다는 조건으로 일부가 석방되었다. 크리슈탈나하트로 인하여 건물이 파괴되거나 공공시설이 손상된 것은 모두 유태인의 책임으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유태인들은 크리슈탈나하트로 인한 보이지 않는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감당해야 했다. 예를 들면 독일인이 유태인들 때문에 정신적인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면 보상을 해주어야 했다. 유태인들은 수백만 마르크를 모아서 나치정부에 바쳐야 했으며 더구나 당국으로부터 수십억 마르크에 해당하는 ‘참회세’(Atonement Tax)를 통보받아 강제로 납부해야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고 주객이 전도된 주장이었지만 유태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무언지도 모르는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한 후 돈을 바쳐야 했다. 크리슈탈나하트 이후, 나치독일을 피하여 다른 나라로 이민의 길을 떠나는 유태인의 숫자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독일에서 유태인들의 공식적인 활동은 이것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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